몇몇 아웃사이더(outsider)들이 공식적인 지도자나 다중(多衆)의 역량을 능가하는 힘을 발휘할 때가 있다. 이들이 역사의 물줄기를 돌려놓는 경우도 있고, 역사의 매듭을 짓거나 푸는 경우도 의외로 많이 있다.


삼국지에는 역사의 전면에 나서서 대세를 이끌어가는 여자는 나오지 않지만, 군웅의 배후에서 드러나지 않게 자신에게 부여된 역사적 소명을 충실히 해내는 여자들의 이름은 더러 나온다. 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여자들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동탁을 제거한 사도 왕윤의 수양딸 초선(貂蟬)이다. 철옹성 같은 호위에다, 삼국지 최고의 무장 여포까지 곁에 있으니 동탁을 없애는 것은 영영 불가능한 듯 보였다. 그러나 가냘프고 어여쁜 열여덟 살의 처녀가 결국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아 여포로 하여금 동탁을 죽이게 한다.


여자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기꺼이 열사가 되기도 하고 또 나라를 팔아먹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천애고아였던 초선은 어릴 때 자신을 데려다 고이 길러준 사도 왕윤을 위해 꽃 같은 제 한 몸을 바쳐서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고 자결함으로써 보은(報恩)과 충절을 함께 한다.


또 한 사람, 열사의 반열에 올려놓아도 조금도 손색이 없는 여자가 있다. 유비의 조강지처로서 유비의 아들을 구하기 위해 자결한 미 부인이다.


조조의 대군에 쫓기며 형주의 주민들과 함께 패주하던 유비는 드디어 장판파에서 조조군에게 추월당하고 말았다. 처자까지 적진에 둔 채…. 이때 조운이 유비의 처자를 찾으러 단기로 적진을 뚫고 들어갔다. 창날이 너덜너덜할 정도로 적군을 베어 넘기며 적진을 누비던 조운은 드디어 우물가에 쓰러져 있는 미 부인을 발견했다.


유비의 아들인 아두를 품에 안고 있었다. 조운은 속히 말에 오르기를 재촉했지만, 미 부인은 세 사람이 말에 오르면 모두 다 살아남을 수 없음을 알고 아두 만이라도 살려내어 후사를 잇게 해 달라고 부탁하고 우물 속으로 뛰어든다.


유비를 따라 전장에서 온갖 고초를 겪어오다 장렬한 최후를 마친 용결(勇決)의 국모 미 부인은 죽어서 황후의 시호도 받지 못했다. 그때 살아난 아두에 의해 정작 소열황후로 추서되어 유비와 합장된 여자는 감 부인이었다.


이번에는, 뛰어난 미모로 인해 운명이 바뀌는 여자이다. 조조군에 의해 기주성이 함락되었을 때, 관사에 있던 원소의 둘째아들 원희의 부인 견 씨는 조조의 큰아들 조비의 눈에 띄게 되어 나중에 그와 결혼까지 하게 된다. 조비와의 사이에 태자 조예를 낳았다.


미모가 워낙 출중해서인지 시아버지인 조조와 시동생인 조식의 사랑까지 받은 견 황후는 후일 후궁의 참소 때문에 억울하게 죽어야 하는 비운의 여인이 된다. 패장(敗將) 원소의 며느리였다가 승장(勝將) 조조의 며느리가 되었으니 인생역전인가 싶었는데 모함으로 죽임을 당하고 마는 것이다.


여자 얘기를 하면서 전장에서 바람을 피우다가 큰 낭패를 당하는 삼국지 최고의 영웅 조조 얘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동탁의 부하였던 장제의 조카 장수(張繡)의 항복을 받은 조조는 장제의 미망인 추 씨가 기막힌 미인이란 소문을 듣고 그녀를 자신의 군막으로 불러들인다. 그리고 두 사람은 연일 음락(淫樂)에 빠진다.

조조가 자신의 숙모와 놀아나고 있는 것을 알게 된 항장(降將) 장수는 분개하며 조조의 경호실장 전위에게 술을 잔뜩 먹이고 그의 무기인 쌍철극을 감추어버린다. 그리고 옛 부하들과 함께 조조의 군막을 기습한다. 혼자 분투하던 전위는 역부족으로 숨지고 만다.

조조는 조카 조안민과 함께 뒷문으로 도망쳤으나, 조안민은 뒤따라오는 적병에게 목숨을 잃는다. 타고 있던 말이 화살에 맞는 바람에 낙마한 조조는 때마침 쫓아온 맏아들 조앙이 내준 말을 타고 도망쳤으나, 조앙도 적의 화살에 맞아 죽는다.


결국 조조는 패군을 수습하여 장수의 반란군을 진압하지만, 진중에서 여색을 탐하다가 충직한 경호실장 전위와 조카, 그리고 맏아들을 잃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조조는 이들에게 제사를 올리면서 회한의 눈물을 흘린다.


오나라 쪽에는 오주 손권의 이복 여동생 손상량과, 미인으로 유명한 이교(二喬) 자매를 빼놓을 수 없다. 손상량은 무예가 뛰어난 여걸로서, 유비와 정략 결혼하여 손 부인이 되었다가 다시 친정으로 돌아간다. 이교 중에서 언니인 대교는 손책의 부인으로 일찍 과부가 되었고, 동생인 소교는 대도독인 주유의 부인이 되었다.


강북을 제패한 조조가 오나라까지 평정하려고 일으킨 적벽대전을, 여자를 밝히는 조조가 이미 남의 아내가 된 이교, 특히 소교를 데려오겠다고 일으킨 전쟁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다. 어쨌거나 조조의 백만 대군은 5만 명에 불과한 손권과 유비 연합군의 화공에 완전히 괴멸되고 말았으니 조조는 소교의 손목도 한번 잡아보지 못하고 패주하고 만다.


다음엔 무장 중에서도 모범생이라 할 수 있는 조운 얘기이다. 조운과 의형제를 맺은 계양태수 조범이 과부가 된 지 3년이 된 형수 번 씨를 조운에게 소개해준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절세가인이었다. 그런데 조운은 '너에게 형수이면 나에게도 형수가 되거늘 어찌 인륜을 더럽힌단 말이냐!'하고 역정을 내며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다.


번 씨가 원하는 새 남편의 조건에도 조운이 딱 들어맞고, 조운도 분명히 번 씨를 맘에 들어하는 눈치였는데, 왜 조운이 그 과부를 마다했을까? 정말 그렇게 하는 것이 인륜을 더럽히는 일일까?


마지막으로, 제갈량 얘기이다. 제갈량의 부인 황월영(黃月英), 대석학 황승언의 딸이며 형주자사 유표의 이질녀이다. 명문 집안에다 학식과 재주, 교양은 손색없이 갖추었으나 아주 못생겼다고 한다. 작달막한 키에 얼굴은 거무스름한데다 곰보였다고 하니…. 당시의 우스갯소리에 이런 것이 있다.

莫學孔明擇婦(막학공명택부) 제갈량의 여자 고르는 솜씨는 배우지 마라

止得阿承醜女(지득아승추녀) 황승언(阿承)의 못생긴 딸을 얻었을 뿐이니

천하의 기재에겐 그런 배필이 어울리는 것일까? 어쨌거나 금슬은 더없이 좋았다고 하니 연분이란 정말 따로 있는 모양이다.


<다음주에 계속>
최용현
밀양 출신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회원
사단법인 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
저서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 '꿈꾸는 개똥벌레'

'삼국지 인물 108인전', '영화, 에세이를 만나다' 외 다수

내외뉴스통신, NBN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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