촉을 병합한 공로로 진왕이 된 위의 실권자 사마소가 죽자, 진왕의 지위를 물려받은 그의 아들 사마염은 명목뿐인 위 황제 조환으로부터 선위(禪位)을 받아 진(晋) 황제가 되었다(265년). 그의 조부 사마의로부터 백부 사마사를 거쳐 부친 사마소에 이르기까지 3대에 걸친 치밀한 준비공작의 결실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양자강 하류의 오나라뿐이었다. 때를 기다리던 진 황제 사마염은 마침내 기회가 무르익자 두 갈래로 군사를 보내 오 정벌을 단행, 오주 손호를 항복시키니 삼국은 드디어 통일(280년)을 이루었다. 황건적의 난 이래 거의 100년 만이요, 삼국이 분립된 지 약 60년 만이었다.

사마염은 할아버지 사마의를 선제(先帝)로, 큰아버지 사마사를 경제(景帝)로, 아버지 사마소를 문제(文帝)로 추존한다. 위의 제위를 물려받아 삼국통일을 이룬 진이 어떻게 융성하고 쇠퇴했는지 살펴보면서 아울러 선양(禪讓)의 의미를 생각해 보고자 한다.

사마염은 왕조의 영속을 위해 고심했다. 그 자신이 신하로서 위의 제위를 뺏은 것처럼 진 왕조에도 또다시 유력자가 나타나 제위를 빼앗지 않을까 두려웠다. 그는 위가 어떻게 약화되어 자신에게 제위를 뺏기게 되었는가를 연구하였다. 그 결과 황족 중에서 유력자들이 없어서 제실(帝室)이 고립되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사마염은 그의 일족들을 무더기로 왕으로 임명하여 각 지방을 다스리도록 하고, 왕들에게는 영토를 주고 군대도 갖게 하였다. 또 왕들에게는 정치적인 발언권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황실의 울타리가 되어줄 것을 기대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과 같은 혁명의 야망을 가진 사람이 나오지 못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앞일을 어떻게 예측할 수 있으랴. 황실이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한다면 왕들도 스스로의 이익을 위해서 행동하기 마련이다.

사마염이 55세로 사망하자 32세인 태자가 황제로 즉위했다. 이 사람이 바로 중국사에서 암우(暗愚)한 천자의 표본으로 꼽히는 혜제이다. 선천적으로 지능이 박약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걸 보면 천재 집안에도 돌연변이는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문제는 혜제의 황후인 가 씨가 뛰어난 결단력과 간지(奸智)를 갖춘 여자였다는 점이다.

가 황후는 각지의 왕들과 중신들이 결탁하여 남편인 혜제를 폐위시킬까봐 늘 불안했다. 마침내 가 황후는 선수를 치기로 하고 황실을 넘볼 만한 실력을 가진 왕과 중신들을 한사람씩 제거해 나갔다.

이에 불안을 느낀 각지의 왕들은 드디어 가 황후의 폭거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다. 궁중을 습격한 이들은 먼저 가 황후를 죽이고 혜제를 유폐한 다음 제멋대로 황제가 되었다. 이때 여덟 왕들이 들고 일어나 서로 죽이고 죽었는데, 이를 ‘8왕의 난(八王의 亂)’이라 부른다.

황실의 울타리가 되어달라고 두었던 왕들이 오히려 황실의 와해를 촉진시켰다. 진의 황실이 내란을 거듭하고 있는 사이, 국경 지방에서는 오랑캐들인 흉노족 선비족 강족 등 오호(五胡)의 세력들이 봇물처럼 중원을 향해 밀려들어왔다. 도성 낙양이 함락되고 이들이 각지에다 무더기로 나라를 세우니 중원은 완전히 이민족들의 천지가 되고 말았다.

대혼란기가 찾아왔다. 다섯 이민족들이 세운 열여섯 나라들이 각각 수십 년씩 존립하다가 명멸해간 이 시기를 5호16국시대라고 한다. 진 최후의 황제인 민제는 장안에서 흉노족 출신 유연의 아들 유총에게 잡혀 죽임을 당했다. 사마염이 세운 진은 건국한 지 51년 만에 한화(漢化)한 흉노족 유 씨에게 망하고 말았던 것이다(316년).

그러나 사마 씨 정권이 완전히 몰락한 것은 아니었다. 이때 진 황실의 일족으로 사마의의 손자인 사마예가 양자강 남쪽으로 망명하여 오의 옛 수도 건업에 근거를 삼고 황제에 올라 진의 사직을 이어갔다(318년). 망명정부였던 셈이다. 역사에서는 이를 동진(東晋)이라 하고, 그 이전의 진을 서진(西晋)으로 부르고 있다.

동진 정권이 강남에 들어서면서 양자강 이남의 땅은 개척이 활발해져 인구의 유입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동진은 북방지역을 회복하지 못한 채 그럭저럭 100년 가까이 이어져 오다가 다시 큰 혼란의 시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때 동진의 혼란을 평정한 사람이 한 황실의 후손으로 군벌 출신의 실력자 유유였다.

유유는 민중들의 반란을 평정하고 북방을 공략하여 일시적이나마 장안을 탈환, 큰 명성을 얻었다. 동진의 실권자가 된 유유는 동진의 마지막 황제인 공제로부터 선양의 형식으로 제위를 물려받았다. 이로써 사마 씨의 동진은 완전히 멸망하고 새로이 송(宋) 왕조가 탄생하였다(420년). 이때의 송은 후일 당과 이어지는 송과는 다르므로 남조송(南朝宋) 혹은 유송(劉宋)이라 부른다.

전에 사마염이 세운 서진이 유총에 의해 망한 사실과, 사마예가 세운 동진이 유유에 의해 망한 사실을 두고, 다시 유 씨에 의해 촉한의 부흥이 실현되었다고 의미를 붙이는 견해도 있으나[後三國志], 그렇게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이들의 성씨가 유 씨라는 사실 외에는 촉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제위를 떠난 진의 공제는 유유의 지시로 독살되었다. 전에 한과 위에서 양위(讓位)를 한 황제들은 모두 천수

를 다하고 죽었는데…. 선양이라는 행위는 표면상으로는 겸양의 미덕과 예(禮)를 갖춘 행위지만, 실질적으로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제위를 빼앗는, 위선에 찬 찬탈 행위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거기에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면 그것은 힘과 힘이 물리적으로 충돌할 경우에 필연적으로 생기게 되는 유혈을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정권교체를 이룩할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위의 조비가 후한으로부터 선양의 이름으로 제위를 뺏은 이래, 그 후에 일어선 왕조들이 대부분 이와 같은 절차를 밟았다는 점이다. 이 방식으로 제위에 오르는 것만이 정통성을 입증하는 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앞의 진과 송을 위시하여, 후일 일어서는 제(齊) 양(梁) 진(陳), 그럴 필요가 전혀 없을 것 같은 수당(隋唐)의 교체까지도 굳이 번거로운 이 절차를 밟는 것이다. 참으로 역사의 아이러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연재 완료]

최용현
밀양 출신
건국대 행정학과 졸업
수필가, 한국문인협회 회원
사단법인 전력전자학회 사무국장
저서
'강남역엔 부나비가 많다', '꿈꾸는 개똥벌레'

'삼국지 인물 108인전', '영화, 에세이를 만나다'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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