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락인 사건전문기자] 국립 대전현충원 사병 3묘역 307-33741번. 고 김봉년 공군하사가 잠들어 있는 곳이다.
김 하사는 지난 2009년 12월 18일에 순직했다. 향년 23세. 현충원에 안장된 장병들은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있다. 누구의 묘비에는 피가 맺혀 있고, 또 누구의 묘비에는 눈물이 맺혀 있다.
김 하사의 묘비에는 피와 눈물이 한꺼번에 맺혀 있다. “봉년이는 왜 죽은 것일까?” 사망 8년째에 접어들었지만 가족들은 여전히 이 물음표를 느낌표로 바꾸지 못했다.
그래도 봉년이는 해맑게 자랐다. 놀기 좋아하는 천진난만한 장난꾸러기였지만 천사 같은 마음을 가졌다. 초등학교 때는 엄마, 아빠를 돕겠다며 신문배달을 했다. 중학교 때는 “누나들은 공부하라”며 국비로 학비가 지원되는 공군기술고등학교(현 공군항공과학고등학교)에 진학, 3년 내내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공군 부사관(하사)로 임관했다. 이때부터 ‘봉년이’는 김 하사로 불렸다. 부모님이 있는 강릉으로 오고 싶었던 김 하사는 주특기를 ‘정비’에서 ‘무장’으로 바꾸고 강릉공군부대 탄약고에서 근무했다.
후임이 들어오지 않아 꼬박 4년을 막내로 있었는데도,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았다. 선임들의 고장 난 컴퓨터 수리는 김 하사의 몫이었다. 기혼자들이 위험하다고 기피하는 EOD(폭발물 제거팀)에도 스스럼없이 자원했다.
2009년 12월 17일 EOD팀에 배치 받고는 첫 출장 명령받았다. 김 하사는 전날 선임의 컴퓨터를 수리하느라 몇 시간 잠을 못 자고 출장을 가야 했다. 가족들은 그날 새벽을 잊지 못한다. 지안씨는 “뭘 느낀 게 있던 지 새벽에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다. 군화 끈을 풀 수가 없어서 엉금엉금 기어와서 엄마한테 뽀뽀하고 나가는 그 모습이 너무 선해서 현관문을 다시 열어봤는데 헤드라이트(전조등) 불빛 밖에 보이지 않았다”고 떠올렸다.
가족들에게 ‘봉년이’의 모습은 그게 마지막이었다. 지안씨는 “그 이상한 느낌이 죽음으로 돌아올지 알았다면 무슨 수를 쓰던지 가지 못하게 말렸을 텐데…”하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운명을 가른 충주 출장
김 하사의 출장지는 충주의 한 공군부대였다. 같은 부대 소속 선임인 중사 두 명과 같이 출장을 갔고, 임무를 마치고는 저녁 회식자리에 참석했다. 김 하사는 회식에 가기 전 어머니와 마지막 통화를 했다. 다음 날 친척 결혼식이 있었던 것을 의식했던지 “엄마, 내일 일찍 갈 테니 결혼식에 함께 가요. 걱정 말고 주무세요”라며 끊었다. 그렇게 돌아오겠다는 김 하사의 약속은 지금까지 감감무소식이다.
김 하사에게 이날 회식은 ‘운명’을 가른 자리였다. 회식은 부대 밖에서 있었다. 1차는 대대장이 주관했는데, 식당 주인 말로는 “모두 좋은 분위기에서 나갔다”고 전했다. 김 하사의 회식은 1차에서 끝나지 않았다. 중사들과 따로 뒤풀이 자리에 간 것이다. 당초 동기들 모임이 있어 그곳에 절친이던 정 아무개 하사와 같이 가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중사들과 2차 회식(뒤풀이)에 따라갔고, 그곳은 한 아파트 안에 자리 잡은 허름한 호프집이었다. 이 자리에는 김 하사와 강릉에서 함께 출장 간 중사 2명과 충주의 부대소속 중사 2명이 모여 앉았다. 다섯 사람은 술잔을 부딪치며 대화를 나눴고, 자리가 길어지면서 김 하사는 취하고 말았다.
김 하사가 술에 취하자 함께 있던 중사들이 동기인 정 하사를 불렀다. 정 하사는 택시를 타고 김 하사가 있는 호프집에 왔고, 택시에 태워 부대로 들어갔다. 이때의 모습은 CCTV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정 하사는 처음에는 “숙소에서 자다가 나갔다”고 했으나, 김 하사를 화장한 후에는 “동기모임 약속이 깨지고 다른 하사와 밖에서 술 마시다가 데리러 갔다”고 번복했다.
김 하사의 가족이 정 하사가 술 마셨다는 곳에 찾아갔더니 주인은 “‘친구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며 영수증을 가져갔다”는 말을 들었다. 정 하사가 자신이 그곳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영수증을 가져가면서 그 이유에 대해서는 거짓으로 둘러댔던 것이다.
정 하사에 따르면 택시를 타고 부대 안 외부자 숙소에 왔는데, 김 하사가 걷지를 못하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어서 혼자 못 옮기고 다른 중사를 불렀다고 한다. 그 사이에 정 하사는 자신의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었고, 그것을 ‘봉년이의 마지막’이라면서 지안씨에게 이메일로 보냈다.
정 하사가 다른 일행들과 함께 외부자 숙소에 들어오자 강릉에서 함께 출장 간 중사가 (김 하사)를 "이불에 싸서 침대에 올려놓으라"고 했다. 정 하사는 그 모습을 보고 “봉년아 일어나면 전화하라”는 문자를 남겼다. 이때가 18일 자정을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김 하사와 같은 숙소에 있었던 부사관은 “새벽에 일어나서 라면을 끓여먹고 다시 잤다. 그리고 오전 7시 30분쯤 일어나보니 김 하사는 자고 있었고, 더 자라는 생각에 자신은 아침을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숙소에 들어왔는데도 김 하사는 여전히 일어나지 않고 코를 많이 골았다”고 진술했다.
그때서야 이상하게 생각하고는 의무대를 불렀고, 숨을 쉬지 않으니까 앰뷸란스를 불러 충주 건국대병원으로 이송했다고 한다. 그런데 가족들에 따르면 “사망 후 병원에 갔을 때는 이미 시반이 보일 정도로 시간이 경과됐다. 죽은 사람이 코를 골수가 있나? 어디까지 진실이고 또 어디까지 거짓인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김 하사의 여자 친구는 당시 부대에서 온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김 하사 부모님의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것이었다. 얼마 후 김 하사의 어머니는 청천벽력 같은 비보를 듣게 된다. “김봉년 하사가 위독한 상태고, 지금 충주로 가야하니 준비하라”고 했고 얼마 후 주임원사 2명이 승용차를 타고 왔다.
김 하사의 어머니와 둘째누나는 이때까지만 해도 봉년이가 응급실에 있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건국대병원에 도착해보니 응급실이 아닌 지하 영안실로 안내했고, 냉동고 안에는 싸늘한 시신으로 변해버린 김 하사가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주검을 보고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오열했다. “봉년아!” “봉년아!”
지안씨는 “(봉년이) 얼굴을 한 번 만져봤는데, 차갑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그냥 자고 있는 것 같았다. 점퍼를 입고 있었고, 눈은 감겨 있었으며, 팔 안쪽에 주사 바늘 자국이 보였다. 외상은 하나도 없었다. 눈썹 끝나는 부분에 작은 멍이 들어있었다”며 시신의 상태를 설명했다.
얼마 후 서울에서 온 김 하사의 큰 누나와 매형이 영안실에 도착했다. 그리고 포항에 있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와서 아들의 주검을 확인했다. 김 하사의 남은 가족들에게는 가장 슬픈 날이었고, 세상에서 가장 긴 하루였다. 가족들은 담당 의사를 찾았지만, 서울 본가에 갔다고 해서 만나볼 수 없었다. 대신 다른 의사를 만나 “이미 사망한 상태로 실려 와서 아무 조치도 못 했고, 심폐소생술만 시도했다”는 얘기만 들을 수 있었다.
이날 밤 김 하사의 사망에 대한 현장검증과 검시가 있었다. 현장검증에는 김 하사와 함께 있던 중사들과 숙소로 옮겼던 하사들이 당시 상황을 재현하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김 하사가 병원으로 실려 간 뒤 숙소는 사병이 청소를 한 상태였다. 국방과학수사연구소에서는 깨끗하게 치워진 현장에서 발자국과 지문을 채취해 갔다고 한다.
당초 2차 회식자리에 있던 중사들은 그곳에서 별다른 일이 없었다고 진술했다. 그런데 김 하사를 화장한 후에는 “(김 하사가) 술에 취해 술을 테이블에 쏟았고, 함께 있던 중사가 욕을 하고 분위기가 험악해졌다”며 말을 바꿨다. 유족들은 해당 술집에서 있었던 자세한 상황을 알기 위해 사건 발생 2주 후에 찾아갔는데 술집은 없어진 후였다.
김 하사의 자세한 사망원인을 알기 위해서는 부검을 해야 했다. 가족들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부검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하지만 군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지안씨는 “‘군인은 절차가 복잡하고 국과수에서 부검을 안 해 줄 것이다. 국군병원도 민간의사가 부검한다’며 우리를 속였다”고 말했다. 결국 부검은 김 하사가 사망한 지 이틀 뒤에 강릉 국군병원에서 국방과학수사연구원 소속 군의관들이 진행했다.
처음에는 사인이 기도폐쇄나 심장마비로 추정됐다. 술에 취해 구토를 한 상태였기 때문에 그것이 기도를 막았거나, 아니면 심장마비로 사망했을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그런데 막상 부검을 했더니 사인은 ‘두개골 골절’로 밝혀졌다. 두피에 큰 충격이 가해졌으나 상처가 없었기 때문에 충격을 준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혈중 알코올농도는 0.045에 불과했다. 음주운전 단속 수치 미만이다.
김 하사의 아버지가 부검을 지켜봤는데, 두 개골의 3분의 2가 금이 간 게 보였다고 한다. 두피에는 멍도 없고, 긁힌 상처도 안 보였다. 두개골이 골절될 정도인데, 머리에 멍도 없었고 어떤 흔적도 없이 깨끗했다. 가족들의 의문은 더욱 더 증폭됐다.
현충원 안장과 함께 진실도 덮였다
김 하사는 어디에 머리를 심하게 부딪친 것일까? 크게는 네 가지로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 2차 회식자리에서 험악한 분위기였다는 진술이 있는 것을 보면 그곳에서 폭행이 있었거나 바닥에 넘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둘째, 부대 숙소 앞에 도착해서 땅바닥에 주저앉아 구토를 했었는데, 이때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을 수 있다.
셋째, 나중에 김 하사를 감싼 이불을 어머니가 숙소 장롱에서 찾았는데, 이불이 바닥에 쓸리고 흙이 묻어있었다고 했다. 이걸 보면 김 하사를 이불에 싸서 들고 오다 바닥에 떨어뜨렸거나 질질 끌고 오다 강하게 부딪쳤을 가능성도 있다. 넷째, 침대에 올릴 때 잘못해서 아래로 떨어뜨렸는데, 이것이 두개골 골절의 원인이 됐을 수도 있다. 이것에 대한 확실한 조사가 나온 게 없기 때문에 어디까지나 추정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군은 빨리 덮기에만 급급했다. 김 하사의 사인이 ‘두개골 골절’로 나오자 군의 분위기도 이상하게 돌아갔다. 김 하사의 부모님을 찾아온 대대장은 “옷을 벗더라도 진실을 밝혀주겠다”며 장례를 빨리 치르자고 재촉했다. 김 하사의 어머니는 “이건 아니다. 진실을 밝힐 때까지는 장례를 치를 수 없다”고 했는데, 대대장의 태도가 바뀌더니 “장례식장을 치우고 냉동고에 봉년이만 두고 가라”고 했다.
또 김 하사 아래에 있는 냉동고를 가리키며 “얘는 몇 년 째 냉동고에 있는데, 얘처럼 진실을 밝히고 싶다면 그냥 두고 가라”고도 했다. 그러자 김 하사의 어머니는 “지금 나한테 협박하는 것이냐”고 따졌고, 대대장은 그때서야 뒤돌아 나갔다.
가족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병원 숙소에서 의논하고 있었는데, 밖에서는 한 군인이 얘기를 엿듣고 있었다. 숙소에는 그 흔한 컴퓨터 한 대 없었다. 외출증을 받아서 경찰서에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더니 군인이라고 도와줄 게 없다고 했다. 이번에는 변호사를 찾아갔더니 고개만 흔들었다. 취재 나온다던 기자들까지 “윗선에서 못 나가게 한다”며 연락이 왔다. 김 하사 가족을 도와줄 수 있는 곳이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일주일이 흘러갔다. 군인들이 계속 찾아와서 장례부터 치르자고 재촉했다. “현충원에 보내주겠다고 더 이상 냉동고에 둘 수 없지 않느냐”며 설득했다. 지안씨는 “저는 이대로 화장하면 다 덮일 것 같아서 조금 더 대치하자고 했는데, 엄마가 ‘동생을 계속 냉동고에 둘 거냐’고 울부짖어서 더는 말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김 하사의 시신은 강원도 동해 화장터를 거쳐 사망 6일 만인 24일 대전현충원에 안장했다.
끝내 밝히지 못한 ‘두개골 골절’ 원인
군의 수사결과는 차일피일 미뤄졌고 성의가 없었다. 담당 수사관은 “최선을 다해 수사하고 있다”며 기다려달라고만 했다. 그리고 3개월이 지나 발표된 수사결과는 실망스러웠다. 혼자 넘어져서 두개골 골절이 됐고, 현충원에 안장했으니 할 만큼 다했다는 식이었다. 가족들은 “혼자 평평한 바닥에 넘어졌는데 상처 하나 없는 게 말이 되느냐”고 따졌더니 ‘믿고 싶으면 믿고, 아니면 말고’하는 식의 답변만 있었다. 아무리 억울하다고 항변해도 듣지 않았다.
부사관들의 진술은 계속 달라졌다. 김 하사가 넘어진 것을 봤다고 했던 하사는 나중에 “넘어진 것을 보지 못했고 대신 ‘쿵’하는 소리를 듣고 뒤돌아 봤더니 넘어져 있었다”고 말을 바꿨다. 2차 회식자리에서도 분위기가 좋았다고 했다가 “봉년이가 대들어서 말싸움이 오고갔다”며 기존의 진술이 번복됐다.
그리고 당시 김 하사의 동선을 파악하거나 상황을 증명해 줄 CCTV 등 증거물은 이런저런 핑계로 공개되지 않았다. 통화기록은 영장이 늦게 나와서 지워졌다고 하고, CCTV는 고장이 나거나 잊어먹어서 지워졌다고 했다. 지안씨는 “내가 충주 빙판길을 돌아다니며 CCTV 위치를 찾아서 알려줬는데도 담당수사관은 가만있다가 나중에 '까먹어서 지워졌다'고 했고, 충주 부대 정문 CCTV도 고장났다고 했다. 통화내역도 '영장발급이 늦어서 다 지워졌다'고 했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그는 또 “눈에 보이는 증거는 다 없어 진술은 번복되어 버렸다. 자살도, 타살도, 질병사라고도 못하고 ‘혼자 넘어졌다’는 것으로 덮어버렸다”고 말했다. 충주 부대의 외부자 숙소에는 숙박록을 쓰게 돼 있었다. 그런데 그날 김 하사와 함께 숙박했던 부사관의 이름은 적혀있지 않았다. 가족들은 “봉년이가 정말 그 숙소에서 잠을 잔 것인지도 알 수가 없다”라고 말했다.
“병원으로 빨리 옮겼다면 살릴 수도 있었다.” 이런 의사의 말에 가족들은 지금도 피눈물이 난다. 최소한의 치료도 받지 못하고 아프다는 말 한 마디도 못한 채 죽어갔던 것이다. 김 하사의 사망 당시 상황을 유추해 볼 수 있는 글이 하나가 있다. 정 하사가 김 하사의 싸이월드에 비밀글로 남긴 것이 가족들에 의해 발견됐다. 여기에서 정 하사는 김 하사를 빨리 병원으로 데려가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내용으로 채워졌다.
물론 사인인 ‘두개골 골절’에 관한 것은 없지만, 누구도 김 하사를 병원에 데려갈 생각을 못 했던 것이다. 지금은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들은 입을 닫아 버렸다. 지안씨는 “술에 취했다는 이유로 모든 잘못을 개인의 탓으로 돌리는 게 너무 억울하다. 아직도 군에서는 병원에 제때 데려가지 않아 죽는 장병들이 있다. 군의 의료체계 폐쇄성을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독자를 잃은 뒤 김 하사의 부모는 강릉에서 대전으로 이사했다. 아들 곁에 조금이라도 있고 싶은 부모의 마음이다. 하지만 너무 억울하다. 지안씨는 “엄마가 ‘힘도 없고 빽도 없고 무능한 부모만나서 고생만 하다 갔는데 진실도 못 밝혀줬다’며 통곡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진다”고 말했다.
김 하사의 어머니는 아들을 잃고 망막박리, 위암, 우울증, 허리디스크 등 여러 질병에 시달리고 있다. “아들 묘 닦아주는 것 밖에 할 수 없다”고 한탄하는 김 하사 어머니. 가족들은 이렇게 묻는다. “봉년이가 왜 죽었는지 그 이유만이라도 명확하게 밝혀달라는 게 욕심이고 불가능한 일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