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수리스크 라즈돌리노예 마을.

푸른 빛이 아스라하게 보이는 야트막한 야산. 사람의 손길이 가지 않은 하늘과 맞닿은 초록의 평원, 감자 꽃이 하얗게 핀 텃밭. 어디서 들려오는 닭 울음소리. 산천의 모습과 기후는 한국의 어느 농촌과 다를 바 없다.

1895년경 한인(韓人) 30가구로 시작된 이 마을은 10년 후인 1906년경에는 62가구 300명으로 늘어났고, 1921년에는 2286명의 한인이 살고 있다는 조선총독부 자료가 있다. 1919년 3월21일 한인 300여 명이 집회를 갖고 일본군 습격을 도모하던 중 러시아 민병의 방해로 해산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라즈돌리노예 마을은 일제 강점기 시절 독립운동의 중심이었고, 역사를 한참 더 거슬러 올라가면 발해의 유적지이기도 한 곳이다.

6월 24일 기행 1일차 : 우수리스크의 '고려인 문화센터', '최재형 고택'을 거쳐 라즈돌리노예 강가로 접어들면서 헤이그 밀사로 잘 알려진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遺墟碑)부터 찾았다. '이런데 무엇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인적이 끊어진 산길을 구불구불 한참이나 달렸다. 비가 오려는지 날씨는 후덥지근하고 극성스러운 모기는 옷을 뚫고 들어온다. 강물 냄새가 희미하게 나더니 뜬금없는 대리석 탑 하나가 외로운 모습을 드러낸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뒤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이상설 선생의 유언이 불현듯 떠올라 울컥한 기분에 가슴이 먹먹해 지는데 누군가는 속이 상한지 멀미까지 한다.

가신지 백년! 아직도 완전한 광복을 이룩하지 못한 그 죄스러움에, 추모제를 지내는 한 시간 내내 모기에 대한 짜증이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6월25일 기행 2일차 : 포시에트, 크라스키노, 하싼 등 한인 밀집지역과의 지리적 인접성과 군사전략적 요충지라는 특성으로 강제이주가 가장 먼저 시작된 라즈돌리노예역(驛). 급한 마음에 새벽부터 찾았다.

1937년 9월9일, 이불과 옷, 가재도구 몇 개만 달랑 챙긴 채 영문도 모르고 소련 군인들의 트럭에 실려 온 250가구 한인들이 55칸의 가축용 화물 열차에 짐짝처럼 실렸다. 여기저기서 아비규환의 비명소리가 터져 나온다. 스탈린은 일본 간첩의 침투를 막는다는 명분으로 연해주를 비롯하여 아무르주, 하바로프스크주, 남부 시베리아 등에 살고 있던 한인 20여 만 명을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등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키는 만행을 저지르는데, 이 과정에서 숱한 독립군들이 이슬처럼 사라졌다.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의 전설 ‘홍범도’ 장군은 카자흐스탄으로 이주되어 극장 수위로 생을 마감하고, 자유시 참변 당시 동포 독립군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었던 이르쿠츠크 공산당 오하묵도 이때 토사구팽 되었다. 통곡의 역, 절망의 역, 이산(離散)의 역(驛) 라즈돌리노예驛에서 간단한 묵념으로 이들의 80년 恨을 달래고 우리는 다시 속칭 ‘88여단’ 남야영으로 향했다.


라즈돌리노예역에서 차로 채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에 북한 인민군의 모체가 되었다는 '소련 원동방면군 제88 보병여단' 남야영 (南野營) 건물이 있다.

김일성이 주도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보천보 전투이후 만주에서 일본군의 항일세력 토벌작전이 심화되자 동북항일연군(東北抗日聯軍) 들은 국경을 넘어 러시아 연해주로 도피하게 된다. 이들은 두 곳으로 분산 수용되는데, 하바로프스크 동북쪽 아무르 강변의 A캠프로 불리는 북야영(北野營)과 라즈돌리노예 마을 88번지의 B캠프로 불리는 남야영 (붉은 벽돌의 2층 건물)이 바로 이곳이다.

김일성은 남야영으로 왔는데, 88여단의 명칭이 여기 남야영의 주소인 라즈돌리노예 88번지에서 따 왔다는 설(說)이 있으며, 김정일이 여기서 출생했다는 설도 있다. 한국 관광객들이 가끔 들리기도 하는데 안내자나 관광객 모두 방문사실이 알려지는 걸 꺼려한다고 한다.


※ 외부 필자의 칼럼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안보통일연구회 연구위원 장석광

- 연세대학교 국가관리연구원 연구원

-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연구위원

- 21세기전략연구원 수석연구위원

- 안보통일연구회 연구기획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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