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여중생 살인사건

[정락인 사건전문기자] 필리핀 국적의 빌리 가스 준 패럴(31)은 지난 2001년 관광비자로 한국에 입국했다.

그는 제때 출국하지 않아 불법체류자 신분이 됐다. 처음부터 입국 목적이 관광이 아니라 ‘취업’이었기 때문에 의도적인 출국 기피자였다. 준 패럴은 친형이 살고 있던 경기도 양주의 한 섬유공장에 취업했다. 이 일대에는 필리핀, 방글라데시, 태국 등 외국인 노동자들이 집단 거주하고 있었다.

지난 2008년 3월 7일 아침 야간 근무를 마친 준 패럴은 친구들과 함께 동두천 인근 클럽에서 술을 마셨다. 평소 같았으면 이날 저녁 공장에 가서 야근을 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공장 대신 3km쯤 떨어진 양주시 회암동의 한 주택가로 걸음을 옮겼다.


성폭행 하려다 잔인하게 살해

이곳에는 필리핀 친구의 기숙사가 있었다. 컨테이너 3개를 나란히 이어 붙인 공동주택으로 첫 번째 컨테이너에는 한국인 변 아무개 씨(여)가 1남1녀의 자녀와 함께 살았고, 나머지는 섬유공장에서 일하는 필리핀 노동자들의 기숙사로 사용됐다.

이날 저녁 공동주택에는 중학교 1학년인 강수현 양(14) 혼자 있었다. 동네에서 작은 호프집을 운영하는 어머니는 일하러 나갔고, 두 살 위의 오빠는 외출하고 없었다. 섬유공장 기숙사로 쓰고 있는 컨테이너도 비어있었다. 수현이는 만화책을 보며 엄마와 오빠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후 7시가 조금 넘자 밖에서 개 짖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누군가 대문 앞에서 공동주택 안을 두리 번 거리며 살피고 있었다. 개들은 낯선 인기척을 알고 짖어댔다. 잠시 후 수현이가 마당에 나가 개들을 조용히 시켰다.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준 패럴은 수현이가 혼자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20여m 떨어진 친형 집으로 향했고, 부엌에 있던 식칼을 찾아 다시 수현이네 집으로 갔다.

준 패럴은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철제 대문을 두드렸다. 수현이가 마당으로 걸어 나가 “누구세요?”하며 문을 살짝 열었다. 준 패럴이 술 냄새를 풍기며 서 있었다. 이전에도 몇 번 찾아온 적이 있었기에 낯설지는 않았다. 그는 다짜고짜 수현이의 목을 잡고 흉기로 위협했다. 그리고는 밖으로 끌고 나갔다. 집에서 30m 떨어진 밭으로 가 수현이의 바지를 벗겼다. 그가 성폭행하려고 흉기를 바닥에 내려놓는 순간 힘껏 뿌리치고 도망쳤다.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를 절박하게 외치며 달아났으나 몇 발자국 가지 못하고 붙잡히고 말았다. 이미 이성을 잃은 준 패럴은 악마나 다름없었다. 그는 수현이의 머리채를 붙잡고 흉기로 등을 찔렀다. 수현이는 피를 흘리면서도 “살려 달라”며 집 쪽으로 내달렸다.

거의 집에 다달았을 때 뒤쫓아온 준 패럴이 수현이의 목덜미를 잡았다. 그리고는 사정없이 흉기를 휘둘렀다. 수현이가 신음하며 쓰러지자 다시 일으켜 세워 수차례 더 찔렀다. 목, 배, 가슴 등 무려 13군데나 칼에 찔렸다.

수현이는 피를 흘리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준 패럴은 쓰러진 수현이를 발로 마구 짓밟은 뒤 유유히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그가 찾아간 곳은 근처에 있던 친형집이었다. 피 묻은 손을 씻고 피로 얼룩진 옷을 벗고 형 옷으로 갈아입었다. 택시를 불러 인근 하천으로 가서 범행에 사용한 흉기를 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회사 기숙사로 향했다.

수현이의 시신은 사건발생 약 3시간 후 동네 초등학생들에 의해 발견됐다. 골목에 사람이 쓰러져 있는 것을 목격하고는 무서워서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다가 동네 주민을 만났다. 주민이 후레쉬로 쓰러져 있는 사람의 얼굴에 비췄더니 수현이었다.

범행 후 뻔뻔한 태도로 일관

신고를 받은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현장 인근의 폐쇄회로(CC)TV를 확보해보니 한 외국인이 배회하며 공동주택을 두리 번 거리는 모습이 포착됐다. 경찰은 외국인 노동자가 범인일 것으로 보고 현장 주변을 탐문하기 시작했고, 준 패럴의 형 집에서 결정적 단서를 확보했다. 친형의 신발에 몇 방울의 피가 묻어 있었던 것이다.

범행 직후 흔적을 지우려고 왔다가 남긴 것이었다. 그의 친형도 “동생이 와서 옷을 갈아입고 손을 씻고 간 것 같다. 주방에 있던 칼도 하나 없어졌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준 패럴을 살인용의자로 특정하고 긴급 체포했다. 사건 발생 3일만이었다.

준 패럴의 손에는 수현이가 저항하면서 생긴 긁힌 상처가 있었다. 그는 경찰의 추궁에도 불구하고 혐의를 완강히 부인하며 오히려 큰 소리를 쳤다. 한국에 거주한 지 7년째가 되는데도 “한국말 몰라요”라며 “통역 없이는 한 마디도 않겠다”고 버텼다. 경찰은 그에게 DNA 감식결과, 혈흔, 수집한 증거물을 들이대며 추궁했다. 준 패럴은 그때서야 살인을 시인했다.

하지만 ‘우발적 범행’임을 강조했고, 모든 것을 수현이의 탓으로 돌렸다. “형 집으로 가던 중 처음 보는 여자아이의 어깨를 잡자 욕을 해 홧김에 살해했다”며 거짓으로 진술했다. 경찰은 준 패럴의 기숙사에서 피 묻은 옷과 신발을, 하천에서 범행에 사용된 흉기를 찾아냈다.

검찰은 준 패럴을 살인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했다. 2008년 4월 20일 법원은 그에게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나이 어린 피해자를 성폭행하려다 실패해 흉기로 찔러 살해한 행위는 그 대가와 사회에서의 격리가 필요하다고 판단, 무기징역을 선고 한다”고 밝혔다. 준 패럴은 끝까지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뻔뻔한 태도로 일관했다.


한 지역 언론사의 집념어린 취재

이 사건은 불법체류자에 의해 10대 소녀가 잔혹하게 피살된 사건인데도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당시 크고 작은 사건이 연이어 터지면서 중앙 언론의 관심에서 멀어졌던 것이다.

당시 프로야구 선수출신 이호성이 네 모녀를 연쇄 살인한 사건으로 온 나라가 떠들썩했다. 이 씨의 시신은 3월11일 한강에서 발견됐다. 안양 초등생 혜진·예슬양을 살해한 정성현이 3월16일에 검거되면서 ‘강수현양 살인사건’은 공론화되지 못했다.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것은 한 지방 언론사의 보도와 네티즌들의 관심 때문이었다. 경기지역 언론사인 ‘경기북부일보’는 이 사건을 지속적으로 보도하면서 사건의 실체를 자세하게 알렸다. 네티즌들은 포털사이트에 ‘불법체류자추방운동본부’를 개설하고, 불법체류자 범죄에 대한 사회적 환기를 시키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부모의 이혼으로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수현이는 항상 웃음을 잃지 않았을 정도로 명랑했고, 착한 효녀였다. 갓 중학교에 입학한 14살 소녀는 한 불법체류자의 탐욕에 짧은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pressfree7@hanmail.net

내외뉴스통신, NBNNEWS

기사 URL : http://www.nb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8540

저작권자 © 내외뉴스통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