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님, 공주님, 귀공자, 귀부인… 시대를 초월해 서민 대중에겐 동경의 대상입니다. 동시에 질시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때때로 부정적 시각을 가졌던 사람조차 감동시키는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하지요. 유리구두의 착한 주인을 찾아내 왕자비로 맞아들이는 <신데렐라>(샤를 페로 작)의 왕자님, 제비의 도움을 받아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에게 몸에 치장한 모든 보석을 나눠주고 누더기 동상으로 남는 <행복한 왕자>(오스카 와일드 작)님이 그런 예입니다. 그러나 이런 미담은 대체로 동화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영지 내 백성들의 세금을 깎아주기 위해 짓궂은 남편의 요구대로 벌거벗은 채 말을 타고 코번트리 거리를 누볐다는 레이디 고다이바의 알몸 행진도 전설 같은 이야기입니다.

최근 재벌가 3세인 이부진(44) 호텔신라 사장의 미담이 언론에서, 인터넷에서 훈훈한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지난달 25일 서울 장충동 호텔신라의 회전문을 들이받아 5억 원 상당의 큰 피해를 낸 모범택시 기사에게 배상을 요구하지 않고, 도리어 치료비를 전하며 위로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별다른 의도가 없는 선행에 대해서도 곧잘 ‘안티’ 반응을 일으키곤 하는 세태를 생각하면 다소 의외의 현상입니다. 재벌기업에 대해 냉소적인 사회정서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사고를 낸 기사가 팔십 고령인 데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부인을 돌보는 어려운 처지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이 사장의 선행은 더욱 감동을 자아낸 듯합니다. 거기에 재벌가의 일반적인 행태와는 달리 가족들을 일일이 설득해 함께 봉사활동에 참여했던 평사원을 배필로 맞았었다는 러브스토리까지 가미되어 한 세트의 잘 짜인 동화처럼 회자되고 있습니다.

호텔신라는 3년 전 뷔페 레스토랑 규칙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복 차림의 유명 디자이너의 입장을 거절한 적이 있습니다. 한복 자락에 음식이 묻거나 다른 손님과 엉켜 사고 날 위험이 크다는 것이었지만 여론의 호된 질타를 받았습니다. 이 사장은 그날로 당사자를 찾아가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습니다. 이번 미담이 홍보 효과만을 노린 일과성 선행만은 아닐 것이라는 믿음이 가는 사례입니다.

“16. 성경에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을 약대(낙타 駱駝)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에 비유했는데, 부자는 악인이란 말인가?”

이부진 사장의 미담이 문득 27년 전 그의 할아버지가 남겼다는 질문을 떠올리게 합니다. 오늘날 세계적인 대기업으로 성장한 삼성그룹의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은 1987년 타계하기 직전 24가지의 질문을 정리해 그 답을 구했습니다. 언급한 16번째 질문의 성경 구절은 마태복음 19장에 있습니다. 예수가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내가 진실로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큰 부(富)를 이루는 데는 남보다 지극한 정성 못지않게 치열한 경쟁심, 때로는 남을 울리는 비정함도 없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부자에게서 선(善)을 기대하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정말 선하게 이룬 부, 선하게 쓰이는 부가 아니라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일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려워야 마땅합니다.

모두가 부러워할 만큼 부를 성취한 이병철 회장은 평생 살아오며 품게 된 여러 의문들에 대해 눈을 감기 전 꼭 답을 듣고 싶어 했습니다. 신(神)의 존재, 창조의 증거, 과학의 발달과 창조론의 충돌, 인간의 고통과 불행의 이유, 내세(來世)의 실재(實在) 등등. 인간의 영혼은 무엇인지, 종교는 무엇인지, 종교를 통하지 않고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지… 특히 성경조차도 부자를 부정한 이유가 무엇인지… 이 세상에서 뜻한 바를 모두 이루었다 해도 저 세상(만약 있다면) 문턱에서 꼭 알고 싶은 인간의 근본적이고도 절박한 질문들입니다.

이 회장은 손수 정리한 질문지를 천주교 절두산성당의 고 박희봉 신부에게 전했습니다. 박 신부는 고심 끝에 이를 가톨릭의 대표적인 석학 정의채 몬시뇰(가톨릭 고위 성직자)에게 건넸습니다. 마침내 두 사람의 만남이 약속되었으나 이 회장의 급속한 건강 악화로 만남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이 회장은 그해 11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박 신부도 이듬해 8월 선종했습니다. 묻혀 있던 이 회장의 질문지는 몇 해 전 차동엽(인천가톨릭대 교수) 신부에게 그 사본이 전해지고, 차 신부가 자신이 구한 답과 함께 <내 가슴을 다시 뛰게 할 잊혀진 질문>이라는 책으로 펴냄으로써 세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차 신부는 답을 구하기 위해 숱한 자료들을 뒤지고 또 많은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내놓은 16번의 답은 ‘나눔’이었습니다. 그는 “질문의 성경 구절은 나눔을 강조한 메시지”라고 말합니다. ‘부(富)는 악(惡)이 아니다. 선(善)을 행할 기회다. 나쁜 것은 그 기회를 의도적으로 외면하거나 거부하는 것이다.’ ‘부자는 선인도 악인도 아니다. 선에 속할 것이냐, 악에 속할 것이냐는 그의 선택에 달렸다.’ 라는 게 그가 풀어낸 답입니다. 실제 성경에 쓰인 ‘부자와 낙타’의 비유도 예수가 영생의 비결을 묻는 젊은이에게 “네가 가진 것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라”는 가르침에 뒤따라 나온 것입니다.

차 신부는 스스로 “답은 완전하지 않다. 원하는 답의 실마리만 되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부진 사장이 바로 그 실마리를 잡은 것일까요. 이번 선행은 할아버지가 던진 질문, 차 신부가 구한 답에 호응한 손녀의 실천이 아닐지. 30년 가까운 세월의 문답에서 세대를 뛰어넘은 묘한 호흡을 느끼게 됩니다. 이웃을 모르는 비정한 사회, 탐욕이 지배하는 사회라는 탄식이 높습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엔 여전히 온기가 돌고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인터넷 누리꾼들의 바람처럼 삼성가(三星家) 조손(祖孫)의 문답과 실천이 ‘나눔으로 따뜻한 세상 만들기’에 기폭제가 되어 준다면 얼마나 멋진 일이겠습니까.

방석순

스포츠서울 편집국 체육부장, 부국장, 경영기획실장과 2002월드컵조직위원회 홍보실장을 역임했다. 여러 차례의 올림픽과 월드컵축구 등 세계적인 스포츠대회의 현장을 취재했고, 국제스포츠이벤트의 조직과 운영에도 참여하며 스포츠경기는 물론 스포츠마케팅과 미디어의 관계, 체육과 청소년 문제 등에 깊은 관심을 두고 이와 관련된 글들을 집필해 왔다.

[자유칼럼그룹 방석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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