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중학생 자살사건

[정락인 사건전문기자] 지난 2011년 12월 20일 대구 수성구의 ㅊ아파트에서 ㄷ중학교 2학년 권승민 군(당시 14세)이 투신해 사망했다. 권 군의 시신은 오전 9시쯤 순찰하던 경비원이 화단에서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권 군이 남긴 유서에는 친구들의 실명을 거론하며 상습적으로 괴롭힘을 당해 괴로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기자는 사건발생 7개월 후 권 군 집에서 어머니 임지영 씨(54)를 만나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임 씨는 승민이를 이름 맨 끝자를 따서 ‘민’이라 불렀다. 그녀는 당시 경북 영천에 있는 금호중학교 교사로 재직중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길었던 하루

승민이가 베란다에서 뛰어내린 날은 임 씨의 학교에서 학업성취도 평가가 있었다. 그녀는 다른 날보다 일찍 출근해서 시험 준비에 열중했다. 오전 8시 30분쯤 승민이 담임인 김 아무개 교사(당시 34세)에게 휴대전화 문자가 왔고 전화 통화를 했다.

담임교사는 “승민이가 학교에 나오지 않았는데, 혹시 알고 있느냐”고 물었다. 임 씨는 “아침에 친구하고 학교에 간다고 했다. 내가 집에 가보겠다”고 말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승민이가 ‘그냥 자고 있는 것은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이날 아침 승민이가 시무룩해 보였지만 크게 이상한 점은 못 느꼈다. 출근할 때도 평상시처럼 “안녕히 다녀오세요”라고 인사했다.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담임교사와 전화를 끊고 집에 전화했는데, 받지 않았다. 이번에는 승민이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평상시 남편과 아이들의 전화번호를 단축키로 저장해놓은 상태였다. 승민이는 ‘4번’이었는데, ‘없는 번호’라고 나왔다.

임 씨는 ‘왜 이러지’라며 황당하게 생각했다. 갑자기 승민이 전화번호가 떠오르지 않아 남편에게 전화해서 물어봤다. 그리고 전화했는데 역시 받지 않았다. 승민이에게 연락을 시도하고 있을 때 남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는데, 승민이가 사고가 났다”는 것이다.

임 씨는 부리나케 승용차를 몰아 집으로 향했다. 뭐가 어떻게 된 것인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영천에서 대구의 집까지는 약 40분쯤 걸린다. 아파트에 거의 다다랐을 때쯤 신매동파출소에서 전화가 왔다.

임 씨는 “그때 경찰관이 ‘사고가 났다’고 해서 처음에는 교통사고인 줄 알았다. 우리 아파트 근처 큰길에서 가끔 사고가 났다. 그런데 파출소에서는 ‘교통사고가 아니다’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라고 말했다.

임 씨는 아파트에 도착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를 몰랐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경찰에 전화해서 “집으로 올라갈까요?” 하니까, “1층으로 오라”고 했다. 1층에 가보니 아파트 경비가 나와 있었고, 경찰차도 있었다.

경찰관이 ‘시체를 확인해달라’며 하얀 천으로 덮인 곳을 가리켰다. 임 씨는 하얀 천이 있는 곳으로 가서 천을 걷었다. 그랬더니 거기에 승민이가 누워 있었다. 외상도 없고 얼굴 오른쪽 이마에 약간의 멍이 생긴 것 외에는 겉보기에 깨끗했다.

승민이의 상체를 들어 안았다. 순간 따뜻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는 “무슨 일이냐, 아직도 이렇게 따뜻한데. 어서 119를 부르라”라며 소리쳤다. 그때 승민이 코에서 검붉은 피가 쏟아졌다.

임 씨는 “손을 만졌더니 차가웠다. 내 옷 속에 민이의 손을 집어넣고 계속 비볐다. 아직 이렇게 따뜻한데…”라며 말을 잊지 못했다. 곧이어 상황을 깨달은 임 씨가 그 자리에서 울부짖었다. 하늘이 떠나갈 듯 울고 또 울었다. ‘이건 아니다’라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꿈만 같았다. 그녀는 “지금도 내가 꿈을 꾸는 것 같이 착각한다”고 말했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안고 있으니 경찰관이 다가왔다. “진정하라. 아마 위에서 뛰어내린 것 같다”라고 했다. 임 씨가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아파트 베란다 창문이 반쯤 열려 있었다. 승민이의 시신은 집에서 가까운 천주성삼병원으로 옮겨졌다.

거실과 부엌 사이에서 유서 발견

임 씨는 경찰과 함께 집으로 올라갔다. 원래 깨끗하게 정리돼 있기는 하지만 그날따라 흐트러진 곳이 없었다. 탁자와 쇼파 위도 가지런했다. 승민이가 해놓았다는 것을 직감했다. 승민이 방에 들어가 보니 책가방이 있었다. 책상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대신 반듯하고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승민이의 유서는 거실과 부엌 사이의 다리미대 위에 놓여 있었다. 이곳은 임씨가 퇴근하면 핸드백을 놓는 자리였다. 승민이는 엄마가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에 유서를 남겼던 것이다. 유서는 A4용지 넉 장 분량이었다. 임 씨는 “처음에는 유서에 있는 글씨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맨 뒷면의 ‘엄마, 아빠 사랑해요!!!’밖에 보지 못했다. 그냥 부들부들 떨리기만 했다”고 기억했다.

승민이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시체 검안 과정에서 확연하게 드러났다. 검안에는 임 씨와 승민이의 학교 담임교사·부장교사·교감 등이 참여했다. 몸에는 이곳저곳에 구타당한 흔적이 있었다. 엉덩이, 허벅지, 목, 손, 발 등 몸 구석구석에 멍이 있었다. 임 씨는 “애를 얼마나 팼는지 멍이 아주 시커멓게 변해 있었다. 언제 생긴 것인지 알 수 없는 멍도 있었다. 멍이 오래돼서 없어져가는 것도 보였다”며 목청을 높였다.

승민이 아버지는 그때까지 아들이 죽었는지 몰랐다. 병원에 도착한 후 주위 사람들에게 “몇 층이냐”라고 물었다. 당시만해도 승민이가 다친 것으로만 생각했다. 그런데 장례식장이 있는 “지하 2층”이라고 하자 주춤거렸다. 그때서야 아들이 죽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장례식장으로 들어오는 계단에 털썩 주저앉아 대성통곡했다.

임 씨는 “남편이 그렇게 우는 것은 처음 봤다. 선생님들이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는데 의자에 앉지도 못하고 반쯤 넋 나간 사람처럼 있었다”고 전했다.

큰아들 승윤이도 동생의 사고를 모른 채 병원에 도착했다. 나중에 내막을 전해 듣고는 기절하듯이 장례식장에 들어섰다. 임 씨 가족은 이날 세상에서 가장 긴 하루를 보냈다. 단란했던 한 가정의 행복은 이렇게 한순간에 무너졌다. 승민이의 시신은 화장한 후 팔공산에 있는 도림사 내 추모공원에 안치했다.


승민이의 책상에 있는 유품을 정리하는 도중에 유서 한 장이 또 나왔다. 여기에는 “죄송해요. 그리고 마지막 부탁인데 저희 집 도어키 번호 좀 바꿔주세요. 몇몇 애들이 알고 있어서 제가 없을 때도 문 열고 들어올지 몰라요. 죄송해요 엄마. 사랑해요. 먼저 가서 100년이든 1000년이든 기다리고 있을게요. 정말 죄송해요”라고 적혀 있었다.

한 순간에 파괴된 가정

가족들은 승민이를 떠나보내지 않았다. 승민이의 유품 중 평소 아끼던 물건과 책은 남겨놓았다. 승민이가 쓰던 방도 그대로 뒀다. 임 씨는 침대 위의 이불을 가리키며 “승민이는 노란색을 참 좋아했다”고 말했다. 진한 가을 은행잎 같은 노란색 이불이 침대를 덮고 있었다. 책꽂이에는 승민이가 즐겨보던 책들이 빼곡하게 꽂혀 있었다. 사전, 소설, 문화재도감, 역사 관련 서적 등도 눈에 띄었다.

그렇다고 생전의 그대로는 아니다. 책상 위에는 승민이의 영정이 놓여 있다. 그 주변은 십자가와 성모마리아상, 묵주가 감싸고 있었다. 승민이가 생각날 때마다 임 씨는 책상에 앉아 아들의 명복을 빌며 기도를 한다고 했다.

그녀는 “우리 가족은 민이를 일부러 지우려고 하지 않는다. 지운다고 해도 지워지는 것도 아니다. 늘 같이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죽을 때까지 생각할 것이다. 공중에 떠다니는 것도 같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래도 현실은 참담하다. 승민이가 떠난 지 얼마 후 임씨는 베란다에 잠깐 나갔었다. 그때 애들이 하교하는 것을 보았다. 임 씨는 “우리 민이도 오겠다. 그래서 방문까지 주르륵 왔는데, 방문 앞에 우리 민이의 영정이 있었다. ‘이게 현실이 아니구나’ 하며 민이의 영정을 붙잡고 울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길을 지나가다가 승민이 또래의 아이들을 봐도 뒤를 돌아보는 것이 일상화됐다. 잠을 자다가도 불쑥불쑥 깬다. 승민이가 베개를 들고 서 있는 것 같아서다. 평소 승민이는 엄마가 집에 일찍 왔을 때를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교사인 임 씨 학교에 시험이 있는 날이면 “엄마 빨리 오세요”라고 말했다.

승민이가 떠난 후 가족들은 밥을 먹지 못했다. 밥상에 마주 앉으면 말을 잊은 채 울기만 했다. 승민이는 생전에 피자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피자 광고만 나와도 아들이, 동생이 떠올랐다. 특히 MBC '무한도전'을 1회부터 한 번도 빼놓지 않고 다 볼 정도로 광팬이었다. 가족들은 승민이를 생각하며 가끔 '무한도전' 재방송을 본다고 했다. 방송 때마다 옆에서 자세히 설명해주던 승민이는 이제 없다.

임 씨에게 ‘이사 갈 생각은 안 했느냐’고 물었다. “처음에는 이사할 생각도 했다. 주변에서도 ‘빨리 잊으려면 유품을 정리하고 이사를 가라’고 권유했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내가 피해서는 안 된다. 남편한테도 애한테도 안 간다고 했다. 가해자는 멀쩡하게 잘 살고 있는데 왜 우리가 도망가야 하느냐”고 반문했다.

승민이의 어릴 적 꿈은 개그맨이었다. 나중에는 ‘정의의 검사’를 꿈꿨다. 성격도 밝고 쾌활했다. 가족들과 농담도 잘 하고 장난기도 많았다. 그래서 임씨 집에는 항상 ‘하하호호’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승민이가 죽은 후에는 180˚ 달라졌다. 임씨 집에는 말과 웃음이 사라졌다. 왁자지껄하던 집안에는 조용한 절간처럼 ‘침묵’이 흐른다고 했다.

임 씨는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냉정하고 이성적인 편에 든다. 잘 울지도 않는다. 그런데 혼자 있으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가족들이 있으면 억지로 참는다. 가장 힘든 때가 출근할 때, 퇴근할 때, 운전하는 때다. 요즘은 안 울려고 기도하며 산다”며 눈에 힘을 줬다. 그녀는 인터뷰 내내 감정이 북받쳐올 때도 눈물을 참고 또 참았다.

학교 폭력 예방전도사가 된 부모

이렇게 임 씨 가족들은 모두 깊은 마음의 병을 앓고 있었다. 가족 전체가 정신과 치료를 받고 약을 먹어야만 생활할 수 있다고 했다. 임 씨는 “우리 부부는 신경안정제를 먹으며 하루하루를 버틴다. 큰애 승윤이는 정신과 치료가 싫다고 해서 경찰에서 제공하는 ‘케어(care)’ 팀의 도움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단란했던 한 가족이 이렇게 평생 씻을 수 없는 고통을 안게 됐다.

그렇다고 임 씨 가족들이 절망의 늪에만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다시 세상 속에 나오려는 몸부림을 쳤다. 임 씨는 ‘학교 폭력 감시자’가 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녀는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이런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상담해주는 것이다. 학교 폭력을 예방하고 또 가해 학생들도 상담해서 살길을 열어주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임 씨는 또 “학교 폭력은 엄연한 범죄다. 학생이라고 해서 ‘폭력’이 정당화될 수도 없고 용서받을 수도 없다. 가해자는 반드시 처벌받아야 한다. 그리고 피해 학생들도 절대 ‘자살’을 선택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자살은 해결책이 아니다. 남은 가족들은 죽을 때까지 고통스럽다”고 강조했다.

사건 이후 당시 고등학교 교사이던 권 군의 아버지는 명퇴하고 교육방송(EBS)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등 학교 폭력 방지에 노력해 왔다. 어머니 임 씨 또한 각종 학교폭력 예방 프로그램에 적극 참여하며 학교폭력 예방 전도사가 됐다.


반성없는 가해자들, 뻔뻔한 부모들

가해자인 우 아무개 군(15)과 서 아무개 군(15)의 폭행과 고문, 갈취는 언론을 통해 적나라하게 공개됐다. 어린 학생들이 했다고는 믿지 못할 정도로 잔인했다. 전 국민의 공분을 산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들은 권 군에게 자신의 게임 캐릭터 레벨(등급)을 올리라며 폭행하기 시작했다. 폭행은 주로 권 군의 집에서 어머니가 퇴근하기 전에 했다. 권 군이 게임하는 속도가 느리면 발로 차거나 주먹으로 때렸고, 부모에게 용돈을 타 내 게임에 필요한 아이템을 구입하라고 강요했다.

김 군의 형이 쓰던 목검과 이종격투기용 글러브를 끼고 무차별 폭행했다. 물고문을 하겠다고 위협하고, 녹음기 코드를 뽑아 목에 묶은 뒤 바닥에 떨어진 과자부스러기를 개처럼 핥아 먹으라고 강요했다. 문구용 칼로 권 군의 손목을 긋는 시늉을 하기도 했다.

김 군에게 유명 브랜드 패딩점퍼를 사 오라고 요구했다. 권군의 돈을 빼앗아가려고 통장에서 돈을 강제로 인출했으며, 담배 피우기를 강요하고 자신들의 숙제를 대신 시키기도 했다.

이들의 행동은 대담했다. 권 군이 죽은 날에도 몰래 문을 열고 임 씨 집을 다녀갔다. 승민이가 병원에 있다고 하니까 진짜인지 확인하려고 들어왔던 것이다.

이런 모습은 아파트 CCTV에 고스란히 찍혔다. 권 군의 장례를 치르고 있던 때에도 아파트를 찾아와서 ‘자살’했는지를 묻고 갔다. 죽은 사실을 안 후에는 ‘(이 정도가) 폭력이냐, 감방에 안 간다 ㅋㅋㅋ’라는 문자를 주고받기도 했다. 가해 학생이나 부모들은 권 군의 장례식장에 찾아오지 않았다.

가해 학생의 부모들의 태도는 유족들을 더욱 분노하게 했다. 가해 학생들의 부모는 권 군이 죽은 후 끊임없이 찾아오거나 연락을 해왔다. 길거리에서 마주치면 “같이 식사나 하면서 합의 이야기를 하자”고도 했다. 그렇게 찾아오던 부모들도 1심에서 형이 선고되자 발걸음을 뚝 끊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항소했다.

우 군의 부모는 항소한 이후에 다시 태도가 돌변했다. 불시에 집으로 찾아오거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보냈고, “내 아들이 불쌍하니 탄원서를 써달라”며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심지어 교회에 다닌다고 하면서도 승민이의 유골이 안치된 추모관에 ‘발원문’을 써서 붙이기도 했다. 유족들은 이런 행태를 ‘형량을 감소시키기 위한 꼼수’로 봤다.

가해 학생들의 부모는 2심 선고 공판이 끝난 후에는 더는 연락을 해오지 않았다. 이들 부모들은 2심 선고에 불복했고, 대법원에 상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2012년 6월 28일 서군에게 징역 장기 3년에 단기 2년6월, 우군에게는 장기 2년 6월에 단기 2년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현재는 가해자들 모두 출소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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