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역배우 집단 성폭행 자살사건

[정락인 사건전문기자] 지난 2004년 7월, 방송국에서 백댄서로 활동하던 동생 B씨(당시 25세)는 방학을 맞아 쉬고 있는 대학원생 언니 A씨(당시 29세)에게 ‘단역배우(엑스트라) 아르바이트’를 소개했다.

IQ157을 자랑하며 1등을 놓치지 않는 우등생이었던 A씨는 집안의 자랑이었다. A씨는 동생의 제안을 받아들여 서울과 지방을 오가며 단역배우로 드라마에 출연했다.

그런데 언니 A씨가 점점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평소 차분하고 조용했던 그녀가 4개월 만에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출장에서 돌아올 때마다 이유 없이 벽을 때리면서 공격적으로 변했고, 거실을 서성거리며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사람들 이름을 말하며 “죽여야 돼”라고 말하는가 하면 집 전체를 부수기도 했다.

공격적으로 변해버린 언니

이를 말리던 엄마와 동생에게는 평소 입에 담지 않던 욕을 하고 심지어 때리는 일도 있었다. 결국 경찰까지 불러 딸을 정신병원에 딸을 데리고 간 엄마. 정신과 상담 중 딸의 입에서 충격적인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10명이 넘는 보조출연 관리업체 단역배우 반장 등에게 4개월 동안 성폭력을 당했다는 것이다. ‘단역배우 반장’은 드라마에 출연하는 단역배우들을 관리하는 직책이다.

A씨에 따르면 단역배우로 활동한 지 약 한 달쯤 후인 8월부터 보조반장 이아무개씨로부터 성추행과 성폭행을 당했다. 이씨는 자신의 범죄에서 끝내지 않고 10월부터는 다른 반장들에게도 이런 사실을 알렸다. 이씨가 A씨를 다른 반장들에게 넘긴 것이다. 이렇게 해서 A씨는 촬영지 모텔 등에서 현장 반장, 부장, 캐스팅 담당자 등으로부터 성폭행이나 강제추행을 당했다.

A씨의 경찰 진술과 병원 의무기록사본에 따르면 보조출연자 담당 양아무개씨는 A씨를 발로 차고 머리채를 쥐어잡으며 “이OO한테 했던 것처럼 나한테도 해보라”면서 변태적인 성행위까지 시켰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다른 이들에 의해 추행과 강간이 이어졌으며, 가해자는 12명이나 됐다.

이들은 A씨에게 “어디 가서 말하면 네 동생과 엄마를 죽이겠다”고 협박했다. “동생을 팔아 넘기겠다”며 겁을 주기도 했다. A씨는 반장들에게 성폭력을 당하면서 혹시 동생이나 엄마에게 해코지 하지 않을까 해서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가해자들은 이런 A씨를 협박해 재차 성폭행 하거나 성추행하면서 ‘노리개’ 취급을 했다.

뒤늦게 이런 사실을 듣게 된 어머니 장아무개씨(65)는 딸을 설득해 2004년 12월 ‘성폭행’과 ‘강제추행’ 등의 혐의로 기획사 관계자 12명을 경찰에 고소했다. A씨는 경찰에서 기획사 반장 이씨 등 4명이 돌아가며 성폭행하고, 나머지 8명은 강제추행했다고 진술했다.

A씨와 어머니는 경찰이 제대로 수사해서 가해자들이 법적 처벌을 받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A씨는 2차 피해에 시달리며 상황이 더 악화됐다.

고소 후 2차 피해 시달리다 취하

경찰 조사과정에서 A씨는 피해자로서 전혀 보호받지 못했다. 성폭력 특성상 조사 시에는 가해자와 피해자는 분리하는 게 원칙이다. 하지만 경찰은 A씨가 조사받을 때 건너 책상에 가해자들을 불러놓고 조사를 했는데, A씨가 하는 말이 모두 들릴 정도였다.

“네 가족을 죽이겠다”고 협박하며 성폭력을 저질렀던 가해자들이라 심리적인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A씨 자리에서도 가해자들이 조사받으면서 하는 말이 모두 들렸다. 그들은 ‘합의된 성관계’라고 주장했고, 특정 성행위를 묘사하기도 했다.

가해자들에게 ‘고소 취하’ 협박도 당했다. 한 번은 가해 반장이 A씨에게 전화해 “엄마와 여동생을 죽이겠다”며 고소 취하를 종용했다고 한다. 해당 반장은 실제 A씨 어머니를 폭행했고, 고소했지만 검찰에서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

결국 고소 이후 협박과 제2의 피해에 시달리던 A씨는 고소를 취하하기에 이른다. A씨의 의무기록서를 보면 “7월25일 고소 취하해서 종결처리 됐다”고 나와 있다.

A씨는 고소 취하이유에 대해 “진실을 밝히기가 힘들고, 다시 그 사건들을 기억하는 게 참을 수 없다”고 말했다. A씨가 고소 취하의사를 밝히자 아버지도 말렸으나, 결국 딸을 경찰서에 데리고 가서 취하하는데 동의했다. 검찰은 ‘공소권 없음’을 이유로 불기소처분을 내렸다.

그 후 5년 동안 A씨는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회복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당시 당했던 일을 잊을 수가 없었다. 결국 A씨는 죽음을 선택했다. 2009년 8월28일 오후 8시18분 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의 18층 빌딩 옥상에서 몸을 던졌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18'이란 숫자다. A씨는 이날 낮에 자신이 뛰어내릴 빌딩을 사전 답사까지 하며 시간까지 정확히 맞췄다. 마지막까지 세상을 향해 '18'이란 분노를 표출하고 갔던 것이다. A씨가 남긴 유서 형식의 메모에는 ‘난 그들의 노리개였던 것이다’ ‘날 단단히 건드렸어. 제대로’ ‘더 이상 살아 뭐 하겠나’라며 ‘자살만이 살 길이다. 더 이상 살 이유가 없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언니 자살, 동생도 자살, 아버지 뇌출혈 사망

비극은 이어졌다. 언니가 세상을 떠난 지 6일 만인 9월3일 동생 B씨도 같은 방식으로 목숨을 끊었다. 경기도 안양의 한 건물에서 뛰어내려 화단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언니를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든 장본인이란 죄책감 때문이었다. B씨는 유서에 “엄마는 복수하고 오라”고 당부했다.

두 달 뒤, 한꺼번에 두 딸을 잃은 아버지가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이제 이 집안에는 어머니만 홀로 남았다. 한 순간에 두 딸과 남편까지 줄초상을 치러야 했던 비극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두 달 사이에 큰 딸, 작은 딸, 남편까지 빈소를 차렸던 같은 장소에 다시 차리고, 화장했던 곳에서 다시 화장을 해야 했다. 이후 어머니는 하루하루를 약 없이는 견디기 힘들었다. 한동안 딸을 상대로 성폭력을 저지른 피의자들과 담당 수사관들에 대한 원망으로 살았다.

어머니는 홀로 남아 가해자들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진행했다. 2015년 9월1일 서울중앙지법 민사72단독 재판부는 ‘소송 제기 기간이 지났다’는 이유로 패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증인들의 증언과 당사자 본인 신문결과 등에 따르면 A씨가 강제추행 등의 성폭행을 당했다고 볼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에 대한 근거로 A씨가 생전에 쓴 일기장 등을 검토해 "A씨가 성폭행을 당하지 않았으면서 단순히 피해 과대망상으로 일기 등을 작성했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법원은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이 A씨의 어머니에게 손해를 배상할 책임은 없다고 봤다. 재판부는 “설령 A씨의 주장과 같이 성폭행을 당했더라도 사건의 소는 성폭행을 당했다고 한 때로부터 약 9년6개월, 자살한 때로부터 약 4년6개월이 지나서 제기됐다”며 “민법이 규정하고 있는 3년의 소멸시효가 지나서 제기됐으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판단했다.

여전히 거리 활보하는 가해자들

결국 성폭행을 당했다고 볼 여지가 있는데 가해자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고, 심지어 민사상 책임도 지지 않게 된 것이다.

성폭행 당사자로 지목된 ‘단역배우 반장’들은 지금도 그 자리를 지키며 지내고 있을지 모른다. 이들은 사건 후인 2013년까지도 방송국 수목드라마 반장, 아침드라마 반장, 일일드라마 반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당시 자신들의 혐의에 대해서는 “대질심문 결과 여자와 그의 엄마가 꽃뱀인 걸로 판정됐다”며 무고함을 주장했다.

이 사건은 ‘단역배우 자매 자살사건’ '단역배우 집단 성폭행 자살사건' 등으로 알려지며 전 국민의 분노를 샀다. 짐승 보다 못한 남성들로 인해 평범했던 한 가정이 완전히 파괴됐다. 그런데도 가해자들은 처벌받지 않고 여전히 거리를 활보하고 있으며, 피해자는 자살하고 유일하게 어머니만 살아 하루하루를 죽지 못해 살고 있는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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