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해안초소 K-2 소총 탈취 사건

[정락인 사건전문기자] 1997년 1월3일 밤 10시 50분쯤이었다.
 
경기도 화성군 서신면 궁령리 소재 육군 제51향토보병사단 해안 초소 위병소에 얼룩무늬 전투복에 스노의 파커 차림에 소령 계급장을 단 40대 남성이 나타났다. 전방을 주시하고 있던 초병들은 소총을 겨누며 수하를 건네려고 했다.

바로 그때 남성은 “군단 백 소령이다”며 가짜 신분을 말했다. 초병들은 진짜 상관인 줄 알고  겨누고 있던 총을 바로 하고는 거수경례를 했다.

백 소령을 사칭한 남성은 “오는 도중에 암구호를 잊어버렸다”며 초병들에게 암구호를 물어봤다. 초병들은 순순히 암구호를 알려줬다. 부대 안으로 들어오는데 성공한 남성은 해안철조망을 따라 밤 11시20분쯤 민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소초 후문을 통해 내무실로 들어왔다.

당시 내무실에는 사병 한 명이 경계를 서고 있었고, 소령 계급장을 단 장교가 들어오자 구호를 외치며 경례를 붙였다. 초저녁 근무를 마친 15명의 병사들은 내무실에서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야간근무일지를 작성하던 소초장 남정훈 소위(22‧학군 34기)는 초병의 경례 소리를 듣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남 소위가 거수경례를 하자 남성은 내무실을 둘러보고는 “추운데 수고 많다. 최근 군단에 새로 전입해 온 백 소령인데, 전입 장교 교육의 일환으로 해안순찰을 나왔다”고 말했다.

이를 그대로 믿은 남 소위는 남성에게 인삼차를 대접했다. 또 30여 분간 책임구역 지형과 소초 현황에 관한 브리핑을 했다. 남성은 브리핑 도중 “살구지초소가 우측에 있느냐” “용두리 포구는 어디 있는가”라고 묻고는 “중대행정보급관인 도(都)상사는 잘 있느냐”며 마치 부대 사정을 훤히 아는 것처럼 너스레를 떨었다.

브리핑이 끝나자 남성은 총기보관대를 보며 “저 총이 K2소총이냐”고 묻고 “내가 소대장 할 때는 저 총이 없었다”며 소총을 집어 들고 연신 개머리판을 접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그리고는 본색을 드러냈다. “순찰 좀 하겠다. 이 지역에는 간첩도 나타나고 취약하다는데 총과 실탄을 빌려 달라”고 요구했다.

남 소위가 총기관리대에 있던 부소초장 이영모 중사의 K2 소총과 15발들이 탄창 2개를 건네주면서 “제가 수행하겠습니다”라고 하자 그는 “이쪽 사정엔 빠꼼이야. 수행할 필요 없다. 총과 실탄은 순찰로에서 만나 돌려주겠다”고 말한 뒤 유유히 소초를 빠져나갔다. 이때가 밤 11시50분쯤이었다. 총기와 실탄을 빼앗긴 사건은 이렇게 30분 만에 감쪽같이 벌어졌다.

약 1시간 후인 4일 오전 1시30분쯤 중대장이 소초지역 순시 차 들렀다. 남 소위는 ‘백 소령’이라고 사칭한 남성에 대해 보고했다. “군단에 새로 전입해 온 백 소령이 소총과 실탄을 갖고 순찰을 나갔는데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남 소위의 보고를 수상히 여긴 중대장은 관할 해안초소에 인터폰으로 연락하자 “백 소령은 오지 않았다”는 대답뿐이었다. 순간 남 소위와 중대장의 안색이 시커멓게 변했다.

중대장은 군단에 연락해 백 소령이 실존 인물인지 확인했다. 그런데 뜻밖의 얘기가 들려왔다. 군단에서는 백 소령이라는 사람을 내려 보낸 적이 없다는 것이다. 또 백 소령은 군단이 아닌 특전사령부에 근무하는 현역 장교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중대장은 그때서야 총기와 실탄이 탈취됐다는 것을 알게 됐다. 아차,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이때부터 상황은 숨 가쁘게 돌아갔다.

군 당국도 다급하게 움직였다. 연대본부에서 수도군단까지의 군계통과 화성경찰서 서신파출소→화성경찰서→경기경찰청의 경찰계통으로 상황이 전파됐다. 해당 부대는 사건발생 2시간 20분만인 오전 2시10분쯤 부대 5분대기조를 출동시켜 정체불명의 남성을 찾아 나섰다. 오전 3시쯤에는 비상경계태세인 '진돗개 하나'가 발령했다.

경찰과 합동으로 수원, 화성, 평택, 용인 등 경기 일원과 서울까지 검문검색을 강화하며 키 175cm 정도에 전투복에 백색 스노우 파커 차림의 40대 남성을 쫓았다. 하지만 군‧경의 차단선이 겹겹이 쳐진 것은 범인이 도주한 지 3시간 20분 만이었다. 늑장 출동 속에 범인은 이미 종적을 감춘 후였다.

4일 오후 전방부대 경계근무실태순시가 예정됐던 김동진 국방장관 등 군 수뇌부는 이날 오전 사건발생보고를 받고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할 말이 없다"는 탄식을 터트렸다.

군‧경은 현장의 중대본부에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하고 용의자를 추적했다. 총기탈취범이 사칭한 ‘백 소령’이 특전사에 근무하고 있고 대대본부 ‘도(都) 상사’를 잘 안다고 한 점에 비춰 일단 대공 용의점은 없는 것으로 판단했다.

부대사정을 잘 아는 부사관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했다. 이에 따라 해당 부대를 전역하거나 다른 부대로 옮긴 하사관급 이상의 간부와 부대 출입이 잦은 민간인들을 대상으로 용의자를 좁혀갔다. 남 소위 등 범인을 목격한 장병들을 상대로 범인의 용모를 파악해 ‘몽타주’를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경찰이 용의자로 검거해 이첩한 엄아무개씨(34)를 남 소위와 대질했으나 범인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 또 모 종교집단의 핵심 인물인 조아무씨(39)가 범인이라는 제보가 여러 건 있었지만 확인결과 사실이 아니었다.

군‧경은 범인이 서울 등 다른 지역으로 빠져나갔을 것으로 빠져나갔을 것으로 보고 수사망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군 당국은 범인에게 확인절차 없이 총기를 내준 소초장 남정훈 소위를 구속하고, 지휘 책임을 물어 문책했다. 

이 사건은 군 기강과 사후 대처능력 등 구멍 뚫린 우리 군의 현주소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줬다. ‘신원을 확인하고 총기를 건네준다’는 총기관리 철칙은커녕 기본수칙도 지켜지지 않았다. 한편의 코미디에 나올법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었다.

사건 발생 21년이 지났지만 범인에 대한 윤곽은 물론 탈취당한 총기와 실탄의 행방도 오리무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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