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뉴스통신 칼럼] BC 399년, 소크라테스는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변론을 펼친다.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 <소크라테스의 변명>(숲, 천병희)에 따르면 소크라테스는 멜레토스 외 2인(아뉘토스, 뤼콘)으로부터 ‘젊은이를 타락시키고, 국가가 믿는 신을 믿지 않고 다른 새로운 신을 믿음으로써 불법을 저지르고 있다’는 죄목으로 고발당했다. 이에 앞서 다른 한 부류의 초기 고발자로부터는 ‘소크라테스가 자연현상에 관한 문제를 탐구하고 사론을 정론으로 만든다’고 고발당했다.

소크라테스는 이 두 부류의 고발자들의 고발내용에 대해 적극적으로 항변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친구 카이레폼이 델포이 신전의 여사제 퓌티아에게 ‘소크라테스보다 지혜로운 사람은 없다’는 신탁을 받았으므로 이 수수께기의 진위를 풀려고 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지혜롭다고 알려진 명망가를 찾아다니면서 면담을 했다고. 면담결과 명망가들이 실은 지혜롭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유는 소크라테스 자신은 ‘모른다는 사실을 알지만’ 명망가들은 ‘모르는 것을 안다’고 생각하기에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자신이 더 지혜롭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 후에도 소크라테스는 신탁의 의미를 알고 싶어서 지혜롭다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무지를 일깨워주었는데 이 과정에서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아서 고발됐다고 말한다.

‘무지의 지’를 일깨워주는 것이 신의 명령이라고 생각한 소크라테스는 당시 ‘성업’중이던 소피스트처럼 돈을 받지도 않았고, 가정사를 돌보지도 않은 채 자신에게 부여된 ‘신의 명령’에 따른 삶을 살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1차 변론 후 30표 차이로 유죄가 확정됐고, 대안형량(피고측이 제안)을 제안하는 2차 변론 후에는 오히려 1차에서 무죄심판을 내린 배심원들이 대거 유죄 심판으로 돌아섬으로써 사형확정을 받는다. 2차 변론 내용을 들여다보면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원한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배심원을 자극하는 변론을 펼치는데 ‘괘씸죄’가 적용된 느낌이다.

놀라운 것은 자신은 벌이 아니라 시청사에서 무료식사를 제공받는 상을 주는 것이 합당하다고 말하는 대목이다. ‘죄를 짓고’ 고발당한 처지의 피고발인의 당당해도 너무 당당한 태도, 즉 나의 행위는 벌 아니라 국가 유공자급 대접을 받을 행위라고 말하는 여유와 당당함이라니.

삶과 죽음을 가르는 절체절명의 순간, 눈물 콧물 쏟으며 삶을 구걸하기는커녕,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배심원과 아테네인들에게 자기행위의 정당성을 조목조목 논변하는 용기와 인간됨의 깊이를 생각하게 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대목은 그가 죽음에 일말의 두려움도 없으며 오히려 쉬고 싶은(죽고 싶은) 마음이 컸던 것이 아닐까할 정도로 의연했다는 점이다. 삶보다 죽음 쪽에 가치를 둔 때문일까? 분명한 것은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행위를 정당하고 가치 있는 것으로 보았다는 점이다.

사형이 확정된 이후의 3차 변론에서 그는 죽음이 ‘꿈 없는 깊은 잠’이거나 ‘저승으로의 이주’라고 말한다. 죽음이 깊은 잠이라면 ‘죽음은 일종의 소멸이어서 아무것도 자각하지 못하며, ‘저승으로의 혼의 이주’라면 그곳(저승)에서 진정한 판관들과 반신들을 만날 것이며 그곳 사람들에게 ‘캐묻고 떠보며 시간을 보낼 것’이라고 말한 점이다.

즉 ‘대화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에게 최고의 선이며 캐묻지 않는 삶(검토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고. 해서 ‘검토하는 삶’을 포기하느니 저승으로 가서 ‘검토하는 삶’을 살 것이라고. 그것은 신탁에 복종하는 삶이기도 하다고.

사형이 확정된 이후에도 피할 방법이 있었으나 소크라테스는 이를 거부하고 죽음으로 이주해 갔다.

소크라테스의 ‘위험한 정신’은 자신이 믿는 진리를 지키는 정신일 것이다. 일촉즉발의 위험 앞에서 눈도 깜짝하지 않고 목숨을 버린 소크라테스는 위험한 삶을 선택했고 위험 안으로 당당하게 걸어 들어갔다.

이를 니체는 ‘소크라테스는 삶을 질병으로 보았으며 죽음을 치유로 본 것으로 해석한다.(아침놀)

잘 알다시피 니체는 소크라테스, 즉 플라톤과 정확히 반대지점에 있다. 니체는 소크라테스 플라톤으로부터 시작된 전통 형이상학적 관점을 해체시킨 장본인이다.

니체는 ‘위험하게 살아라, 실존의 가장 커다란 결실과 향락을 수확하기 위한 비결’은 위험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한다. 니체의 말대로 소크라테스는 위험하게 살았고 ‘실존의 가장 커다란 결실과 향락을 수확한’ 것 같다.

니체는 왜 ‘위험하게 살아라’고 말하는 것일까?

“보다 많은 위험에 부딪히고, 보다 생산적이고, 보다 행복한 인간! 왜냐하면-내 말을 믿으라!- 실존의 가장 커다란 결실과 향락을 수확하기 위한 비결은 다음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위험하게 살지어다! 그대들의 도시를 베수비오 화산가에 세우라! 그대들의 배를 미지의 바다로 내보내라! 그대와 동류의 인간들, 그리고 그대들 자신과의 싸움 속에서 살라! ” <즐거운 학문, 283>

위험하게 살라고, 인간들과도 자신과도 싸움을 멈추지 말라고, 폼페이를 삼킨 ‘베수비오 화산가에 도시를 세우고 미지의 바다’로 출항할 준비를 하라고, ‘자기 자신을 거듭 추월하고 누가 따라오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되라고 니체는 말한다.(아침놀, 554)

니체의 문장을 좀 더 읽어보자.

“다른 새들은 더 멀리 날 것이다!(...) 이 새들은 우리가 추구했던 곳, 온통 바다, 바다, 바다인 곳을 향해 날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날아가려 하는가? 도대체 왜 우리는 바다를 넘어서 날아가려 하는가? 어떠한 욕망보다도 우리에게 더 중요한 이 강력한 욕망은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가? 그것도 하필이면 왜 바로 이 방향으로, 즉 이제까지 인류의 모든 태양이 침몰했던 곳을 향해서? 아마도 언젠가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우리마저 서쪽으로 향하면서 인도에 도달하고자 했다고, 그러나 무한에 좌초한 채 난파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었다고. 그렇지 않은가? 나의 형제들이여? 그렇지 않은가?”

니체는 ‘바다를 넘어서 날아가려고’ 욕망한다. ‘무한에 좌초한 채 난파하는 것’에 대한 욕망. 그것은 니체가 말하는 맹목성의 기쁨이 아닐까? 즉 “나의 사상은 (...) 내가 어디로 향해 갈 것인가를 알려줘서는 안된다. 나는 미래에 대한 나의 무지를 사랑한다”(즐거운 학문, 287)라고 나체는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식하라. 그렇지 않으면 파멸하리라’는 정신으로 사는 삶, 인식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는 정신, 위험하게 살아야 인식할 수 있는 파토스가 아닐까? 니체에게 인식은 기쁨이며 힘의지의 산물이다. 위험을 넘어 ‘선악의 저편’에 갔을 때 인식은 새로운 물음을 물으며 다시 날아간다.

그렇다면 소크라테스와 니체의 상이점은 무엇일까?

소크라테스는 이미 ‘인식 한 것’, 진리라고 믿는 것, 다시 말해 사람들의 무지를 일깨우며 캐묻고 검토하는 삶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진리’를 위해 죽음의 위험을 택했다. 반면 니체는 ‘자기 자신을 거듭 추월하는’ 인식을 위해, 파멸과 위험을 선택하는 삶을 요구한다.

인식은 안온하고 평화로운 삶 속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기에 말이다. 인식은 항상 값비싼 대가를 요구한다. 인식은 위험한 삶을 요구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나 사태가 우리와 우리의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재산과 명예, 그리고 생명을 위험하게 할 경우 그 사람이나 사태를 전혀 다르게 인식하게 된다.(...) 이에 대해 우리 모두는 비교적 너무 안전하게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에 정통한 사람이 될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도락(道樂)으로, 어떤 사람은 심심해서, 어떤 사람은 습관적으로 인간을 연구한다. 그 어느 경우도 “인식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는 파멸하리라!”라는 식이 아니다. 진리가 칼로 우리의 살을 베어내지 않는 한, 우리는 마음속에 진리에 대한 은밀한 경멸을 갖고 있다.” <즐거운 학문 460>

‘생명과 재산과 명예를 위험하게 하는 상황’에서만 우리는 사태를 다르게 인식하게 된다. 니체는 행복하고, 편안한 상태에서는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식하라, 그렇지않으면 너는 파멸한다!

니체의 인식을 위해 위험하게 살아라! 와 소크라테스처럼 인식한 ‘진리’에 대한 믿음 때문에 위험을 선택한 삶에 대해 생각한다.

니체는 인식의 충동이 ‘진리’이며 이 진리를 위해 위험할 것을 요청하는 반면 소크라테스는 ‘진리’라고 스스로 승인한 진리를 위해 목숨을 버린다.

이때 니체는 ‘인식을 위해 위험하게 살아라’ 라는 진리를,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믿는 ‘진리’를 위해 위험을 선택했다. 소크라테스가 자신의 고정된 ‘진리’를 믿는 반면 니체는 인식을 위해 위험하게 살아라, 라는 진리를 ‘믿고’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믿음과 니체의 믿음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소크라테스의 관점과 니체의 관점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니체가 고정된 대전제를 거부하는 인식을 요청했다면, 소크라테스는 대전제 아래서 인식한 ‘진리’에 대한 믿음을 고수했다. 니체가 위험하게 살아라!라고 한 것은 주어진 조건 안에서 살아서는 인식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인식한다는 것은 망망한 대해, 즉 무한에서 무언가를 취해서 포착하는 것, 혹은 인간의 기호로 환원하는 힘이 아닐까? 낯선 것, 모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나의 언어로, 나의 눈으로 나의 손으로 만지고 보고 냄새 맡는 것, 그 마주침의 흥분과 기쁨, 그리고 인간은 다시 미지로 간다. 방금 전의 전율과 흥분을 배반하기 위해. 그것 뒤에 안 보이는 새로운 X를 향해서 나가는 삶, 인식은 멈추지 않으며, 안주하지 않는다. 대양을 향해 조각배를 저어 난파를 예상하면서. 그러나 항해를 멈출 수 없다. 거기서 신대륙을 발견하고 모르는 해협을 넘어 간다. 니체에게는 소유욕이 없는 오로지 인식만이 출렁거린다. 미지의 대륙을 발견한 후 총과 칼을 앞세워서 영역을 표시하는 침략자가 아니라 모르는 섬에 도착해 잠시 콧노래 부르고 섬과 더불어 따뜻한 밥 한 끼 지어먹고 다시 안녕, 인사하고 섬과 작별한다. 섬을 포획하지도 소유하지도 않는다. 만남의 전율을 기억하며 그는 다시 거룻배를 타고 절벽너머 로 간다. 작은 배 안에서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어느 순간 배가 좌초하는 몰락의 서사를 두려워하지 않고, 그는 규정되어 있지 않은 날 것의 세계로, 카리브 해협 너머로 사라진다. 인식만이 있다. 낯선 것을 만나 나의 눈으로 해석하고 몸으로 부딪치는 순간을 잠시 향유하는 삶으로 족하다. 이 삶은 모르는 것들투성이이며, 오류들과 가면들의 세계이며 새로운 것들로 넘치는 세계, 열락의 세계이다. 열렬히 이 세계 안에서 인식하기, 그러나 머물지도, 소유하지 않고 떠나는 나그네다.

그렇다면 왜 그래야 할까? 왜 인식해야 하는 것일까? 왜 철학을 해야 할 것인가? 그 물음만이 남는다. 각자의 답이 있을 것이다. 아니 답이 없다. 그냥 인식하는 것이다. 예컨대 속지 않기 위해서, 잠자지 않기 위해서, 살고 싶어서, 삶이 너무 뭣 같아서 다르게 살고 싶어서, 이 보잘 것 없는 삶을 이렇게 살다마는 것이 억울해서, 인정받고 싶어서, 떠나고 싶어서, 재미있고 싶어서 등등등은 사후적으로 사유한 결과가 아닐까? 우리는 그냥 인식하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니체는 진리와 관련해 다른 지점에 있으나 서로 같은 지점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인식을 위해 위험한 삶을 살고자 함, 위험하게 살아야 할 이유는 단지 인식하기 위함일뿐이다. 잘 인식하기. 계속 인식하기. 머물지 않고 인식하기.

‘삶은 영웅적인 감정이 춤추고 뛰어 노는 위험과 승리의 세계’이며 ‘삶을 즐기는 대가가 되기’를 니체는 원한다. 위대한 해방자’인 인식이 니체에게 찾아온 그날 이후로 삶은 “인식의 수단”이 된다. 그 인식을 향한 충동 속에서 니체는 춤춘다. 그것이 삶이므로. 나를 향해 싸우고 나의 동요들과 싸우고 세계와 싸우는 싸움꾼 니체는 싸움 속에서 위험과 승리의 세계를 만난다. 이 세계는 인간에게 고통을 줄 수 있으나 니체는 이 고통을 통과해서 위대하게 침몰한다.

“실제로 철학자들, “자유로운 정신들”은 “늙은 신이 죽었다”는 소식에서 새로운 아침놀이 비치는 듯한 느낌을 받고 있다. 우리의 가슴은 감사, 놀라움, 예감, 기대로 흘러넘치고 있다. 마침내 우리에게 비록 밝지는 않을지라도 수평선이 다시 열린 것이다. -마침내 우리의 배가 다시 출항할 수 있게, 모든 위험을 향해 출항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인식의 모든 모험이 다시 허락되었다. 바다가, 우리의 바다가 다시 열렸다. 그러한 “열린 바다”는 아마도 일찍이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을 것이다-”

그것은 신의 죽음, 낡은 가치와 세계의 죽음, 새로운 복음으로 시작된다. 신의 가호와 자비로 보증되지 않는 세계, 이 무자비한 세계로 인간은 출항을 준비한다. 그 세계는 허무를 받아들이며 용감하게 몰락을 각오한 인식의 충동을 허용하는 곳이다.

“우리는 매년 봄마다 새 껍질을 입으며, 점점 더 젊어지고 미래적으로 되고 높아지고 강해진다. 우리는 점점 더 강력하게 깊은 곳을 향하여, -악을 향하여- 뿌리를 내린다. 동시에 우리는 더욱 커다란 사랑으로 넓게 팔을 벌려 하늘을 포옹하고, 더욱 커다란 갈증을 느끼며 우리의 모든 가지들과 잎을 통해 빛을 빨아들인다. - 모든 생명이 그런 것처럼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 한 장소가 아니라 모든 곳에서, 한 방향이 아니라 위로, 밖으로, 안으로, 아래로-우리의 힘은 동시에 줄기로, 가지로, 뿌리로 내닫는다 (...)”

<즐거운 학문 371>

이제 우리는 ‘젊어지고 높아지고 미래적으로 되고 강해진다.’

‘힘과 사랑, 눈물과 웃음으로 충만한 ’신과 같은‘ 감정을 니체는 ‘미래의 인간성’이라고 말한다.(즐거운 학문, 337) 인식하고, 버리고, 인식하고, 몰락하는 태양, 미지의 ‘높은 곳을 향해 성장하는 인간, 불길한 숙명일지라도 점점 더 번개 가까이 다가가며 사는 높이의 숙명을 사는 인간을. 이 인간은 오해받고 조소당할 것이다. 그러나 니체는 간다. “다른 이들이 우리를 오해하고, 오인하고, 혼동하고, 펌훼하고, 잘못 듣고, 흘려듣는 것에 대해” 니체는 한탄하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그의 운명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미셀 푸코의 <성의 역사2 쾌락의 활용> 서문에 게재된 글이다.

“그토록 끈질기게 작업에 몰두했던 나의 수고는 –단지 호기심, 그렇다. 일종의 호기심 때문이었다. 반드시 알아야 할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자 하는 호기심이 아니라 자기가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을 허용해 주는 그러한 호기심이다. 지식의 습득만을 보장해 주고 인식주체로 하여금 길을 잃고 방황하도록 도와주지 않는 그러한 지식욕이란 무슨 필요가 있을까? 우리 인생에는 ‘성찰과 관찰을 계속하기 위해서 자기가 현재 생각하는 것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있으며, 자기가 지금 보고 있는 것과 다르게 지각할 수도 있다’라는 의문이 반드시 필요한 그런 순간들이 있다. (...) 그렇다면 철학이란- 철학적 행동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것은 사유에 대한 비판 작업, 바로 그것이 아닐까? 그것은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정당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그리고 어디까지 우리는 이미 알고 있는 것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가를 알아내려는 노력, 바로 그것이 아닐까?” -<미셸 푸코 1926-1984>에서 디디에 에리봉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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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경 작가, '주부재취업처방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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