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

[정락인 사건전문기자] 지난 2000년 8월 10일 익산의 약촌 오거리에서 택시기사 유아무개씨(40)가 살해된 채 발견된다. 유씨는 어깨와 가슴 등 무려 12곳을 칼에 찔려 참혹했다. 유씨의 직접적인 사망원인은 ‘폐 동맥 절단으로 인한 과다출혈’이었다.

경찰이 범인을 찾기 위해 현장 주변을 수색하고 있을 때, 동네 다방에서 배달 일을 하던 최아무개군(15)이 나타났다. 최군은 “내가 범인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택시가 서 있고, 한 명인가 두 명인가 뛰어가는 걸 봤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경찰은 사건 해결을 위해 최군 증언에 주목했다. 최초 목격자인 최군의 진술을 통해 범인의 몽타주까지 확보했다. 하지만 3일 뒤, 놀라운 ‘반전’을 맞게 된다. 최초 목격자였던 최군이 바로 살인 사건의 범인으로 검거 된 것이다.

경찰은 오토바이를 타고 가던 최군이 앞서가던 택시기사와 시비가 벌어지자 갖고 있던 흉기로 찌르고 달아났다고 밝혔다. 최군은 경찰에서 “‘너는 애미 애비도 없냐’고 욕을 해, 순간 화가 치밀어 오토바이에 있던 칼로 택시기사를 찔렀다”고 진술했다.

10대가 저지른 우발적 살인으로 보였던 사건. 하지만 최군 스스로 범행일체를 자백했다는 경찰의 발표와 달리, 수사 과정에서 경찰의 협박과 폭력 때문에 자신이 허위 진술을 했다고 주장했다. 경찰은 최군을 체포한 후 경찰서로 가지 않고 여관으로 끌고 갔다.

최군에 따르면 여관방에서 형사들에게 집중 추궁을 당하며 3~4시간이나 구타당했다. 전화번호부를 하나 툭 던져주며 “거기에서 진범을 찾아내라”고 강요했다. 이 과정에서 원하는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뺨을 때리거나 뒤통수를 가격했다.

경찰서에 가서도 가혹행위는 계속됐다. 조사를 받을 때마다 진술이 틀렸다고 대기실 같은 곳에서 걸레봉으로 때리고 뺨도 때렸다. 최군은 “머리를 바닥에 박기도 했고, 조사를 이유로 잠을 재우지 않은 적도 있었다”고 증언했다. 경찰은 최군에게 자백을 강요하며 “네가 했잖아. 칼 어디 있어, 어떻게 죽였어?”라고 다그쳤다.

최군이 계속 아니라고 해도 강압적으로 몰아 붙였다. 결국 목숨의 위협을 느낀 최군은 경찰이 시키는 대로 자백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에 체포당한 최군이 “어머니와 통화하고 싶다”는 요구도 거절당했다.

최군이 범인이었다면 물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 살해당한 택시기사는 몸에 10군데 이상을 흉기로 난자당했다. 그는 엄청난 양의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최군이 범인이라면 피해자의 혈흔이 옷과 소지품에서 검출돼야 한다.

하지만 최군의 소지품에서는 단 한 방울의 피도 검출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택시에서는 최군의 지문도 나오지 않았다. 경찰은 “옷을 잘 세탁해서 혈흔 반응이 없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주장을 했다.

경찰은 최군이 배달용 오토바이에 가지고 다니던 칼을 ‘증거물’로 압수했다. 최군이 갖고 다닌 칼은 작은 과도였다. 최군은 “낚시할 때 쓰기 위해 갖고 다녔다”고 진술했고, 택시기사 살인 때 사용한 흉기는 최군이 갖고 다니던 과도보다 큰 칼이었다.

칼의 크기가 맞지 않자 경찰은 최군이 배달 일을 했던 다방으로 가서 주방에 있던 부엌칼을 증거물로 압수했다. 최군은 “부엌칼 압수 당시에 저는 다방 입구에 있었고, 형사들이 주방에서 가져왔다”고 말했다. 범행당시 사용한 칼도 최군의 증언과 경찰이 증거로 제시한 것이 일치하지 않았다.

경찰은 뚜렷한 물적 증거를 찾아내지 못한 채 자백만으로 15살이던 최군을 구속했던 것이다. 검찰은 경찰 수사를 그대로 믿고 최군을 기소했다. 그는 법원이 자신의 누명을 벗겨줄 것으로 믿었다. 법원이 자신에게 씌워진 ‘누명’을 벗겨줄 것으로 믿고, 경찰 조사과정에서의 혐의를 전면 부인했다. “경찰로부터 자백을 강요하는 물리적 폭력 등이 있었다”고 폭로했지만 최군의 말은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다.

1심 법원은 오히려 “반성의 기미가 전혀 없다. 유족을 모욕했다”며 괘씸죄를 적용해 중형을 내렸다. 청소년 살인죄로 내릴 수 있는 최고형인 15년이 선고됐던 것이다. 최군은 “당시에는 아무도 제 말을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최군은 항소했다. 국선변호인은 “믿어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계속 부인하면 재판 결과가 좋지 않을 것이라면서 형이라도 줄여보자”고 설득했다. 최군은 할 수 없이 자포자기 심정으로 혐의를 인정하고 말았다. 2심 법원은 ‘혐의 인정’한 정상을 참작해 5년을 감형한 10년을 선고했다.

최군은 더 이상의 희망은 없었다. 믿을 사람도 없었다. 대법원 상고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내몰렸다. 최군은 살인현장의 목격자였지만, 경찰의 가혹수사로 ‘살인범’이 돼서 소년원에서 잃어버린 청춘을 보내야만 했다.

더 이상의 희망이 없던 최군에게 희소식이 들렸다. 그가 소년원에 들어간 지 3년이 지난 2003년 6월5일, 군산경찰서는 이 사건의 진짜 범인으로 김아무개(25)를 검거했다고 발표했다. 김씨의 도피를 도운 혐의로 친구인 임아무개씨(25)도 체포했다.

김씨는 경찰 조사에서 “택시강도를 하려다 기사를 살해했다”고 자백했다. 범행 상황과 관련해서 줄곧 진술이 바뀌었던 최군과는 다르게 김씨의 진술은 시종 일관됐으며, 범행상황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듯했다. 진범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는 구체적인 정보를 꽤나 신빙성 있게 진술했다. 김씨의 도피를 도운 임씨 등 그 주변 인물들의 진술도 김씨의 자백과 상당 부분 일치했다.

하나의 사건에 두 명의 범인이 나타난 이 사건에 대해 세상의 관심이 집중됐다. 그러나 최군에게 누명을 씌운 경찰과 이것을 믿고 기소한 검찰은 ‘카르텔’을 형성했다. 검찰은 김씨에 대해 “칼의 행방을 찾기 어려워 물적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구속영장신청을 기각했다.

당시 담당 형사는 김씨 주거지 등에 대한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했으나 거절당했다. “흉기에 대한 특정이 부족하다”는 이유였다. 누가 봐도 앞뒤가 안 맞는 논리였다. 왜냐면 검찰은 ‘물적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김씨의 구속영장 청구를 기각했는데, 정작 경찰이 증거확보를 위해 ‘압수수색 영장’을 신청하자 흉기에 대한 특정 운운하며 거부했던 것이다.

진범이 등장했으나 검찰은 최군의 누명을 벗겨줄 절호의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말았다. 김씨의 “내가 했던 진술은 허위였다”는 한 마디에 검찰은 그를 풀어줬다. 그리고는 소리 소문 없이 사건을 종결시켰다.

결국 김씨는 긴급체포 기한인 48시간이 지나 석방됐다. 그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당시 심신미약으로 인해 허위진술을 했다”고 주장했다.

사실상 경찰과 검찰은 수사의지가 없었다. 만일 군산경찰서에 잡힌 용의자가 진범으로 확인되면 최군은 억울한 누명을 썼다는 것이 밝혀지고, 경찰이 폭언과 폭력을 통해 자백을 받아낸 것이 드러나기 때문이다.

죄가 없는 사람을 기소하고 재판한 검찰과 법원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결국 최군은 누명을 벗을 절호의 기회를 놓쳤고, 10년 만기 복역하고 2010년 8월 출소했다. 15세의 소년은 어느새 25살의 청년이 됐다.

최씨는 우여곡절 끝에 재심을 통해 억울한 누명을 벗기로 했다. 법원에서 재심을 받아주기란 하늘에서 별 따기 만큼 어려운 일이다. 법원의 판결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법원이 인정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런 와중에 최씨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 생겼다. 피해자인 택시기사에게 근로복지공단이 지급한 4000만원에 10년 동안 붙은 이자 1억원을 포함한 1억4000만원을 최군이 내야 한다는 구상권이 청구됐다. 만약 재심이 받아들여져 최씨에게 무죄가 선고되지 않는다면 10년형 뿐 아니라 ‘1억4000만원’까지 물어내야 할 처지가 됐다.

2013년 4월 최씨는 자신의 사건에 대한 재심을 청구했다. 법원은 재심결정을 하지 못했다. 기다림의 세월은 하염없이 흘렀고, 점차 희망이 사그라들 때 쯤인 2015년 6월22일 광주고법 형사1부(서경환 부장판사)는 재심을 결정했다. 재심을 청구한 지 2년 2개월만이었고, 살인사건에 대한 공소시효가 49일을 남겨둔 시점이었다.

2015년 7월 일명 ‘태완이법’이 개정되면서 2000년 8월8일 이후 발생한 모든 살인 사건의 공소시효가 폐지됐다. 이 사건의 경우 2000년 8월10일에 발생한 것을 가만하면 2일 차이로 이 법의 적용을 받게 됐다.

그런데 광주고검은 사흘 뒤인 6월25일 이에 불복해 즉시 항고했다. 이제 최씨가 다시 재판받을 수 있을지는 대법원의 손에 달렸다. 다행히 대법원은 검찰의 항고를 기각하고 재심 결정을 확정했다. 최씨에게는 자신의 누명을 벗을 마지막 기회인 셈이다.

2016년 11월 17일 재심에서 최씨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이에 따라 진범으로 지목된 김씨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됐고, 경기도에서 체포됐다. 이후 김씨는 검찰 조사와 재판과정에서 줄곧 “살인을 한 적이 없고 2003년 경찰 조사 때 인정한 살인 관련 내용은 스스로 꾸민 이야기”라며 혐의를 부인했다.

그러나 법원은 최씨의 말을 믿지 않았다. 지난해 5월25일 전주지법 군산지원 형사1부(재판장 이기선 부장판사)는 피고인 김씨에 대한 1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피해자의 돈을 빼앗기 위해 칼로 살해한 혐의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흉기로 생명을 빼앗아 피해회복이 불가능하고, 유족들은 평생 상처를 입고 살아가는데도 피고인은 피해회복을 위한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씨는 항소했으나 원심 판결이 유지됐다. 2018년 3월 27일 대법원 3부(주심 김창석 대법관)는  김씨의 상고심에서 징역 15년을 선고한 원심판결을 확정했다. 이로써 이 사건의 진범에 대한 법적 처벌을 마무리했다. '억울한 옥살이'를 한 사람이 최군 한 사람 뿐일까.

최씨는 억울한 옥살이 대가로 형사보상금 8억4천여만 원을 받았다. 이 중 일부는 사법 피해자 조력 단체와 진범을 잡는 데 도움을 준 환상만(64) 전 군산경찰서 형사반장에게 각각 5%씩 내놓기로 약속했다.

사건의 실체도 드러났다. 진범 김씨가 최초 진술한 것을 보면 그는 사건발생 당시 생활고를 겪다가 택시 기사를 상대로 강도행각을 벌이기로 마음먹었다. 김씨는 피해자 유씨의 택시 뒷좌석에 탑승한 후 약촌오거리 버스정류장 인근에서 칼을 들이대며 “돈을 내 놓으라”고 협박했다.

이에 놀란 택시기사가 도망치려고 하자 왼쪽 어깨를 붙잡고 칼로 찔렀으며 찌르면서 칼 끝에 뼈가 걸리는 느낌을 받았다고 진술했다. 칼끝이 휘어졌을 수도 있다는 것과, 갈비뼈에 손상이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이후 근처 공중전화로 친구 임씨에게 전화를 걸었고, 임씨 집으로 도망친 후, 흉기를 임씨에게 보여준 후 그 집 매트리스 아래에 숨겼다.

임씨는 후에 이사 가면서 이걸 집에다가 놔두고 갔다고 진술했다. 최씨가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할 때 김씨는 해외에서 골프여행을 즐기며 호의호식했다. 김씨의 도피를 도운 혐의를 받던 임씨는 죄책감 탓인지 2012년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담당 경찰관 박 경위의 자살

익산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이 언론을 통해 재조명되면서 전 국민의 공분을 샀다. 비난의 화살은 최군을 수사했던 경찰관들을 향했다.

최군이 억울한 옥살이를 할 때 그에게 ‘살인범’이라는 누명을 씌운 경찰관들은 여전히 세금으로 월급을 받아가면서 지냈다. 심지어 이 사건의 공로를 인정받아 국가의 세금으로 ‘상금’도 받고 승진까지 했다.

2016년 9월 28일 당시 사건을 담당했던 전북경찰청 소속 박아무개 경위(44)가 익산시 모현동의 한 아파트에서 목을 매 숨진 채 발견됐다. 조사 결과 박 경위는 동료와 술을 마시고 귀가한 뒤 밖에 있던 부인에게 전화해 “괴로워 죽고 싶다”고 말했다.

당시 중학생인 아들과 딸은 작은방에서 자고 있었다. 뒤늦게 부인이 안방에서 숨져 있는 박 경위를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유족들은 "박 경위가 재심이 시작된 뒤 괴로워했다.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진술했다. 광주고법에서 열린 재심에서 증인으로 출석하기도 했다. 사건 당시 박 경위는 순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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