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키시마호 침몰 사건

[정락인 사건전문 취재기자] 1945년 8월 15일 일본은 태평양 전쟁에서 패전했다. 일본 정부는 한국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을 데려오기 위해 해군수송선 ‘우키시마호’에 특수 임무를 맡긴다. 하지만 이 명령은 취소되고 새로운 명령이 하달됐다.

일본 북부지방에 있던 조선인 노동자들을 부산으로 실어 보내라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수 천 명의 한국인 강제 징용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굶주림, 중노동, 고문과 학대 등에 시달리며 지옥과 같은 노예생활을 했다. 일본 정부는 전범 재판이 벌어지면 이들을 포함한 재일 한국인들의 폭동을 우려했던 것이다. 

패망 사흘 뒤인 8월 18일 강제 징용자 수 천 명을 일본 북동쪽에 있는 아오모리현에 집결시켰다. 주로 홋카이도, 아오모리, 도호쿠  등에서 노역에 시달리던 조선인들이었다.

조선인 7000명 탄 귀국선 폭발

당시 탑승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 해군이 “우키시마호를 타지 않으면 배급을 받을 수 없다”, “이 배가 조선으로 가는 마지막 기회”라며 강제로 승선시켰다.

그리고 8월 22일 오후 10시 강제징용자와 가족 등 7000여 명(최대 1만 2000여 명)을 태운 우키시마호(4740톤급)는 오미나토항을 출발해 부산으로 향했다. 고국으로 가는 ‘귀국선 1호’였다.

그러나 우키시마호는 다른 곳을 향해 가고 있었다. 배는 조선으로 가는 최단코스인 일본해 횡단항로가 아니라 일본열도의 연안을 따라 내려가고 있었다.

그러다 8월 24일, 돌연 일본 중부 동해 연안에 있는 마이즈루항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리고 오후 5시 20분쯤 입항하려는 순간 폭음과 함께 배가 폭발했다. 선체중앙부에 대폭발이 일어나 배가 두 동강이 난 채 침몰했던 것이다.

일본 당국은 우키시마호가 미군의 기뢰와 충돌해 침몰했다는 주장을 되풀이 했다. 배가 방향을 바꾼 것은 미국 점령군의 정선(가던 배를 멈추게 함) 명령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기뢰 폭발설’ 보다 일본에 의해 계획적으로 폭발했을 가능성이 높다. 우키시마호가 기뢰가 아닌 내부에 설치된 폭발물에 의한 폭발이라는 근거는 생존자들의 증언에서 나왔다.

생존자들은 하나같이 폭발음이 3~4회 들렸다고 증언했다. 만약 기뢰에 의한 폭발이라면 폭발음이 서너 차례 들린다는 것이 이상하나는 것이다. 기뢰에 의한 폭발이었다면 수십 m의 물기둥이 일어나야 하는데 그런 것 또한 없었다는 것이다.

1954년 일본 기업이 선체를 인양했을 당시 배의 선체가 모두 바깥쪽을 향해 구부러져 있었다는 것도 자폭설의 근거로 제기된다. 만약 수뢰에 접촉해서 폭발한 것이라면 안쪽으로 구부러져야 하지만, 우키시마호의 선체는 모두 바깥쪽을 향해 구부러져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선체 내부에서 폭발이 일어났다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계획적 폭발 가능성 높다

만약 계획적인 폭발이라면 왜 그랬을까. 그 이유로는 강제 징용된 노동자들 대부분이 일본의 군수창고 등에서 일을 했기 때문에 ‘군사기밀누설’을 염려해 일본 정부가 계획적으로 폭침시켰을 수 있다. 또 하나는 당시 우키시마호에 함께 탑승했던 일본 해군들이 부산에 도착했을 때 보복을 두려워 자폭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일본 승무원들은 배가 폭발되기 직전 배에서 모두 빠져나갔다. 이런 정황을 보면 승무원들은 배가 폭발될 것을 미리 알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선체에는 350톤의 돌이 실려 있었는데, 이것은 배가 빨리 가라앉게 하려고 했던 정황으로 의심된다.

2016년 8월에는 우키시마호에 폭발물이 실려 있었다는 일본 정부의 기록물이 처음 공개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김문길 우키시마호 폭침 한국인희생자추모협회 고문은 “그동안 우키시마호에 폭발물이 있었다는 증거가 없었는데, 이 문서는 폭발물이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지금까지 유족들이 한결같이 부르짖는 폭침설의 중요한 증거자료가 된다”고 말했다.

일본은 우키시마호에 타고 있던 승선자에 대해 한국인 송환자는 3725명, 해군 장병은 255명을 합쳐 총 3980명이라고 했다. 이중 조선인 524명과 승조원 25명이 사망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실종자와 생존자수는 미상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승선명부를 작성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히 몇 명이 승선하고 사망 한 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일본이 발표한 사망자는 숫자를 대폭 축소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현장을 목격한 현지 주민들에 의하면 사망자가 1000 명이 넘었다. 배에 탔던 생존자들도 7000명 이상이라고 전했다.

총 1만 명이 넘는 조선인이 이 배에 승선했고, 최소한 5000명이 사망했다는 자료도 있다. 이후 일본은 미 군정당국에 조선인 사망자 숫자를 대폭 줄여 260명으로 보고한다.

태평양 떠도는 희생자의 원혼들

희생자들 대부분은 홋카이도·아오모리현 등 일본 동북지방으로 끌려간 강제 징용자와 그의 가족들이다. 이들은 일제의 강제 노역으로 노예처럼 일하다가 광복의 기쁨도 누리지 못하고 태평양 바다 한가운데서 원혼으로 떠돌고 있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 진상 조사나 공식 사과는커녕 관련 자료조차 공개하지 않고 있다.

1992년 생존자와 유족들은 일본 법원에 일본 정부에게 이 사건에 대해서 피해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2001년 8월 23일, 교토지방재판소에서는 일본 정부의 안전 배려 의무 위반을 이유로 생존자 15명에게 1인당 300만 엔의 위로금 지급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 요청은 기각했다. 그러나 이 판결도 2003년 오사카 고등재판소에서 번복됐고, 원고 패소판결을 내렸다. ‘한일기본조약’에 의해 보상은 끝났다는 것이다. 일본은 지금까지도 “당시 국가가 징용자에 대한 수송책임이 없었다”며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

1977년에 일본의 공영방송 NHK에서 다큐멘터리 ‘폭침’이 방영되면서 우키시마호 사건이 다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1995년 8월 도쿄에서는 이 사건을 주제로 한 ‘아시안 블루-우키시마호 사건’이라는 영화가 개봉됐다.

1999년에는 북한에서는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이용해 이 사건을 다룬 영화 ‘살아 있는 령혼들’을 제작했다. 2008년 8월에는 우키시마호 사건을 소재로 한 동화 ‘순이’(김영주)가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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