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뉴스통신 칼럼]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 <소크라테스의 변론>에는 법정에 서서 무죄를 주장하는 소크라테스의 육성이 절절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만약 여러분이 나를 죽이면 나를 대신할 사람을 찾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표현이 좀 우수꽝스러울지 모르지만, 알기 쉽게 말해 나는 마치 덩치가 크고 혈통이 좋긴 하지만 그 덩치 때문에 굼뜬 편이어서 등에의 자극이 필요한 말(馬)에게 배정되듯, 신에 의해 이 도시에 배정된 것입니다. 그런 등에 구실을 하라고 신께서 나를 이 도시에 배정하신 것 같단 말입니다. 어디서나 온종일 여러분에게 내려 앉아 여러분을 일일이 일깨우고 설득하고 꾸짖으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그런 사람을 여러분은 쉽게 구하지 못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내 조언을 받아들인다면 나를 살려 주겠지요. 그러나 여러분은 아마 졸다가 깬 사람처럼 짜증이 나서 (...) 아무 생각 없이 나를 죽이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신께서 여러분을 염려하여 나를 대신할 누군가를 보내주시지 않는 한 여러분은 자면서 여생을 보내게 될 것입니다”

- 플라톤 <소크라테스의 변론>중

소크라테스는 사론을 정론으로 만들며, 나라에게 섬기는 신이 아닌 다른 신을 섬기고 청년을 타락시킨다는 죄목으로 법정에 서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자기의 유일한 지식은 자기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뿐’이라고 주장한다. 또 “소크라테스가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델포이 신전의 신탁이 믿기지 않아 자기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을 찾아다녔으나 그런 사람을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는데 그 과정에서 ‘지혜롭다는 사람들도 사실은 무지하다는 것’을 입증함으로써 이들의 미움을 산 것이 화근이 되어 고발당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니체는 <반시대적 고찰>에서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아버지들은 아들의 철학자 정신, 가장 뒤틀린 정신에 반대해왔을 것’이라며 ‘소크라테스 역시 청년을 타락시킨 일에 대한 아버지들의 분노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논평한다.

대체로 선사 이래 인간의 역사에서 앎의 의지는 참으로 무섭고 두려운 어떤 것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지금 이곳을 가로질러 물음과 문제를 제기하는 정신, 앎을 향한 정신은 소크라테스에게서 보이듯 자기의 무지를 고백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내가 세상살이에서 알만한 것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믿는 정신은 다른 앎을 향한 파토스를 지닐 수 없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고 타인의 무지함을 알려주는 등에 역을 자임하고 나섬으로서 위험하고 성가신 존재가 되어 죽음의 운명을 맞게 된다.

소크라테스의 사형선고 이후 인류는 중세라는 암흑기를 스스로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안다고 믿는 시대, 다시 말해 그 앎은 신의 앎이며 인간은 신의 앎을 따라 사는 존재일 뿐이다. 신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창조하고 설계하는 시대가 중세다.

여기서 유발 하라리의 통찰이 재미있게 다가온다.

하라리는 현대문명을 가능하게 한 과학혁명을 ‘무지의 혁명’이라고 규정한다. 그는 ‘과학혁명을 출범시킨 위대한 발견’은 ‘인류는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모른다는 발견이었다’고 말한다. 근대 이전에는 세상에서 알아야 할 모든 것은 기독교, 이슬람, 불교 등을 통해, 경전을 통해, 혹은 현자를 통해 이미 알려져 있었다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평범한 사람들은 종교의 경전을 통해, 문헌과 전통을 통해 모르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도 여전히 우리가 모르는 무엇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가혹한 박해를 받았다. 이런 집단의 전통은 새로운 앎의 갈망을 지닐 수 없게 한다, 오늘날 과학의 전통은 ‘집단적 무지’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탐구하려는 정신에 있다는 것이다. 전통지식은 집단적 무지를 인정하지 않았다. 신이 다 알고 있고 신의 계시에 따라 사는 삶만이 요구되었다. 이 모름의 인정이 앎을 향한 항해를 가능하게 했다는 분석이다. 여기서 유럽제국은 대항해 시대를 맞게 되고 식민지를 개척하여 과학과 자본으로 세계를 쥐락펴락하게 된다. 하라리는 ‘무지를 발견하고 인정함으로써 지를 향한 도정에 나설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모른다. 해서 나는 알고 싶다. 이 정신을 니체만큼 철저히 밀고 나간 철학자가 있을까?

어떤 성취에도 머물지 않았고, 어떤 정신에도 잠시도 은거하지 않고 자신을 향한 변전을 거듭한 니체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허물을 벗을 수 없는 뱀은 파멸한다. 의견을 바꾸는 것을 방해받는 정신들도 이와 마찬가지다. 그들은 정신이기를 그친다.”<아침놀 573>

니체는 인식의 확장을 향한 불꽃의 삶을 살았다. 경계를 넘어가기. 벼랑에서 한발 더 나가기. 늘 인식을 향한 과정 중에 있던 인간이 니체였다. 니체에게는 머무르지 않기가 목적이었을까? 파멸을 각오하며 위험한 항해를 거듭하는 정신, 그 정신은 지금까지 우리는 철저히 ‘무지했다’고 고백하는 순례가 아닐까? 전통적 형이상학과 도덕은 오류 속에서 탄생했다고 말하는 순례.

그러나 이런 오류를 인정하지 않고 신의 목적에 따라 인간은 창조되었으며, 인간은 신을 믿음으로서 이미 다 ‘안다’는 오만, 그 앎, 그 오류를 ‘보편적 진리라고 주장’하는 한 어떤 배움도 불가능하다. 니체는 도덕과 형이상학이 모두 종족보존의 본능으로 인한 오류에서 출발했다고 그 기원을 추적한다.

중세의 시대, 종교가 학문이며 철학이며 과학을 대신했던 집단적 신앙 속에서 인간은 무지를 인정할 수도 없고 오류를 알 수도 없다. 모두 다 신의 뜻이고 신의 섭리이니, 그 섭리와 신의 뜻에 순종하는 삶만이 허락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은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지혜롭다고 알려진 명망 있는 자들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으로 생각한다고 지적한다. 그러나 무지의 지, ‘모른다는 사실의 앎’은 새로운 앎을 향한 모멘텀이 된다. 이 모름을 인정할 때 우리는 앎을 갈망하게 되고 앎을 향해 배움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더 이상의 앎이란 없다. 이것은 내가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됐다. 몇 권의 고전을 읽고 나서 나는 내가 너무도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됐다. 역설적이지만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어떤 앎이 전제된다. 무지의 앎을 위해서는 어떤 앎이 없고는, 무지함에 대해 알 수가 없다. 그 무지를 일깨워주는 역할을 해준 이가 소크라테스일 것이다. 내겐 어려운 책이 나의 무지를 일깨워 주었다면 아테네 사람들에게는 소크라테스가 자신들의 무지를 일깨워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때 나의 무지를 절감하면서 앎을 수용하려는 자세이거나 나의 무지를 깨우쳐준 매개물(소크라테스 혹은 책)에 대해 저주를 퍼붓거나, 그것은 개인의 자유다. 그러나 이것이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조직, 국가가 되었을 때, 중세처럼 공동체 전체가 이 앎을 거부할 때 암흑의 역사가 전개된다. 앎을 거부하고 신에게로 귀의하는 삶은 맹목의 삶이며 확인과 검토를 허용치 않는 삶이다. 그러니까 알기위해서는 모른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선행돼야 하는 것이다. 무엇을 모르는지, 어디까지 모르는지, 즉 모르는 것을 정확히 아는 것이 필요하다. 해서 소크라테스는 무지의 지를 일깨우기 위한 충동으로 아테네의 거리를 돌아다니며 무지를 일깨우다가 미움을 받고 죽는다. 한 사회나 한 문명이나, 개인이나 자신의 무지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순간이 바로 깨달음의 순간이며 앎과 접속하는 순간일 것이다.

내가 공부를 하지 않았을 때 나는 사회현상이나 정치 경제 문화 등 웬만한 것을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 같은, 등에 같은 책을 만났을 때 나는 나의 무지를 통렬히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무지를 발견하는 것은 앎을 발견하는 길이다. 무지의 발견과 인식을 향한 노력은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나의 신(神)은 무엇일까? 그 신은 나의 족쇄는 아닐까?

미지의 대륙을 향해,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을 각오로 항해에 나선 콜럼버스는 자기시대의 무지를 인정하고 자기 시대 밖으로 나가버린 자다.

중세인들은 지구가 평평하거나 네모난 것으로 인식했으므로 먼 바다로 나갔다가는 벼랑에 떨어져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까운 바다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콜럼버스는 벼랑을 향해 시대 밖으로 나갔다. 실제로 신대륙을 발견하기까지 수많은 선원들이 사망하고 콜럼버스 자신도 병을 앓았다. 유럽제국주의 행태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기에 콜럼버스는 비유적 의미일 뿐이다. 앎이 타인에 대한 폭력과 지배를 위한 도구로 이용돼서는 안 될 것이기에 말이다. 앎은 나와 타인의 향상, 인류의 향상을 목적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니체의 문장을 인용한다.

“확실한 발걸음과 신뢰를 가지고 지혜의 길로 나아가라. 네가 어떤 존재이든 스스로 경험의 샘이 되어 너 자신을 도우라. 사람들은 종교와 예술을 어머니와 유모처럼 사랑해봤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현명해질 수가 없다. 그러나 그것을 넘어서서 바라보고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너는 역사에 정통해야 하고 과거의 황야를 통해 그 고통에 찬 위대한 걸음을 걸었던 인류의 발자취를 거꾸로 거닐면서 다시 가서는 안 되는 곳을 확실히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미래의 매듭이 또 맺어질 것인지를 전력을 다하여 미리 탐색함으로써 네 자신의 삶은 인식을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얻게 된다. 네가 체험한 모든 것, 모든 시도, 오류, 실수, 착각, 정열, 너의 사랑과 희망이 너의 목표 속에서 남김없이 꽃을 피우도록 성취하는 것은 네 손에 달려 있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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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경 작가, '주부재취업처방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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