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뉴스통신] 인식은 슬픔, 가장 많이 아는 자들은

가장 깊이 숙명적 진리를 탓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인식의 나무는 생명의 나무가 아닌 것이다.

-바이런,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Ⅰ, 109>에 수록.

인식은 슬픔이다.
모를 권리도 있지 않을까? 라고, 전에 친구가 술좌석에서 농담처럼 내뱉은 말이 깊이 와 박힌다. 몰랐으면 좋았을텐데..... 그런 순간이 있다. ‘인식의 나무는 생명의 나무가 아니고’, 니체 식으로 말하면 무서운 것이며 위험한 것일 수도 있다.

원시 시대의 인간은 자연에 대한 표상이 결여되어 있었으므로 자연을 자의적으로 인식했다. 자연의 법칙성이나 인과성을 알지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때문에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는 온갖 것이 다 신(神)이었다. 또 재앙의 원인을 과학적으로 접근하기보다 ‘재앙에 대한 감각을 바꾸거나 새로운 해석을 붙임으로서’ 재앙을 극복하려고 했다고 니체는 설명하고 있다. 이 역할은 종교와 예술에서 행해졌는데 다시 말해 종교와 예술이 ‘진통제와 마취제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니체는 원시인의 삶이란 종교라는 진통제와 마취제로 연명하는 삶이라고 말한다. 종교는 이성의 오류에서 기인한 것이고 ‘종교적인 예배의 토대는 인간과 인간 간에 행해지던 마술의 표상’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리스도교의 성자를 ‘모든 환상, 공포, 실신, 황홀 등의 병적 상태’로 규정하면서 이 역시 ‘종교적이고 심리학적인 오류‘에서 비롯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성당에 다닌다.(요즘은 잠시 쉬고 있다.)
마음이 복잡할 때, 성당에 다녀오면 편안해진다. 복잡한 세상에서 각종 어려움에 부딪칠 때  내 탓이오, 라고 해버리면 정돈 되는 느낌이 든다. 이와 정반대의 지점에 니체가 있다. 인간은 무죄라고, 인간은 책임이 없다고, 인간의 모든 행위는 정당하다고, 다시 말해 인간의 인식이란 인간에게는 죄가 없다는 통찰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자연의 법칙성에 묶인 인간의 모든 행위는 정당하며 그 정당함을 인식하고 어린아이처럼 명랑하게 사는 삶을 추천한다. 기독교의 구원에 대해 니체는 사람들의 마음을 가볍게 하기 위해 생겨 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가벼워지기 위해 생긴 종교 때문에 인간은 죄인이라는 무거운 인식에 갇혀서 자신을 중죄인 취급하며 내 탓이오,를  읊조리며 살게 된다고 설명한다.

니체는 도덕의 기원을 거슬러 가면 쾌감이 도덕을 형성했듯이 종교 역시 인간의 마음에 드는 것을 참이라고 인정하는 것으로, 이는 종교의 부끄러운 속성이라고 한다. “신앙이 축복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면 신앙은 믿어지지도 않을 것이니 신앙이란 얼마나 가치가 없는가?” 라고 니체는 묻는다.

“잘못된 특정 심리학 및 동기와 체험의 해석 안에 존재하는 특정 종류의 환상, 이런 것들은 한 사람이 그리스도교인이 되거나 구원의 욕구를 느끼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전제다. 이성과 상상력의 이런 과오를 통찰하게 될 때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인 이기를 그만 둔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

무서운 주장이다. 그래서 니체는 나를 슬프게 한다. 
나는 니체를 전면적으로 신봉하지 않는다. 물리적 세계 너머의 세계, 신의 세계, 혹은 플라톤의 이데아 세계는 나를 살게 한다. 이게 끝이라면, 이 삶이 전부라면, 삶은 너무 잔인하고 기막힌 코미디다.

이 생성의 세계, 종국에 가서는 너와 나의 경계가 완전히 소멸해 버리는 세계에서 어린아이처럼 철없이, 꿈꾸고 놀다가 가는 삶. 이 삶이 전부라면 삶이란 대체 뭘까?

니체는 지금 이 순간이 전부니 부디 영원한 저 세상, 천국의 세상을 바라며 자기를 죄인 취급하며 원죄에 눌려서 내 탓 하지 말고 기쁘게 살라고 한다. 인간은 타자에 의해 변화를 겪는 무구한 자연의 한조각일 뿐이라고, 당신과 나는 모두 무구하다고 설령, 당신이 살인을 저질렀어도 자연법칙에 포획된 삶을 사는 당신은 무죄라고 니체는 말한다. 그러니 원한을 갖지 말고 살라고, 당신과 나는 곧 티끌 속으로 먼지가 되어 돌아가리니 부디 경쾌하게 살라고. 네 죄를 내가 사해주노라! 니체는 우리를 구원해 준다.

그리고 이 삶의 껍질을 벗겨 보면 그 곳에는 텅 빈 무, 힘의 다발들만이 존재한다고, 종교적 믿음은 가짜라고. 니체를 따라가 보면 남는 것은 허무다. 좀 더 깊이 가보면 위험하고 두렵기까지 하다. 이 허무를 극복하고 자기를 지배하는 주인이 되어 살라는 주문. 저 너머의 구원을 꿈꾸지 말라는 충고. 여기 이 세계에서 주사위 던지기 놀이를 하듯이 살다가라고 니체는 나를 불러 세우지만 나는 주춤거린다.

이 삶이 무거워서 저 너머를 바라보며, 나는 신을 부른다. 가령 이런 상상을 한다. 이 빈곤한 실존에게 아주 폭력적으로 어느 순간 폭포수처럼 무수한 빛의 무더기가 쏟아져 들어오기를, 그 빛들의 출렁임 속에서 개체의 나약함과 공포를 딛고 구원의 기쁨을 느끼기를, 그것이 꿈이라고 해도 그 안에서 가만 가만 몸에 울긋불긋 새겨진 삶의 흔적과 궤적들을 은총의 신께서 위무해주기를. 어떤 절대정신이, 육의 모습을 한 신이 가만가만 내 이름을 불러 주기를, 그만하면 됐다, 라고 말해주기를. 육신과 정신을 얽어매고 있는 고통의 그물을 마법의 봉으로, 얏, 풀어주기를. 

니체는 이런 정신을 노예의 정신이라고 한다. 강자이며 주인의 정신은 스스로 일어나며 스스로 기뻐하며 스스로 긍정하며 자기를 극복한 존재니까.  

모든 시대의 최고의 현자들은 전부

미소를 짓고 눈짓하며 동의한다.

바보가 더 나아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도다!

총명한 아이들이여, 바보들은

역시 바보가 되도록 두라, 그들에게 어울리도록!

-괴테의 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Ⅰ, 110절> 에 수록

바보로 살고 싶어질 때가 있다. 나태해지고 싶을 때가 있다. 영리한 인식 앞에서 어리둥절하여 무작정 쉬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럴 땐 가만히 누워 휴식을 취하면 된다. 그리고  일어나자. 고개 들어 보면 다들 저리도 열심히 산다. 이리저리 흔들리며 흔들리며. 내가 너에게 손을 내밀고 네가 나에게 위로가 되는 오늘이 되게, 나여 힘을 내거라!  오 하느님!  

*니체 저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1> 109절의 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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