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뉴스통신 칼럼] 나는 건망증이 심하다. 방금 하려던 일을 방금 잊어버린다. 내가 뭐하려고 했더라? 뭐였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한참 후에 생각난다. 심한 경우는 한 두 시간 후에 떠오르기도 한다.

외출 시 가스, 보일러 작동 유무, 전등의 상태 등을 점검해놓고도 현관 앞에서 다시 주춤거린다. 가스 잠갔나? 보일러는 껐나? 자신이 없어진다. 귀찮지만 이미 신은 신발을 벗고 다시 한 번 확인한다.

손에 휴대폰을 들고 휴대폰을 찾은 적도 있다. 어디선가 한 번 본 사람을 다시 보게 되었을 때 못 알아보기도 한다. 이때는 걱정이 된다. 치매 아닐까? 이 건망증은 마흔이 훌쩍 넘어 아이를 출산한 후 심해졌다. 깜빡깜빡하는 횟수가 늘어나다 보니 좋은 습관이 생겼다. 휴대폰에 하루 할 일을 메모한다.

니체는 기억보다 망각의 힘을 높게 평가한다. 망각을 건강의 한 형식으로 이해한다. 그렇다면 나의 이 망각 증세, 이 건망증도 건강의 지표란 말일까? 급 흥분. 아니지, 흥분할 일이 아니고, ‘망각력’에 대한  니체의 주장을 파악해 보자. 호기심은 즐거운 독서로 나를 안내한다. 

“풀을 뜯어먹으며 네 옆을 지나가는 가축 떼를 한번 보라. 그들은 어제가 무언지, 오늘이 무언지 모르고 그저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먹고 쉬고 소화하고 다시 뛴다. 그렇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매일매일, 자신들의 호불호에, 다시 말해 순간의 말뚝에 묶여 있으며, 그래서 우울함도 권태도 느끼지 않는다.

인간이 이를 보는 것은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이 인간임을 동물 앞에서 자랑하면서도, 동물의 행복을 시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기 때문이다. 그는 동물처럼 권태도 없이, 고통도 없이 살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물처럼 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의 바람은 헛될 뿐이다. 인간은 동물에게 이렇게 물어본다.

너는 왜 너의 행복에 대해 내게 말하지 않고 그저 나를 쳐다보기만 하는가? 동물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내가 말하려고 했던 것을 금방 잊어버리기 때문이야. - 그러나 동물은 이 대답 역시 곧 잊어버렸고 침묵했다.” - <반시대적 고찰Ⅱ> 

동물의 망각, 동물은 ‘순간의 말뚝에 묶여 있어서 권태도 우울함도 느끼지 않으며’ 고통 없이 산다. 상처와 슬픔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동물의 망각은 어제에 묶여있지 않은 망각이다. 동물의 행복은 ‘원한의 기억 없음’이다. (어! 건망증의 망각과는 다르네. 건망증은 나중에 생각하자.) 

니체는 ‘기억력’보다 ‘망각력’을 추천한다. 망각하며 사는 삶을 긍정한다. ‘비역사적으로’ 살라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나도 망각하며 살고 싶다.

어제의 나를 잊고 싶다. 그날의 기억, 세월의 거듭되는 강풍에도 흩어지지 않는 기억, 기억들. 나의 기억의 역사 속에서 걸어 나오고 싶다. 다른 마주침과 감응하는 새로운 내가 되고 싶다. 기억의 ‘의지’는 다시 고착되겠지만 그래도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어제의 질긴 ‘권력’이 나를 감싸고 있다.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다. 

시대와 대립하며 불화했던 니체의 <반시대적 고찰>은 당대의 속물 교양인들, ‘북어처럼 말라비틀어진’ 채 우쭐하는 독일의 정신이 한 시대를 장악하며 거들먹거리는 꼴을 보고 직격탄을 날린다.

이 시기 니체의 글 곳곳에는 ‘전도유망한’ 청년의 천재적 아우라와 치기 어린 반항의 냄새가 배어있다. 반시대적 고찰을 읽으며 나는 자주 웃었다. 청년의 욕망과 청년다운, 즉 세련되지 못한 감정 표현들, 그 ‘어설픔’이 아름답게 다가와서.

니체는 인간은 망각하는 존재이며 기억하는 존재임을 인정한다. 그래서 비역사적으로, 또 초역사적으로, 결국 역사적으로 살 것을 주문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기억과 망각의 그물 속에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완전히 비역사적으로 살 수는 없다. 동물만이 가능하다. 다만 망각하는 능력을 니체는 인간의 매우 중요한 능력으로 추천한다.

그러나 인간은 어제들에 눌려 살 수밖에 없는 존재가 아닐까? 어제의 기억과 방금 전의 기억과 나를 둘러싸고 있는 개념들과 표상들에 갇혀 살도록 ‘저주받은’자. 지금 이 순간의 나는  나의 역사가 되고 과거가 되어 나를 굴러가게 한다. 나는 무수한 역사들로 이루어진 나다.

하여 그 역사 속의 나는 언어 안에서 망각의 기술을 익히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살고 있다. 줄에 매달린 인형처럼. 나는 나의 역사들로부터 밖으로 나가보지 못하고 살다가 가는 것이 아닐까.

니체는 인간은 망각하는 동물이지만 인간을 ‘약속할 수 있는 동물’로 기른 것은 공동체의 필요 때문이라고 말한다. 공동체는 잔인한 방법으로 인간에게 기억하는 능력을 새겼다고.

“망각이란 천박한 사람들이  믿고 있듯이 그렇게 단순한 타성력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일종의 능동적인, 엄밀한 의미에서의 저극적인 저지 능력이며, 이 능력으로 인해 단지 우리가 체험하고 경험하며 우리 안에 받아들인 것이 소화되는 상태에 (이것을 ‘정신적 동화’라고 불러도 좋다)에 있는 동안, 우리 몸의 영양, 말하자면 ‘육체적 동화’가 이루어지는 수천 가지 과정 전체와 마찬가지로, 이것이 우리의 의식에 떠오르지 않는다.(...) 여기에서 바로 알수 있는 것은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명랑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지 장치가 파손되거나 기능이 멈춘 인간은 소화불량 환자에 비교될 수 있다. (...) 이러한 망각이 필요한 동물에게 망각이란 하나의 힘, 강건한 건강의 한 형식을 나타내지만, 이 동물은 이제 그 반대 능력, 즉 기억의 도움을 받아 어떤 경우, 말하자면 약속해야 하는 경우에 망각을 제거하는 기억을 길렀던 것이다” -<도덕의 계보>

인간은 ‘의식의 문과 창들을 일시적으로 닫고’ 새로운 것에 다시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준비한다. ‘정적과 의식의 백지상태’를 만들 줄 아는 동물이 인간이다. 이것이 망각의 효용이다. 그러나 이 ‘강건한 건강의 형식’인 망각의 능력은 약속을 위해 ‘망각을 제거하는 기억을 길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기억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니체가 긍정하는 ‘기억’이 있다.

즉 인간은 망각 능력과 함께 ‘능동적인 의욕 상태’인 ‘기억’도 지니고 있다. 이 기억은 약속할 수 있는 존재, 책임을 자랑스러워하는 ‘주권적 인간’의 본래적인 힘’과 연결된다. 주권적 개인이 느끼는 이 ‘책임의 기억’을 니체는 긍정적인 양심으로 본다.

책임을 특권으로 인식하는 것을 ‘주권적 개인’의 양심의 기억으로, 니체는 긍정하는 것이다. 니체는, 이 양심을  ‘양심의 가책’ 과 구별해서 사용한다. 이 ‘주권적 개인’을 니체는 강자이며 지배자, 주인, 귀족의식의 소유자로 본다. 물론 이 주권적 개인의 ‘탄생’역시 ‘교육’이라는 사회적 강제와 폭력의 결과다.

그러나 이제  주권적 개인은 사회적 관습을 뛰어 넘어버린 자, 초윤리적으로 사유하는 자, 도덕에 의문을 제기하는 자, 스스로 입법하는 자, 명령하는 자가 된다.

주권적 개인은 약속할 수 있는 자, 책임의 기억을 지닌 자다. 그러나 그는 망각하는 자다. 원한을 알지 못하는 자, 지배하고 명령하는 자, 책임지는 주체다. 그의 양심은 약자의 ‘양심의 가책’과 구별된다. 약자는 잊지 못하는 자이며, 강자는 망각하는 자다.

앞서 말했지만 나는 건망증이 몹시 심하다. 잘 망각한다. 드물게는 며칠 전에 처음 본 사람의 얼굴을 잊어버린다. 다시 만났을 때 그는 나를 알아보지만 나는 그를 모른다. 그는 당황한다. 그렇다면 나는 강자인가? 아니다! 건망증의 망각과 강자의 망각은 다르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건망증이 심하지만, 정작 잊어야 할, 오래된 기억은 끌어안고 산다.

이 경우 나는 약자다. 이런 원한의 기억에 머무르는 것을 니체는 병으로 본다. 기억하는 ‘병’은 ‘저지장치’가 파손되거나 기능이 멈춘 ‘소화불량 환자’와 비슷하다고. 그런데 사실 기억과 망각은 서로 상보적이고 동시적이다. 기억은 망각과 동시적인 국면에서 이루어진다. 때문에 ‘잘 기억하는 자’는 잘 망각하는 자이며, 강자의 특성이다. ‘잘 기억하는 자’는 자기를 지배하는 자가 아닐까? 

그러니까 강자, 망각하는 자는 타인의 지배뿐 아니라 자기를 지배하는 자가 아닐까? 양과 사자와의 관계에서 양은 자기를 지배하지 못하나 인간은 자기 지배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인간은 양의 운명에서 탈출할 수 있게 된다. 나는 강자는 지배계급이나 귀족계급이 아니고 자기를 지배하는 자라고 말하고 싶다. 동물의 비유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인간은 가능하다. 

요즘 읽고 있는  프랑수아 줄리앙의 <현자에게는 고정관념이 없다>에서 현자는 ’개별적 자아가 없고, 즉 무전제나 다전제의 사고를 하며, 모든 것을 개방되게 유지하는 자‘로 정의된다. 이 때 현자가 바로 자기를 지배하는 자가 아닐까 싶다. 이런 해석은 니체의 ’주권적 개인‘(강자)을 왜곡할 수도 있다. 또 인간이 편파적 인식이나 개별적 자아 관념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도 없을테지만 그런 가능성을 향해 자기를 열어두는 자를 나는 현자이며, 강자라고 말하고 싶다.

한 가지 더.  원한 맺힌 약자가 다만 잊기만 하면 강자가 될까? 양이 원한을 잊고 사자에게 잘 잡아먹히면서 명랑하게 살면 강자가 될까? 위에서 언급했듯이 동물이 아닌  인간은 가능하다고 생각 한다. 현대에 와서 인간은 본래부터 강자나 약자로 태어나지 않는다. 본래 귀족이며 본래 지배종족이 있을 수 없다. 인간은 조절하고 변화할 수 있기에 누구나 강자가 될 수 있다. 

어쨌든 건망증은 역시 문제다. 그러나 전전긍긍하지 말자. 메모하면 되는데 무슨 걱정인가? 느슨하고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단순하게 생각하자. 벌거벗은 동물처럼, 시간을 잊은 어린아이처럼. 비역사적으로 살되 나의 역사로부터 좋은 것은 데려와서 살자. 이 순간, 이 삶을 달게 살자.

천경 작가, 주부재취업처방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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