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선 국회의원에 국무총리도 두 번 지내

[서울=내외뉴스통신] 장원규 대기자=대한민국 현대 정치사의 산증인이자 박정희 전 대통령의 조카 사위이며, 박근혜 전 대통령의 사촌형부이기도 한 김종필(JP) 전 국무총리가 23일 별세(향년 92세)했다.

김 전 총리 측 관계자는 이날“김 전 총리가 오늘 오전 8시 15분께 별세했다"고 전했다. 김 전 총리는 이날 오전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119 구급대에 실려 순천향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고 병원 측은 설명했다.

1960년부터 정치사를 이끌어 온 김대중·김영삼·김종필 '3김(金) 시대'의 역사는 이제 모두 사라지게 됐다.

'3김 시대'의 한 축인 김 전 총리는 1961년 처 삼촌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5·16 쿠데타에 가담하면서 현대 정치사의 전면에 등장했으며, 같은 해 중앙정보부를 창설해 초대부장에 취임한 것을 시작으로 줄곧 영원한 '제2인자의 길'을 걸어왔다. 공화당 창당과정에서 증권파동을 비롯한 이른바 '4대 의혹사건'에 휘말리면서 1963년 2월 '자의반 타의반' 으로 외유를 나서게 됐다. 그는 이어 한·일 국교정상화 회담의 주역으로서 핵심쟁점이던 대일 청구권 문제와 관련된 '김종필·오히라 메모' 파동으로 6·3사태가 일어나자 1964년 또 다시 2차 외유길에 올랐다.

그는 이후 1971년부터 1975년까지 4년 6개월 간 국무총리를 지내며 승승장구했으나, 1980년 신군부의 등장과 함께 '권력형 부정축재자 1호'로 몰려 정계를 떠나 야인으로 살아왔다. 김 전 총리는 1984년 미국으로 건너가 유랑생활을 하다 1986년 다시 귀국한 뒤 신민주공화당을 창당하고 1987년 13대 대선에 출마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나 1988년 치러진 13대 총선에서 충청권을 기반으로 35석을 확보하게 되면서 정치 일선에 복귀했다.

그는 1990년 1월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김영삼 민주당 총재, 김종필 공화당 총재가 청와대에서 긴급 3자회동을 갖고 민정, 민주, 공화 3당을 주축으로 신당창당에 합의했다. 그는 이어 평생의 꿈인 내각제 완성을 위해 1992년 대선을 앞두고 3당 합당과 함께 김영삼(YS) 당시 대선후보를 지원했고 1997년 대선에선 자시이 대권 도전을 포기하고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을 성사시켜 김대중(DJ) 당시 대선후보를 지지, 정권교체와 함께 국민회의·자민련 공동정권을 탄생시키기도 했다. 이후 그는 2004년 17대 총선을 통해 재기를 시도했으나, 자신의 10선 도전 실패와 함께 고작 4명의 의원만 배출하는 참패를 당한 뒤 정계은퇴를 선언했다.

정치권에서는 그가 걸어온 정치 행보에 대해 엇갈린다. 5·16 군사쿠데타 참여자로 중앙정보부 창설, 풍운의 정치인, 영원한 2인자, 경륜의 정치인, 처세의 달인 등 온갖 수식어가 따라 붙어 다녔다. 하지만 그의 별세로 박정희 정권 이래 정치권의 산증인으로 걸어온 '3김 시대' 정치사는 이제 막을 내리며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

김 전 총리는 1926년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공주 중·고와 서울대 사범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5·16 군사혁명 당시 육군 중령이었으며 35세에 준장으로 진급한 후 전역했다. 그는 제 6, 7, 8, 9, 10, 13, 14, 15, 16대를 거치며 9선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민주공화당(공화당), 신민주공화당, 민주자유당(민자당), 자유민주연합(자민련) 총재·대표를 거쳐 제11대, 제31대 국무총리도 두 번 역임했다.

유족으로는 아들 진씨, 딸 복리씨 1남1녀의 자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질 것으로 알려졌다.  jwg777@nbnnews.co.kr

내외뉴스통신, NBNNEWS

기사 URL : http://www.nb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49295

저작권자 © 내외뉴스통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