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8월 12일 오후, 김영삼 전 대통령이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재정경제명령’을 발표한지 오늘(8월 12일)로 20년이 된다. 과거에도 대형 비자금 문제, 정경유착, 탈세 등의 문제들이 계속 터질 때마다 금융실명거래를 시행하려는 노력이 있었으나, 경제에 미칠 악영향과 부작용 등에 대한 우려로 인해, 이미 그 이전인 1982년 전두환 전 대통령 시절부터 전면적인 시행이 수 차례 연기된 바 있다. 결국 비밀작업반까지 꾸려 준비하여 긴급명령 형식을 빌어서야 금융실명제를 도입할 수 있었을 만큼 기득권 세력의 반대가 심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금융실명제가 도입된 지 2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비자금 문제, 정경유착, 탈세 등의 문제는 줄어들지 않고 있다. 형식적으로는 금융실명제법이 제정 및 시행되고 있으나, 내용적으로 많은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금융실명제 도입으로 인해 가명 및 허위에 의한 금융거래에 대해서는 정상적으로 규제하고 있으나, 명시적 또는 묵시적 합의에 의한 차명거래에 대해서는 규제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둘째, 금융실명거래 확인 의무를 금융기관 종사자에게만 부여하고, 명의자 또는 거래자에게는 제시 의무를 부여하지 않아 처벌이 불가능하여 사실상 차명거래를 허용하고 있다.

이 같은 문제제기에 따라, 지난 20년간 일부 국회의원들에 의해 다양한 개정 노력들이 있었다. 15대 국회에서부터 이번 19대 국회(2013년 8월 현재)까지 총 44개의 개정법률안이 제출되었으나, 본회의에서 통과된 개정안은 단 6개에 그쳤다. 이마저도 ‘어려운 법률 용어의 순화’, ‘전체 법률 개정에 따른 수정(양벌규정 수정)’ 등 금융실명제의 근본적인 개선과 관련이 없는 통과법안을 제외하면 4개로 줄어든다. 위의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해 차명거래를 금지하고 이를 위반할 시 형사처벌하는 내용을 담거나 거래행위자에게도 실명 제시 의무를 부여하는 등 근본적인 제도개선을 이룰 수 있는 개정안은 지금까지 총 10번이 제출되었으나, 6번이 폐기 또는 임기만료폐기 되고, 현재 19대 국회에서 제출된 4개 법안도 여전히 계류 중에 있다.

이처럼 계속되는 차명거래 금지 규정을 입안하는 노력들이 실패하는 이유는 가족간 차명거래 및 동문회/문중 등 임의단체의 차명거래 등 선의의 차명거래에 대한 불법화로 전 국민을 암묵적 범법자로 만든다는 논리 때문이다. 여전히 금융위원회는 이 같은 이유로 원칙적 차명거래 금지 규제에 반대의견을 피력하고 있다. 위 논리를 방패삼아 여전히 재벌과 정치인, 고소득 전문직 내지 자영업자들은 차명거래를 이용하며, 불법 비자금 조성, 탈세 등 불법 수익을 향유하고 있다. 올해만 해도, 전두환 전 대통령과 이재현 CJ 회장의 차명계좌를 이용한 불법 비자금 조성액이 천문한적인 금액으로 밝혀지고 있다. 가까운 과거에도 라응찬 전 신한금융지주 회장을 비롯,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의 경우에도 모두 대규모 차명계좌가 동원되어 수 천억, 수 조원의 불법 비자금이 조성되었다. 그리고 대다수의 경우, 이렇게 조성된 불법 비자금은 정경유착을 위한 정치인의 로비자금으로 쓰여왔다. 이 때문에 국회의원들이 오히려 금융실명제법 개정에 앞장서 나서지 않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들 정도이다.

결국 우리나라 정치·경제에 가장 큰 악영향을 끼치는 요인으로 정경유착을 꼽는다면, 그 출발이 이 같은 차명계좌를 통한 불법 비자금에서 시작된다는 점에서 볼 때, 차명거래 금지는 지하경제 양성화를 통한 건전한 경제성장과 정치·사회 문화를 조성하기 위한 첫 단추임에 틀림없다.

이처럼 금융실명제의 도입 취지를 살리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금융실명제법의 근본적인 개정이 필요하다.

먼저, 원칙적으로 차명거래를 전면 금지해야한다. 다만,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가족간 차명거래, 동문회/문중 재산 관리 등을 위한 선의의 차명거래의 경우는 예외로 두어, 사회적 혼란을 방지할 필요가 있다. 또한 이러한 예외규정을 이용하여 불법거래를 계속하는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선의의 차명거래에 대한 입증책임을 거래자에게 부과해, 규제 회피 가능성을 차단해야 한다.

둘째, 금융실명거래 의무를 금융기관 종사자(확인의무) 뿐만 아니라, 거래당사자(제시의무)에게도 부여하여 불법 차명거래에 대한 책임소재를 명확히 해야한다. 현행 차명거래 위반으로 인한 처벌은 확인의무를 해태한 금융기관 종사자에게 500만원이하로 부과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거래당사자에게 실명제시 의무가 없기 때문에 모든 책임이 금융기관 종사자에게 부과되고 있어, 차명거래 당사자에게는 전혀 책임을 묻지 못하고 있다. 이 같은 구조에서는 차명거래의 유인이 계속 작동하기 때문에, 거래당사자에게 실명 제시 의무를 함께 부과하여 책임소재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셋째, 차명거래로 인한 기대이익보다 처벌을 강화해야 근본적인 차명거래 근절이 가능하다. 그리고 차명거래가 적발되더라도, 이자수익의 90%만 과징금으로 부과할 뿐, 차명거래금액의 원금은 고스란히 보장받고 있다. 따라서 범죄로 인한 수익이 처벌 강도보다 클 때 해당 범죄는 결국 근절이 불가능함을 고려한다면, 차명거래금액 원금에 대한 강도 높은 과징금을 부과할 수 있을 때만이 차명거래의 유인에서 벗어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경실련은 현재와 같은 금융실명제법 아래에서는 차명거래 근절을 통한 건전한 금융거래 질서 확립이 불가능하다고 보며, 이에 따라 20년 전 금융실명제 도입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던 것처럼 도입 20주년을 맞아 차명거래 근절 및 금융실명제 정상화를 위한 모든 노력을 강구할 것임을 천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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