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주 시인의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라고 시작하는 시, <자화상>에는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八割)이 바람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스승의 날인 오늘 느닷없이 이 시구가 떠오르며 ‘에미는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스승이었다’며 옛적 내 처지를 슬쩍 대입해 읊조려 봅니다.

아버지 없는 집안의 4남매 중 막내, 휘어질 듯 깡마르고 푯대처럼 키만 껑충하달 뿐 존재감 없던 저를 귀히 여기고 보살펴 준 곳은 학교이자 선생님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종처럼 일하느라 밤이 깊어도 오지 않는 어머니’를 기다리던 외롭고 우울했던 날들, 그런 저를 초등학교부터 대학까지 꼭 스물 세 해를 선생님들이 따스하게 품어주며 길러 주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시거든 떫지나 말고 얽거든 검지나 말 일이지, 가난한 데다 ‘빨갱이 가족’이기까지 하니 이래저래 치이고 주눅들던 어린 시절, 학교에서나마 기를 펼 수 있게 해 주신 선생님들이 지금 생각해도 참 고맙습니다. 가정에서 챙겨주지 못하는 아이들을 보듬어 주고 성장시키는 인큐베이터, 박완서의 소설 제목처럼 ‘꿈꾸는 인큐베이터’가 될 수 있는 곳이 학교라는 것을 온전히 체험할 수 있었던 것은 제겐 큰 행운입니다.

1년 내 담임 선생님 얼굴 한번 보러 오지 못하는 어머니, 더 정확히는 촌지 한 번 쥐어줄 수 없는 가정 형편 때문에 초등학교 2학년 내내 방과 후 청소를 해야 했던 기억 (그때는 선생님이 왜 나만 맨날 청소를 시키는지 몰랐지만)말고는 선생님들과 얽힌 추억 대부분이 따스하고 더러는 빛나다 못해 황홀한 걸 보면 어쩌면 저는 8할의 은혜를 넘어 총애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이담에 커서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좀 이상합니다.

돌이켜 보면 저를 포함한 2할의 아이들을 편애하면서 나머지 8할에 대해선 냉담하다 못해 학대에 가깝던 선생님들의 이중적인 행동을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지만 그게 진짜 이유였는지 확신은 못합니다.

관악산 자락 유명한 달동네였던 ‘난곡’의 8할 아이들과 함께 학교를 다녔던 제게는 급우들에 대한 미안함과 부채감이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우리 집은 끼니를 걱정하거나 육성회비를 못 낼 정도는 아니었지만 너무나 가난했던 달동네 아이들은 육성회비가 밀리기 일쑤라 돌아가며 교단 앞에 불려 나와 선생님에게 뺨을 맞곤 했습니다. 그 친구들의 상한 자존감과 수치심, 부서진 영혼의 파편이 내 안에 고스란히 박히면서 귀 막고 눈 가리고 싶던 참담한 시간이었습니다.

식구들의 저녁 한 끼 수제비를 끓일 밀가루 값 70원을 잃어버리고 엉엉 울며 집으로 돌아가던 급우도 있었고, 끝내 육성회비를 못 내서 학교를 그만둔 친구를 동네 목욕탕에서 만나는 일도 있었습니다.

초등학교도 졸업 못하고 ‘목욕탕 때밀이’가 된 같은 반의 한 아이는 동네 목욕탕에서 나를 보자 반가운 마음에 막무가내로 돌아앉힌 채 등을 밀어주었는데, 돌아앉아 있었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그 친구에게 눈물을 보일 뻔했던 일이 지금도 안 잊힙니다.

상처로 남아 있는 가슴 저린 단상들, 내 머리를 쓰다듬던 손과 친구의 뺨을 무시로 갈겨대던 손이 ‘같은 선생님의 손’이라는 것이 몹시도 당황스럽고 죄스럽고, 무엇보다 혼란스러워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조차 품지 못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럼에도 선생님들은 여전히 제게 고마운 분들, 반듯하게 저를 키운 8할이었습니다.

세상은 변했고, 학부모도 학생도 선생님의 존재감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사회입니다. 언감생심 ‘스승과 제자’간의 공경심은 고사하고 ‘교사와 학생’간의 기본 예의조차 위태로운 지경이니 ‘스승의 날’의 존재 의의에 대해 선생님들의 자조적 한탄을 이해할 것도 같습니다.

그런 와중에 불우한 가정 환경으로 자칫 세상과 사회의 ‘미숙아’에 처해질 아이들은 늘어만 갑니다. 제게 그랬듯이 어린 것들이 본래 모습대로 성장해 갈 수 있는 학교와 선생님이라는 ‘인큐베이터’는 여전히 절실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선생님들은 무력하고 나약한 아이들을 자율적이고 주도적인 한 사람의 성인으로 새롭게 빚어내는 연금술사이자, 사랑과 관심으로 어린 영혼들과 교감하며 그들의 정체성을 형성시키는 토양입니다.

어릴 적 저처럼 ‘정서적 생존’을 갈구하는 우리 아이들은 곳곳에 너무나 많습니다. 선생님들의 사명과 역할은 어쩌면 지금이 더 소중하고 가치있는 때일지도 모릅니다.

신아연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92년 호주 이민, 호주동아일보 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거쳐 지금은 같은 신문의 편집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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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드니에서 프랑스 레스토랑 비스트로 메메(www.bistromeme.com)를 꾸리며 한민족 네트워크, 두란노 아버지 학교, 중앙일보 등 다양한 매

체에 글을 쓰고 있다.
쓴 책으로는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 공저<자식으로 산다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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