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머니, 이거 하나만 팔아 주세요.”

“지난 겨울에 샀잖아요.”

지하철 2호선 신림역, 제가 늘 타고 내리는 곳입니다. 한쪽 다리를 절고 사시가 심해 어디를 보는지 몰라 오히려 상대를 당황스럽게 하는 60대 초반 아저씨를 만나는 곳이기도 합니다.

아저씨는 한 개에 3천원짜리 옷솔을 팝니다. 옷솔로 손질할 변변한 옷이 없어서인지, 옷솔이 변변치 않아서인지 작년에 산 빨간 옷솔을 옷장 위에 그냥 올려 두었는데 오늘 또 사달라는 것입니다.

자기도 나 같이 ‘예쁘고 착한’ 각시가 있으면 좋겠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젠 얼굴도 기억 못하는 걸 보니 아마도 그때 어떻게든 옷솔을 팔려고 ‘립 서비스’를 했나 봅니다. 지금 생각하니 성희롱입니다.^^

“열차 안에서 팔지 그러세요? “

“원래 못 팔게 되어 있어요. 걸리면 쫓겨 나요.”

“그래도 다들 하잖아요.”

“....................”

연방연방 들어오고 나가는 열차로 부산하기만 한 승강장에서 제 갈길 바쁜 사람을 붙잡고 물건을 파는 게 안쓰럽지만 그렇게밖에 못하는 본인의 사정이 있을 테지요.

“오늘 하나도 못 팔았어요…”

어린애처럼 아저씨는 울상을 짓지만 저라고 별 수 있나요? 원래도 필요 없었던 옷솔을 또 살 수는 없으니까요.

저는 지하철에서 이따금 뭘 삽니다. 딱히 그 물건이 필요해서라기보다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나름의 방편인데, 물건을 매개로 옆 사람과 이야기도 하고 잠깐이나마 상인들의 ‘애환’도 듣습니다.

재미있는 점은 제가 먼저 물건을 사면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관심을 보인다는 것입니다. 우연히 몇 번 그런 걸 가지고 오지랖 넓은 착각을 하는 건지는 몰라도 여하튼 그런 일이 종종 있습니다.

상인들의 과장된 말이 아니더라도 지하철 물건은 공통적으로 싸다는 것 말고 특허를 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천태만상 아이디어가 반짝입니다.

미니 봉을 중심으로 마치 우산살처럼 드라이브, 펜치 등을 접었다 펼쳤다 할 수 있으면서 봉의 꽁무니에는 불이 들어와 어두운 곳에서도 쓸 수 있게 만든 휴대용 공구를 비롯해서, 돋보기가 필요 없는 ‘실 꿰는 강아지’, 감쪽같이 접히는 야외용 모자, 버튼을 누르면 ‘철커덕’하고 결의 방향이 바뀌는 제가 산 옷솔, 최근에는 작은 스테이플러 크기의 손 재봉틀도 선보였습니다.

러시아워가 지난 할랑한 공간, 예의 스마트 폰에 코 박고 있는 사람들 빼고는 무료하고 지루한 시간도 메울 겸, 때에 따라 재미있기도 한 지하철 상행위가 방해가 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방해는커녕 ‘지하철 쇼핑’을 잘만 활용하면 한 칸에 탄 사람들끼리 왁자하니 웃고 떠들며 잠시 잠깐 공동체가 회복되는 기미를 포착할 수도 있습니다. 저같이 좀 엉뚱한 사람이 좀 엉뚱한 역할을 시험적으로 해주기만 하면 가능한 일입니다.

그런데 ‘귀신같이’ 알고 방송이 나옵니다. ‘옷솔 아저씨’ 말대로 ‘불법 행위’ 운운하는 내용입니다. 기관사나 승무원이 모니터로 확인 했을 수도 있겠지만, 동냥은 못줄망정 쪽박은 깨지 말랬는데도 혹 누군가 전화로 고자질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방송이 나오기 무섭게 서둘러 다음 정류장에서 내리는 상인의 뒷모습을 보면 마치 내가 당사자라도 되는 양 무안하고 무참한 기분이 듭니다.

‘지하철 물건’을 요모조모 살피다 보면 이렇듯 창의적인 상품을 만들면서 소위 ‘대박’의 기대에 부풀었을 제조업자가 생각나 다시금 마음이 짠해집니다. ‘잡상인’의 손에서 헐값에 팔릴 거라면 애초부터 만들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요.

물건 자체의 운명도 기구하고, 만든 사람도 안됐고, 이리저리 쫓기며 팔러 다니는 사람도 못할 짓이고, 더 나아가 우리 모두가 불쌍한 존재인데 꼭 그렇게 비참한 기분을 들게 해야 할까 싶어 속이 상합니다. 그 사람도 한 집안의 가장이자, 한 여자의 남편이고, 아이들의 아버지일 텐데 아무리 불법이라지만 여러 사람 앞에서 무안을 주고 깔봐도 되는가 말입니다.

이런 생각으로 기분이 울적해 있는데 또 방송이 나옵니다.

“지금 어느 칸에서 싸움이 붙었다는 제보가 들어왔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되도록 화해하셨으면 좋겠습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한 표정의 승무원 얼굴이 그대로 밴 듯한 어눌한 멘트에 승객들의 웃음이 터졌습니다. 일순 우울했던 마음이 씻깁니다.

싸하고, 아리고, 공연히 눈물이 맵게 징 솟는 지하철의 서글픈 초상입니다.

신아연

이화여대 철학과를 졸업한 후 1992년 호주 이민, 호주동아일보 기자, 호주한국일보 편집국 부국장을 거쳐 지금은 같은 신문의 편집위원이다.
시드니에서 프랑스 레스토랑 비스트로 메메(www.bistromeme.com)를 꾸리며 한민족 네트워크, 두란노 아버지 학교, 중앙일보 등 다양한 매체에 글을 쓰고 있다.
쓴 책으로는 <심심한 천국 재밌는 지옥><아버지는 판사 아들은 주방보조><글 쓰는 여자, 밥 짓는 여자>, 공저<자식으로 산다는 것>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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