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뉴스통신] = 인류 역사에서 곡물 재배와 동물 사육은 가장 중요한 사건에 속한다. 수렵과 채집 생활을 하며 떠돌아다니다가 한곳에 정착하게 되면, 단점이 하나 있다. 먼 곳으로 사냥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이다. 짐승의 고기는 인류에게 여전히 중요한 식사 메뉴였다. 농경생활을 한다고 해서 고기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농경생활로 인해 이동하지 못하게 된 인간들이 비교적 만만한 야생 동물을 선택하여 길들이기 시작했고, 마침내 오늘날의 가축이 탄생하게 됐다. 대략 신석기시대부터 닭, 오리와 같은 가금류와 양을 가축화했다.

약 12,000년 전부터 사람들은 산양을 길들이기 시작했다. 터키 중심부 멜렌디즈강 연안이 오늘날 목양(牧羊)의 모태가 된 시발점으로 간주된다. 온순한 양을 목축하는 일은 비교적 쉬운 편이다. 마치 이솝 우화에 나오는 양치기 소년 이야기처럼 익숙하다. 어린아이나 나이 든 사람도 가능해 비교적 일찍부터 시작됐다.

양은 사육되면서 포식자를 피해 안전을 보장받고, 인간은 고기와 우유를 안정적으로 공급받았다. 털과 가죽뿐 아니라 끈으로 쓰이는 힘줄과 뿔에 이르기까지 온갖 귀중한 부산물을 얻었다. 소유한 양의 수는 바로 재산을 뜻했다. 양고기는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최고의 음식이었다.

■ 신라의 양탄자 기술은 페르시아가 보급했나?

예로부터 양털은 중요하게 인식됐다. 거듭된 품종개량으로 야생 양의 거친 겉털은 오늘날의 부드러운 양털로 바뀌었다. 페르시아 등 중앙아시아의 대부분 지역에서 양털은 카펫을 짜는 데 사용됐다. 마법 양탄자를 타고 날아다녔던 아라비안나이트의 ‘신드바드’는 오늘날 오만 사람이다.

8세기 경, 약 1,200년 전 신라에서 양털로 만든 양탄자는 일본 귀족들에게 최고 인기상품이었다. 당시 신라의 수출용 양탄자 50여 점이 현재 나라현 동대사 정창원에 지금까지 보관되어 있다. 나라 시대 일본의 국찰이었던 이곳은 동양 최대 불상이 있는 것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일본 고대 문헌인 ‘일본기략’(820년 5월 4일)에 따르면, 대규모 양 목장을 경영하는 신라 귀족들이 일본에 양을 전해줬다. 신라인 이장행 등이 고양(羖羊: 염소로 추정) 두 마리, 백양(白羊) 네 마리, 산양(山羊) 한 마리 등을 일본에 보냈다. 이러한 사실들은 신라 헌덕왕(재위 809~826년) 때인 820년 당시 우리나라에 여러 종류의 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그 무렵 신라가 많은 양을 키웠고, 페르시아의 제조기술을 도입하여 양탄자를 생산했음을 시사한다.

신라의 양털 제품은 매우 뛰어났다. 일본에 수출한 신라 양탄자는 캐시미어 계열의 양털로 분석됐다. 오늘날 이란과 파키스탄, 인도 북부 카슈미르(Kashmir) 지방의 캐시미어 산양의 털로 짠 고급 모직물이다. 양탄자를 만들려면 양털 가공 기술, 염색 기술, 문양 기술도 필요하다.

실크로드는 육로 말고도 바닷길이 있었다. 헌강왕(재위 875~886) 대를 배경으로 울산 개운포에 나타난 처용도 아랍인이 유력하다. 해양 실크로드의 종착역은 경주였다. 아마 식용 등을 위해 배에 양을 싣고 다니던 옛 아랍 상인들이 양과 직조기술을 신라에 전했을 가능성이 크다.

카슈미르에서 생산된 양탄자나 숄은 실크로드를 통해 유럽까지 전파됐다. 대중적으로 알려진 건 19세기 초 나폴레옹에 의해서다. 서양에서는 지금도 카슈미르보다 ‘캐시미어(cashmere)’가 더 유명하다. 카슈미르에서 산양을 많이 키우는데 이 산양의 양털이나 비단으로 만드는 양탄자가 꽤 오래전부터 명품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예 양탄자나 모직 제품의 대명사로 ‘캐시미어’라는 영단어까지 있을 정도다. 한국에서도 캐시미어는 담요나 모직코트 등 양털 제품의 대명사로 쓰인다.

■ 고려, 식용으로 양을 길렀다.

양과 관련된 우리나라의 기록은 많지 않다. 양은 한국에서 소나 돼지처럼 흔하지 않았다. 일단 산이 많고 초지가 적어 양을 키우는 데 환경이 적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내 문헌에는 없지만, 양사육에 대한 한민족 역사는 꽤 오래된 것으로 추측된다. 중국 동한(東漢: B.C 219-25년) 초, 유조(劉照)가 쓴 『석명(釋名)』이란 책에 “삼한(三韓)에 중국에서 볼 수 없는 양이 있으며, 육포를 만들어 먹는다”라고 적었다.

고구려 광개토왕의 공적을 적어놓은 비문에도 양(羊) 자가 나타난다. 광개토대왕 5년(395년), 친히 북방을 정벌해 수많은 ‘우마군양(牛馬群羊)’을 획득했다. 오늘날 내몽고 자치주에 속하는 전형적인 유목민 지역이다.

고려(918~1392년) 정종(재위 945~949년) 때는 개경 근처에서 왕실의 식용으로 양을 길렀다. <고려사>에는 1038년 12월 21일에 산양이란 글자가 처음으로 나온다. 궁중에서 개성의 만월대 동쪽에 있던 큰 호수인 동지(東池)에 흰 학과 거위, 오리, 산양 등을 애완용으로 길렀다. 1123년 송나라의 서긍이 고려를 견문하고 기술한 <고려도경>에는 양을 식용으로 사육했다고 기록했다.

1116년(예종11년)에는 요(遼: 916~1125년)의 거란족의 유민이 양 200 마리를 갖고 투항했다. 1169년(의종23년)에는 금(金: 1115~1234년) 나라에서 양 2천 마리를 보내왔다. 당시 북방 민족과의 교류로 양이 들어왔음을 알 수 있다.

1651년부터 53년(효종4년)까지 제주목사를 지낸 이원진이 편찬한 탐라지에는 1276년(충렬왕 2년) 원나라가 일본 정벌을 위해 제주도에 목마장을 설치하면서 160필의 말과 소, 낙타, 당나귀, 그리고 양을 들여왔다는 기록이 있다.

양이 상서로운 짐승이니 만큼, 양꿈은 길몽으로 대접받는다. 이성계의 일화가 대표적이다. 이성계가 꿈속에서 양을 잡으려 하자 뿔과 꼬리가 모두 떨어져 나갔다. 이야기를 들은 무학대사는 이성계가 왕위에 오르리라고 해몽했다. 양(羊)에서 뿔과 꼬리를 떼니 곧 왕(王)이 된다는 것이었다.

■ 돼지꿈 대신에 ‘양 꿈’꾸고 왕이 된 이성계

조선 초기에는 양이 제수용으로 쓰기에도 많이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1411년(태종11년)에는 사람을 요동에 보내어 제사에 쓸 양을 바꾸어 오게 했다. 이듬해 8월 14일, 태종은 “양은 제물로 쓰기 위해 기르는 것이니 궁중의 잔치에는 쓰지 말라”라고 명했다.

그 무렵 궁중에서 기르던 양은 총 500마리 정도에 불과했다. 민간에서 양이 보편적으로 사육된 기록은 1419년(세종1년) 8월, 명나라에서 보낸 양 1,052마리를 관리들에게 나누어주면서부터다.

1497년, 연산군은 양 3마리를 대궐 인정전에 풀어 놓아 대신들이 기겁하기도 했다. 명종 등 조선 중기에는 여의도 등에 양목장을 두어 양을 길렀다. 중종 11년(1516년)에는 한양 안에서 방목해 기르는 양이 너무 많아 제한을 둔다는 칙령을 내렸다. 병자호란 이후 1645년 경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가져온 소와 양을 평안도의 여러 고을에 나눠주기도 했다. 그래도 양은 한반도에서 기후가 맞지 않아 잘 키워지지 않았다.

일본은 1930년대에는 우리나라 북부 지역 농민들에게 양 사육을 강제했다. 전쟁 물자를 강탈하기 위해서였는데 이를 남면북양 정책(南棉北羊 政策)이라 부른다. 현재도 북한 개마고원에서 많이 키우고 있다.

『일본서기(日本書紀)』에 따르면, 599년에 백제가 낙타 한 마리, 나귀 한 마리, 흰 꿩 한 쌍과 함께 양 두 마리를 일본에 보냈다. 820년 신라가 양을 보내기 220년 전이었다. 일본은 이것을 양 사육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일본은 상상의 동물인 용보다 양이 되려 낯선 짐승이었다. 19세기 후반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정부가 군복 제작에 필요한 양모를 생산하기 위해 홋카이도에서 대규모로 양을 사육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 잠이 오지 않을 때 양을 세는 이유?

성경에는 양이 인용된 이야기가 약 500번 나온다. 아담과 하와가 낙원에서 추방된 후 낳은 카인과 아벨 형제가 제물을 바친다. 농부였던 카인은 하나님이 자신의 곡식보다 목동인 동생 아벨의 양을 기쁘게 받자 격분한다. 질투심에 카인은 동생 아벨을 죽인다. 이 이야기는 농경민과 유목민의 갈등을 담고 있다. 성경의 인물이 활약하는 공간적 배경은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양과 염소를 가축으로 길들인 지역이다.

다윗 왕은 양치기 시절 거인 골리앗을 죽였다. 조선말 개화기 때 서양 선교사들이 기독교를 포교하기 위해 선한 목자와 양 이야기를 했다가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해 난감해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조디 포스터 주연의 명작 영화 '양들의 침묵'또한 성경 구절에서 모티프를 따왔다.

잠이 오지 않을 때, ‘한 마리, 두 마리…’하고 양을 세는 민간요법이 있다. 왜 하필 양일까? 양(sheep)이 수면(sleep)과 음이 비슷해 만든 영어의 언어유희가 그 유래라고 한다. 푸른 들판에서 양과 뛰어 노는 일은 마음을 안정시키고 평화롭게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셰퍼드’ 하면 군견이나 경찰견을 떠올린다. ‘셰퍼드’는 원래 ‘양치기’란 뜻. 이름 그대로 전에는 주로 목양견(牧羊犬)으로 기르던 개였다. 이 개를 사역견(使役犬)으로 개량한 것은 19세기 독일에서다.

양치기에서 나온 것에 또 골프가 있다. 예전 양치기들은 긴 지팡이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팡이 끝이 우산대 모양으로 구부러져 있었다. 이것은 원래 목양견을 데리고 양을 쫓으면서 양의 뒷다리를 걸어 잡는데 쓰던 도구였다. 양치기들이 이 지팡이로 토끼 굴에 돌을 처넣은 것이 바로 오늘날 골프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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