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흔히 국정(國政)이란 말을 씁니다. 말 그대로 국가의 정사(政事)를 의미한다고 하겠습니다. ‘국가의 정사’란 말은 고풍스러운 만큼 오늘날에는 그 뜻이 좀 막연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 헌법에 ‘국정’이란 말이 들어간 조문은 입법부에 관한 조항 중 국정감사와 국정조사를 규정한 조항(제 61조), 그리고 행정부에 관한 조항 중 국무총리에 관한 규정(제 87조 2항, 국정에 관하여 대통령을 보좌), 국무회의에 관한 규정(제 89조의 1. 국정의 기본계획), 그리고 국가원로자문위원회에 관한 규정(제 90조 1항, 국정의 중요한 사항) 등입니다. 그러나 헌법에는 용어의 뜻에 대한 설명이 없으므로 국정이 무엇인가는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저의 상식으로는 ‘국가의 정사’는 넓은 의미의 정부, 즉 입법, 행정, 사법의 3부(三府)가 하는 일을 다 포괄하는 것으로 봅니다. 이 중 행정부가 하는 일만을 국정이라고 할 수는 없을 터인데 의도적인지 아닌지 우리 헌법은 일응 그런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헌법에는 없는 말이나, 언론을 포함한 사회 담론에서 ‘국정의 최고책임자’ 또는 ‘국정의 책임자’라는 말이 쓰이고 있으며 특히 전자는 대통령을 지칭하는 경우가 보통입니다. 흔히 써오던 전자에 비해 후자는 덜 쓰이는 편이지만 딱히 누구를 ‘국정의 책임자’로 지칭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민주화 시대에 아마도 ‘국정의 최고책임자’라는 말이 당사자에게 얼마큼은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할 것입니다. 언젠가 대통령의 말씀 중에 ‘국정의 최종책임자’란 말이 나오기도 한 것으로 압니다. ‘국정의 책임자’ 또는 '국정의 최종책임자'라는 말이 나오게 된 것은, 대통령 외에 정치권에도 국정의 책임이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권위주의 시기라면 국정의 최고책임자, 즉 대통령이라는 등식이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

크게 보면 민주사회에서 국정에 대한 책임은 국회, 행정부, 사법부에 나뉘어져 있으며, 광의의 정부에 속하는 모든 공직자가 국정에 대한 책임을 진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국정의 최고 책임’이 어디에 있는가에 대해서는 보다 면밀하게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3권이 분립된 정부형태에서 어느 부(府)에 최고 책임이 있는지를 일률적으로 재단(裁斷)하기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권한이 가장 큰 곳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고 하는 상식을 택한다면 저는 대통령보다 오히려 국회가 국정의 최고 책임을 가진 기관이라고 봅니다. 법치국가에서 국정은 입법부가 만든 법의 바탕 위에서 운영되는 것이므로 입법권이 있는 국회가 국정에서 최고의 권한과 책임을 갖는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헌법이, 대통령은 국회를 해산할 수 없지만 국회는 대통령을 포함한 다른 2부(二府)의 최고위급 공직자들을 탄핵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나아가 국정감사권과 국정조사권, 그리고 국무총리와 장관들을 수시로 국회에 출석시킬 권한까지 있으므로 국회는 국정의 최종 감독권을 행사한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대통령도 행정부의 수장으로서 국정을 직접적으로 통할(統轄)하는 자리에 있으므로 막강한 권한과 책임을 가진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통령을 국정 최고책임자로 인식하는 분위기에서는 국회가 그 권한과 책임을 다 하지 못해도 별 문제가 아닌 것처럼 넘어가기 십상입니다. 또한 모든 국정 사안이 다 대통령의 책임으로 치부되고 국회는 별로 책임이 없다는 식이 되고 맙니다. 대통령책임제 국가이니 대통령에게 최고의 책임이 있는 게 맞지 않느냐, 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영어사용권에서 대통령책임제니 내각책임제니 하는 헌법 용어에 실제로는 책임이란 말이 들어가지 않음에 유의해야 합니다. 전자는 그냥 대통령제 또는 대통령중심제(presidential system), 후자는 의원내각제(parliamentary system)라고 할 뿐입니다.

우리는 세월호 사건 같은 복합적 요인에 기인한 국가적 재난을 겪으면서 나라의 온 시선이 대통령 한 사람에게 쏠리는 것을 보아 왔습니다. 마치 대통령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국정이 잘못된 데 대한 일차적 최고 책임은 물론 대통령에게 있겠지만 국정을 감독하는 국회의 책임도 막중합니다. 대의민주주의에서 주인인 국민의 위임을 받아, 결국은 피고용자에 불과한 공직자들을 감독하는 것은 국회에 주어진 기본적인 책무입니다. 감독하는 사람이 제대로 안 해서 일이 잘못되어도 그 책임을 전적으로 피고용자에게 지우는 것은 자가당착(自家撞着)일 뿐 아니라 뻔뻔스러운 책임회피입니다. 국회는 응당 해야 할 국민안전과 부패사슬 방지를 위한 입법도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공무원들이 잘만 했으면 이런 탈이 없었겠지만 평소에 사고 예방을 위한 입법도 제대로 하지 않고, 공직자들이 잘못 하는 것을 제때에 감시 감독하여 바로잡지도 못한 국회의 책임이 실로 크다고 하겠습니다.

대통령은 세월호 관련 담화에서 최종적인 책임은 본인 스스로에게 있다고 자인하는 한편 여러 가지 개혁조치와 함께, 여야와 민간이 참여하는 진상조사위원회 설치를 포함한 특별법 제정을 주문했습니다. 이는 국회와 민간이 함께 함으로써 독립적이고 공정한 진상조사를 할 수 있도록 하는 매우 적절한 방식이라 생각됩니다. 사실 9·11 이후 미국 의회처럼 우리 국회가 먼저 나서서 이런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하기로 했다면 더욱 좋았을 것입니다. 이런 거대한 국정 사안이야말로 바로 국회가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국회는 힘들고 골치 아프고 책임질 일은 피해가는 습성이 생긴 모양입니다. 또 무슨 큰 일이 터지기만 하면 야당은 전가의 보도인 양 국정조사라는 칼을 흔들며 기실은 정략에 올인하는 듯합니다. 그럼으로써 사실상 국회는 늘 기능마비 상태에 놓이게 됩니다. 국민의 대표인 삼백여 명의 ‘최고 엘리트들’이 기능마비에 처하게 되는 것이야말로 우리 정치의 무능이자 낭비요, 국민에 대한 배신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국회에 대한 이런 주문이나 주장은 늘 있어 왔지만 한 번도 실현되지 못했고 또 실현될 기미도 보이지 않는 것이 뼈아픈 우리 정치의 현실입니다. 이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앞서 든 헌법적 혼미(昏迷)도 그 하나라고 봅니다. 지금의 헌법 구조와 그간 쌓인 행태로 볼 때, 국회는 마치 국정의 책임에서 제외된 듯이 행정부에 호통 치고 뒷북만 치는 역할에 머무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국회는 주인인 국민을 대신하여 그 권한에 상응하도록, 공무원은 물론 그 누구보다도 큰 책임감을 가지고 더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회기라는 구태의연한 틀을 벗어나 3백6십5일 상시 국회를 열어 항시 국정을 감독하면서 국태민안을 위해 노심초사해야만 국민의 삶이 안전하고 윤택해질 것입니다.

국민이 바라는 진정한 책임정치는 국회가 국정의 중심에 서야만 구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시대에 맞지 않는 헌법을 손질할 필요가 그 어느 때보다도 절실하다고 봅니다. 지금처럼 대통령을 위시한 공무원에게 국정을 내맡기고 국회는 뒷짐 지고 있는 비헌법적인 상황을 탈피해야 합니다. 저는 이 시대의 우리 국민 수준에 맞는 정체(政體)가 대통령중심제일 수는 없다고 봅니다. 권한과 권위가 대통령 한 사람에게 쏠림으로써 정작 중심에 있어야 할 국회와 정당이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입니다. 많은 선진민주주의 국가들처럼 정당이 국정을 책임지는 의원내각제가 바람직하지만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해서, 외교와 국방을 대통령이 맡고 내정은 국회가 선출하는 총리와 총리가 선정하는 의원들이 맡는 이원집정제가 적합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게 돼야 공무원에게 맡겨진 국정이 국민의 대표인 국회로 돌아오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