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언제부터 해삼을 먹었을까? 아마 전 세계에서 처음 해삼을 먹은 사람은 함경도 일대에 살았던 구석기인으로 추정된다. 구석기 후반 함경도 해안의 사람들이 해삼을 채취해 소금에 절여 구황식품으로 먹었다고 한다.

해삼의 뜻이 ‘바다인삼’인 것 역시 한반도와 만주에서 자생하는 고려 인삼과 연관있다. 아시아에서 해삼같은 젤라틴 음식을 즐기는 지역이 바로 한반도와 연해주, 만주일대인 점이 그 근거다.

우리 선조들은 예로부터 해삼을 대표적인 보양 식품의 하나로 다뤘다. 해삼은 면역력을 강화하고 고혈압과 동맥경화 등 성인병에 좋다. 겨울철 몸이 허할 때 먹으면 감기에 안 걸리고, 수술한 환자에겐 더욱 좋다. 몸통 잘린 해삼에 곧 새살이 돋는 것처럼 말이다. <동의보감>에서도 임산부와 태아를 편하게 해주고 자양강장과 혈액순환에 좋다고 기록했다.

해삼은 참으로 고마운 음식재료다. 5억 년 동안 오로지 바다의 생명력을 지켜왔다. 눈도, 머리도 없이 단순하게 생긴 해삼은 바다 생태계에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촉수로 바다 밑바닥에 깔린 모래 진흙을 삼켜 유기물을 섭취하고, 배설물 내보내기를 반복하며 바다를 정화한다.

체중 50g인 해삼 하나가 연간 빨아들이는 모래와 진흙의 양은 무려 3.5kg에 달한다. 해삼이 ‘바다의 청소부’라고 불리는 이유다. 그러나 해삼은 이제 동아시아의 바다 연안에서 점차 사라지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어류 남획과 전 세계적인 기후변화로 바닷속 환경이 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5억년부터 바다를 지켜온 해삼. 해삼은 서구세력이 아시아에 들어오기 전부터 한중일 국가 간 교역의 길을 터주고, 다양한 음식 문화를 가능하게 했다. 문명사적 관점에서 신기하기 이를 데 없는 해삼의 생태와 교류의 역사를 알아보자.

■ 바다의 인삼이라 부르는 해삼(海蔘)

우리나라에서 해삼이나 멍게는 포장마차나 대폿집의 안줏거리로 쉽게 먹을 수 있는 서민 해산물이다. 횟집에선 광어·도다리를 시키면 서비스로 나오는 게 흔한 해삼이다. 말 그대로 바다에서 나오는 인삼이라서 해삼(海蔘)이다. 그런데 산삼·인삼에나 붙는 ‘삼蔘’이란 이름이 왜 이 못생긴 수중 생물에 붙었을까?

해삼이 몸에 좋은 이유는 ‘불로불사(不老不死)’에 있다. 해삼은 재생능력이 아주 강하다. 해삼의 몸통을 딱 절반으로 가르고 수조에 넣어두면 한 달 후, 절단했던 자리는 아물고 2마리가 된다. 반 토막을 내도, 내장을 빼내도 죽지 않는 해삼의 재생력은 놀랍다. 그래서 외계인이 실험하다 바다에 버려서 사는 외계 생명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생겼다.

특히 해삼의 내장 속에는 사포닌(saponin)의 일종인 홀로톡신(holotoxin) 성분이 많다. 인삼의 대표적인 약효 성분이 바로 사포닌이다. 보통 물고기에게는 독이 되지만, 인간에게는 매우 유익하다. 해삼을 재생시키는 골편 조직과, 다른 해양 생명체들은 먹지 않는 해삼의 사포닌이 인간에게는 최고의 보양식이 되는 것이다.

‘인삼과 산삼 위에 해삼’이라는 말이 그냥 나온 게 아니다. 일찍이 괴이하게 생긴 해산물인 해삼에 ‘삼蔘’자를 붙인 조상의 지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해삼은 몸통부터 내장까지, 버리는 것 없는 알뜰한 먹을거리다. 한중일 해삼 요리는 삼국삼색(三國三色)이다. 같은 해삼을 두고도 삼국의 먹는 방법은 전혀 다르다. 한국은 주로 갓 잡은 싱싱한 해삼을 바로 썰어 회로 먹는 것을 선호한다. 하지만 조선 시대 궁중에서는 말린 해삼을 사용한 해삼탕과 해삼 찜을 자주 차렸다. 우리 선조들은 원래 건해삼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1670년대 쓰인 안동 장씨의 <음식디미방>은 가장 오래된 한글 요리책이다. 여기에서도 중국처럼 말린 해삼을 이용한 찜과 볶음 요리가 등장한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대부분 해산물 요리에는 보관과 운반에 쉬운 말린 것과 소금에 절인 것을 사용했다. 마치 ‘안동 간고등어’가 유래한 것처럼 내륙이라는 지역적 특색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일본은 해삼의 껍데기를 먹지 않는다. 대신 해삼 ‘창자 젓(고노와다)’과 해삼 알집을 따로 모아 말린 ‘고노코’ 등 내장을 이용한 요리가 발달했다. 고노와다는 성게 알(우니)를 비롯, 숭어의 알집을 소금에 절여 말린 ‘카라스미’와 함께 ‘일본의 3대 진미’로 꼽히는 귀한 음식이다.

예전에는 전량을 일본에 수출해 고급 일식집에서나 맛보던 ‘고노와다’는 요사인 쉽게 접하기에 많이 알려졌다. 중국인들은 말린 해삼을 선호한다. 유통의 문제점 등으로 말린 해삼을 오래 조리해온 역사에서 비롯된다. 대신 중국의 해삼요리는 뜨거운 불과 기름을 이용해 가장 화려하다. 이렇듯 삼국의 해삼 요리 문화가 전혀 다르게 발전한 데에는 역사 문화적인 배경이 있다.

■ 중국에서 최고의 산해진미로 꼽힌 해삼

중국인에게 해삼은 어떤 음식일까? 해삼은 우리나라에서는 흔한 수산물이지만, 중국에 가면 신분이 급상승한다. 고급 요리의 대명사인 상어 지느러미(샥스핀)와 어깨를 나란히 한다. 전복보다 훨씬 비싸다. 중국에서 해삼은 원숭이 골, 상어 지느러미와 함께 3대 진미이자, 황실 항연 요리의 최고로 꼽혔다. 해삼과 인삼은 둘 다 불로장생에 도움이 된다고 여겨 중국인들이 환장했던 음식재료이자, 약재였다.

중국에는 ‘약보(藥補)보다는 식보(食補)’라는 말이 있다. 음식으로 보신하는 게 약으로 보신하는 것보다 낫다는 뜻이다. 중국인들은 특히 해삼이 남자에게 좋은 보양식으로 믿었다. 남삼여포(男蔘女鮑)란 사자성어가 있는데 남자에겐 해삼이, 여자에겐 전복이 좋다는 의미다.

중국의 해삼 선호도는 지역마다 조금 차이가 있다. 양쯔강 이북의 북방인들이 해삼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반면 남방인들은 전복을 더 좋은 보양식으로 여겼다. 그러다가 강남 출신 주원장이 명나라를 세우면서 북경을 수도로 삼았다.

세월이 지날수록 전통적인 강남의 음식재료와 북방의 식문화가 결합했다. 해삼요리가 중국 전역에 퍼진 계기가 된 것이다. 실제 중국 식문화의 천하 통일을 이룬 것은 해삼요리인 셈이다. 특히 청나라 시절부터 해삼은 소수 층에 국한하지 않고, 사회 전반에서 광범위한 입맛을 얻게 됐다.

그때부터 중국이 조공을 받거나 교역을 하는 데 비단과 맞바꿨던 최고의 물품은 해삼이 차지했다. 동남아에서 나는 향신료를 유럽에서 진귀하게 여긴 것처럼, 동북아의 주요 교역상품은 조선의 인삼과 일본의 해산물이었다.

수분이 대부분인 해삼은 말리면 무게가 95%까지 줄어든다. 그리고 다시 물에 담가두면 원래 크기로 돌아온다. 다른 해산물과 달리 해삼은 내장을 빼내고 말렸다가 다시 물에 넣어도 원형 그대로 복원되는 특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마른 상태에선 무게도 가볍고, 쉬 상하지도 않으므로 교역품목으로 안성맞춤이었다. 게다가 해삼을 말리면 미역이나 다시마처럼 요오드가 훨씬 많아진다. 광대한 영토에 비해 바다가 적은 중국에서 해삼은 최고의 음식재료로 환영받았다.

■ 중국 비단과 맞바꾼 해삼

17세기 도쿠가와 막부 시대 일본은 비단을 대량 소비했다. 그러나 당시 비단은 중국에서 수입해야 했다. 일본은 비단을 얻기 위해 금과 은을 수출했지만, 산출량이 줄면서 곧 소진됐다. 막부는 다시마, 상어지느러미, 전복 등 해산물 수출에 눈을 돌렸다. 대중국 수출품으로 압도적 비중을 차지한 것이 해삼이었다.

도쿠가와 막부에서 말린 해삼은 통화정책과 물가정책의 주요 수단이 됐다. 대략 1695년부터 막부는 일본 내에서 해삼의 판매나 유통을 엄격히 통제했다. 일본에서 생산된 모든 해삼은 일단 나가사키 항으로 모았다. 어민들은 함부로 사고팔 수 없어 합법적인 거래가 불가능했다.

일본에서 해삼 고노와다 요리가 발달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해삼이 워낙 귀했기에 특수계층만 먹을 수 있었다. 일반인은 건해삼을 만들고 남은 내장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이 때문에 일본에서는 해삼 내장을 이용한 요리 문화가 오히려 경지에 이르렀다.

한 통계를 보면 1744년 나가사키에 모여 중국으로 수출된 건해삼의 총량은 약 190톤이다. 언뜻 190톤이라면 별것 아닌 것처럼 여겨지지만, 말린 해삼이라는데 주목해야 한다. 해삼이 들어가는 중국요리를 할 때 그것을 다시 물에 불려서 쓰는데, 10배로 늘어난다. 190톤의 해삼은 실제 어마어마한 분량이다.

■ 해삼에 담긴 문명과 무역 교류사

말린 해삼을 다시 물에 불려 먹는 곳은 중국뿐이다. 동남아시아, 태평양 멜라네시아 제도의 숱한 나라와 지역에서 생산된 말린 해삼이 중국으로 유입됐다. 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필리핀 등으로 퍼져나간 화교 집단의 주요 거래 품목 역시 해삼이었다. 필리핀을 통치하던 스페인은 대중국 시장 수출을 위해 해삼을 수집했다.

영국도 동남아 몇몇 국가에서 해삼을 긁어모아 중국에 수출했다. 1818년 ‘파트나 아편’이라는 값싸고 중독성 높은 아편을 중국에 공급하기 이전까지 주력 수출상품은 해삼이었다. 해삼은 또한 고래잡이 포경과 함께 호주의 식민화를 주도했다. 유럽의 식민주의자들은 오늘날 호주 퀸즐랜드가 위치한 북부 해안에 배를 보내 중국과의 주요 교역품인 해삼을 채집했다. 심지어 호주 원주민 애보리진(Aborigine)에게서도 해삼을 구했다.

19세기 중반 태평양에서는 제국주의의 영토 분할이 시작됐다. 신흥 강국 독일은 미크로네시아 지역으로 관심을 돌렸다. 헬른스하임 등의 상사가 팔라우를 비롯해 각지에 영업소를 열었다. 가장 교역량이 많은 상품은 해삼이었다. 건해삼을 만드는 데는 해삼 값보다 땔감 비용이 많이 들기도 했다. 피지 섬 해삼산업의 호황기인 1828년부터 7년 동안 50만 세제곱 피트(ft3)의 나무가 연기로 사라졌다.

2차 세계대전 태평양전쟁 중, 남양군도와 동남아 일대에 진출한 일본 상인의 주요 관심사는 해삼 채취와 가공이었다. 해삼 속에는 아시아와 오세아니아 지역 수많은 어민들의 역사가 묻혀있다.

■ 조선 시대 서해에 중국 황당선이 출몰한 이유?

해삼은 대부분 얕은 바다에서 볼 수 있다. 하지만 옛날부터 우리나라에서 잡히는 것이 품질이 좋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도 주요 산지를 언급할 정도였다. 우리나라 해삼은 삶으면 금세 퍼져버리는 동남아 해삼과는 달리 돌기가 또렷하고 육질이 탱탱해 상품(上品)으로 통한다.

해삼을 좋아하는 중국에서는 당연히 조선 해삼의 인기가 높았다. 그중 동해안에서 나는 해삼을 가장 으뜸으로 쳤다. 중국으로 떠나는 사신이 반드시 챙겨야 할 필수품목 중의 하나였다. 워낙 선호도가 높다 보니, 사신 일행이 경비를 충당하거나, 현지에서 선물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중국과 조선 사이에는 사신단을 통한 공무역 형태 말고도, 사무역도 성행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서 보이듯, 조선 후기부터는 중국에 대한 예단 품목으로 말린 전복, 해삼 등이 상당 부분 포함됐다.

1642년(인조20) 10월 28일 <인조실록>에서 청나라 장수 용골대의 혼사에 보내는 뇌물 품목 중 해삼 10두(斗)를 찾아볼 수 있다. 개인에게 바치는 뇌물로는 상당한 양이라고 할 수 있다. 1793년(정조17) 11월 17일 실록에는 잠상(潛商)으로 불린 의주의 밀무역 상인들이 보따리에 해삼과 다시마를 넣고 국경을 넘나든다는 기록이 있다. 해삼과 다시마의 밀무역 양이 상당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하게 한다. 청나라의 부족한 해삼 수요를 밀무역을 통해 채워준 셈이다.

조선 중기 이후, 서해에는 ‘황당선(荒唐船)’이라는 중국 불법 어선이 횡행하면서 서남해안의 해삼을 싹쓸이하다시피 했다. 1734(영조10) 5월 6일 실록에는 청나라의 불법 어선(황당선)이 해삼을 몰래 잡아가는데 대처를 잘못했다는 이유로 황해도 병사 민사연을 파직시켰다고 기록했다.

영조 치세 때 해삼 채취 등 불법어업에 나선 청나라 선박은 최소 10여 척에서 최대 100여 척 규모로 움직였다. 100여 척이라면, 선원만도 최소한 1천여 명에 달해 커다란 함대 규모나 마찬가지라는 이야기다. 그때도 중국 선원들은 조선 관원의 단속에 대비해 칼과 창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오죽 황당했으면 그들의 배를 ‘황당선’이라고 불렀을까. 영조는 해안에서 중국 선박과 밀무역하는 백성에 대해 선참후계를 지시하기까지 한다. 예나 지금이나 중국 불법 어선의 폐해는 매우 심각하다. 일제 강점기 동해안과 울릉도에는 많은 일본인이 몰려와 해삼과 독도 바다사자를 마구잡이로 싹쓸이해갔다.

■ 전 세계 해삼 90% 먹는 중국, ‘국민스타급’ 대접

한중일 동북아 바다는 ‘해삼 벨트’이기도 하다. 중국의 산둥반도에서 우리나라의 가거도, 제주도, 독도를 아우르며 일본의 홋카이도로 이어진다. ‘해삼 벨트’에서는 세계적으로 가장 식용 가치가 높은 1등급 돌기 해삼이 생산된다. 중국인은 이 돌기에 영양분이 몰려있다고 생각한다. 이곳에서 나는 고급 해삼엔 돌기가 선명하다.

따뜻한 바다에서 자란 해삼은 대부분 돌기 자체가 없고, 하품(下品)으로 분류된다. 열대에서 나는 해삼은 탄력이 떨어져 요리하면 흐물흐물해지고, 씹히는 느낌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적도 근처로 갈수록 생선회가 쫄깃쫄깃하지 않고, 푸석푸석한 것과 같은 이치다.

홋카이도는 일본 해삼의 전초기지다. 홋카이도에 살던 일본 소수민족 아이누족은 해삼 착취를 위한 가장 큰 피해자였다. 지금도 ‘6열 돌기’ 홋카이도산 해삼은 인도네시아산의 20배 값에 팔린다. 현재 중국 내에서 최고급 품종으로 분류된다. 홍콩은 세계 최대의 해삼 유통지다. 싱가포르나 홍콩의 건어물시장에서는 일본 건해삼이 가장 상등품으로 평가받는다.
 
중국은 전 세계 해삼의 90%를 소비한다. 최근 중국 경제가 발전하면서 급속도로 부자가 늘어났다. 입맛이 고급화되면서 중산층까지 해삼을 즐겨 먹기 시작했다. 가격 또한 10년 만에 20배 가까이 치솟았다. 자연산 고급 건해삼은 500g 한 상자에 600만 원을 넘나든다. 고급 해삼 세트는 중국 고위층에게 명절 때 줄 선물용으로 잘 팔린다.

■ 무더위에 중국 해삼 집단 폐사, 해삼 가격 폭등 전망

최근 몇 년간 국내 해삼 업체들은 중국 정부의 반부패, 사치품 규제 정책으로 수출이 줄어큰  타격을 받았다. 중국 공안 당국이 관료의 비리와 호화 접대에 대한 대대적인 단속을 벌이면서 스위스 시계, 고급 양주와 함께 해삼까지 뇌물로 여긴 탓이다. 그런 와중에 시진핑 주석 집권 초반 강하게 내건 부정부패 척결 분위기가 사그라들면서 해삼 밀수는 여전히 줄지 않고 있다.

중국은 해삼 소비가 급증하자 전남 진도군에 대규모 해삼 양식장을 조성하는 등 해외 어장 개척에 나섰다. 돈 냄새를 맡은 일본은 글로벌 수산 기업을 내세워 해삼 사업에 뛰어들고 있다. 우리나라 바다는 삼면이 맑고 차다. 해삼의 메카로 발돋움할 무궁무진한 기회가 열려있다. 정부에서도 해삼을 수출 전략품목으로 선정할 정도다. 안면도 등 몇 군데에 해삼 섬을 조성하는 등 수출용 해삼 양식 단지를 만들고 있다.

중국의 최대 해삼 생산지는 다롄(大連)과 웨이하이(威海) 등이다. 이곳에서는 올여름 지독한 폭염으로 해삼이 집단 폐사하면서 68억 9000만 위안(1조 1300억 원) 가량의 손실이 발생한 것으로 집계됐다. 중국 중앙방송(CCTV)은 다롄시 양식장의 해삼 90%, 랴오닝(遼寧) 해삼의 50% 이상이 폐사했다고 보도했다. 당분간 해삼 가격은 급등할 것으로 관측된다. 진정한 한중일 ‘해삼 삼국지’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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