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낙타는 생소한 동물이다. 하지만 역사를 더듬어보면, 낙타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대부분 고려 개국초 우리나라에 첫선을 보인 것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 낙타는 고구려 때부터 등장한다. 고구려는 수나라와 한창 전쟁을 하던 무렵 일본과 우호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해 왔다. 전형적인 원교근공(遠交近攻). 가까운 나라는 치고,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와는 동맹을 맺는 게 기본 병법이기 때문이다. 백제와 신라는 581년 수나라가 통일을 하자마자 신속하게 교섭을 추진했고, 오히려 대(對) 고구려 공동전선을 도모했다.

595년에는 승려 혜자(慧慈)가 일본의 실권자였던 성덕태자의 스승이 되어 정치개혁에도 참여했다. 그 무렵에는 숱한 승려와 사절단 등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법륭사 금당 벽화를 그린 것으로 유명한 담징은 610년 채색 도구·종이와 먹 등을 일본에 전했다. 예전 국어 교과서에는 소설가 정한숙의 <금당벽화>가 실렸다. 소설 속 담징은 수나라와 전쟁 중인 조국을 걱정하다가 승전 소식을 듣고서 벽화를 그렸다. 아마 승려이자 화가였던 담징은 최대한 일본의 지원을 얻거나 중립을 관철시키는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고구려는 을지문덕 장군의 활약으로 589년부터 618년까지 연거푸 수나라의 대대적인 침공을 물리쳤다. 그리고 수나라가 멸망한 직후 618년 8월 낙타를 포로 2명과 함께 일본에 보냈다. 고구려가 승리했다는 사실을 천하에 과시하는 한편, 일본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시키려는 의도였다. 고구려가 일본에 보낸 낙타는 수나라와 오랜 전쟁에서 대승을 거둔 것을 상징하는 선물이기도 했다.

그로부터 50년 후, 668년 나당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가 망하자 당나라는 전리품을 챙긴다. <구당서>에 따르면, 수십만의 고구려 유민, 수레 1,080대, 소 3,300두, 말 2,900필 등과 함께 ‘낙타 60마리’도 포함됐다. 숫자는 적지만 낙타가 전리품 목록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아마 몽골의 쌍봉낙타일 듯하다. 오늘날에도 몽골 지역에서 고구려의 성터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 의자왕의 마지막 한 수, 백제가 일본에 보낸 바둑판

599년(법왕1년) 백제에서 낙타 한 쌍, 당나귀 한 마리, 양 두 마리, 흰 꿩 한 마리 등을 보냈다는 『일본서기』 기록이 있다. 일본 황실 보물 창고 <정창원>에서는 백제 의자왕이 선물한 바둑판을 보물로 간직 중이다. 바둑판 표면은 스리랑카 자단 나무로 만들어졌다. 윗면은 코끼리 상아를 이용해 세밀하게 줄을 쳤다.

옆면은 곱게 채색한 상아조각을 이용해 낙타, 악어, 아라비아 상인 등을 페르시아 스타일로 새겼다. 눈을 뗄 수 없는 화려함에 1400년 전 최고의 기술력까지 더해진 바둑판인 것이다. 바둑판 옆면에는 낙타를 부리는 사람, 공작과 여러 새, 코끼리 모습이 그려져 있다.

낙타는 백제와 접촉한 중국 왕조나 인도와 교류한 페르시아에서는 흔한 짐승이었다. 바둑판에 낙타가 새겨진 것이나, 바둑통에 코끼리가 새겨진 배경은 둘 중 하나다. 백제가 해외 무역으로 이런 동물들을 손에 넣었거나, 백제인이 중국이나 인도에서 낙타를 본 다음 그 생김새를 바둑판에 새겼으리라고 볼 수 있다.

백제가 남긴 최고의 유물인 금동 대향로에서도 코끼리와 악어를 볼 수 있다. 한반도에 없는 동물들이 조각되었다는 것은 백제와 동남아시아, 인도 간의 교류가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으로 활발했음을 보여준다. 부여박물관에서는 출토된 코끼리 다리 모양 벼루를 전시중이다. 백제 사람들이 코끼리나 악어, 낙타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는 증거다. 중국 윈난성이나 동남아에 살던 아시아 코끼리가 백제 시대에 선물로 왔을 가능성이 높다.

백제 멸망을 3년 앞둔 657년(의자왕17년) 백제는 일본에 낙타, 당나귀, 앵무새를 보냈다. 당시의 정황에 비추어 순수한 선물이라기보다, 일본과 전략적 동맹을 다지기 위한 동물 외교의 일환으로 해석된다.

신라 또한 일본과 다양한 외교적 노력에 분주했다. <일본서기> 647년 조에 “신라의 김춘추가 앵무새 한 쌍과 까치 한 쌍을 가져왔다”라는 기록이 뒷받침한다. 일본에는 원래 말, 소, 호랑이, 표범, 양, 까치가 없었다. 일본에는 한국산보다 몸집이 큰 까마귀는 엄청 많아도 까치는 거의 없다. 한국과 가까운 규슈의 사가현(佐賀縣) 정도에만 서식하며, 몸집도 한국산 까치보다 매우 작다.

671년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 일본과 관계 개선을 시도했다. 아찬과 사찬 등 신라 사절단은 울산항을 통해 일본에 금, 은, 철, 솥, 비단, 실크, 삼베, 가죽, 말, 개, 노새, 낙타 등 10여 종을 가져갔다. 그 낙타는 고구려나 당과의 통일 전쟁 때 전리품으로 획득했을 것이다.

■ 고려와 거란이 벌인 ‘낙타 전쟁’

고려 942년(태조 25년) 거란은 낙타 50마리를 보내면서 수교를 제의했다. 하지만 발해의 멸망 등 거란에 반감을 갖고 있던 왕건은 단호히 거부했다. 사신 30명은 섬으로 귀양 보내고 낙타는 굶겨 죽였다. 50년 후, 이 일을 구실로 거란(요나라)은 군사를 일으켜 3차례나 고려로 쳐들어왔다. 거란과 불편한 관계는 거란이 여진족이 세운 금(金) 나라에 멸망하는 1125년까지 약 100년간 계속됐다.

고려 의종과 충렬왕(1276년) 연간에는 제주도 수산평(水山坪) 등 군마를 기르는 목장에서 말과 함께 사육됐다. 낙타는 주로 짐을 싣는 수단으로 이용했다. 고려 26대 충선왕은 태조 왕건이 낙타를 죽인 것에 대해 좋지 않은 평가를 내렸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모두 30여 차례에 걸쳐 낙타가 나온다. 1486년(성종17) 9월, 성종은 명나라로 떠나는 사신에게 낙타를 사 오라고 명을 내린다. 낙타는 무거운 짐을 싣고 먼 길을 갈 수 있으니, 전쟁 때 낙타를 이용해 양식을 나르게 할 요량이었다. 또 동물 매니아였던 성종의 궁금증도 덧붙여졌다.

당시 호조판서이던 이덕량은 북방 국경의 야전 사령관으로 재임 시 여진족 정벌에 직접 참전한 적이 있었다. 이덕량은 아마 낙타의 전략적인 가치가 말보다 훨씬 우세하다는 사실을 경험하고, 이를 성종에게 건의한 것 같다. 그러나 대사헌 이경동 등은 낙타를 굶겨 죽인 고려 태조 왕건의 일화를 언급하며 반대했다. 성종은 결국 낙타 수입을 포기했다.

1617년(광해군 9년) 4월 23일, 요동의 명나라 장수 구탄이 낙타를 보내왔는데, 광해군은 이 낙타를 대궐에서 길렀다. 그런데 그해를 넘기기 전에 낙타가 죽어 버려 사육을 맡은 관리를 벌주었다. 1627(인조5년)과 1635(인조13년)에는 신흥 강국으로 부상한 후금이 낙타를 보내왔고, 이를 다시 일본에 선물로 보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청나라 사신이 버리고 간 낙타, 숙종이 대궐에 들이다.

1695년(숙종 21년) 4월에는 청나라 사신이 버리고 낙타가 장안의 화제가 됐다. 청 사신이 조선에 올 때는 낙타에 짐을 싣고 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때는 국경 지방인 의주에 낙타를 두었다가, 서울에 가서 임무를 마치고 청나라로 돌아갈 때 다시 데려갔다. 그러다가 병이 걸린 낙타 한 마리를 조선에 버려두고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궐에서 일하던 노비가 그 낙타를 사서 서울로 몰고 왔다. 거리에 낙타가 나타나자, 사람들이 구경하기 위해 구름 떼같이 몰려들었다. 아마 노비는 낙타를 보여주고 돈을 받았을 것이다. 한 마디로 대박이 난 것이다.

낙타에 대한 소문은 구중궁궐 속 숙종의 귀에까지 들렸다. 숙종이 누군가. 역대급 못 말리는 애묘가 이자, 조선왕조 최초 ‘퍼스트 캣 금손’의 집사가 아니던가. 색다른 동물에 호기심이 생긴 숙종은 사람을 보내 몰래 대궐로 낙타를 끌어왔다.

숙종은 낙타를 대궐에 오래 두고 보고 싶었다. 하지만 신하들이 심하게 반대했다. 숙종은 어쩔 수 없이 낙타를 대궐에서 내보내야 했다. 청나라 사신이 버리고 간 낙타는 그 뒤에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실록’에 기록이 남아 있지 않으니까.

■ 연암 박지원이 본 낙타는?

연암 박지원은 1780년(정조4) 청나라 사신 길에 개인 자격으로 동행했다. 영안교 건너 심양을 지나면서는 깜빡 졸았다. 그때 몽골인이 몰고 가는 낙타를 지나쳐 버려 몹시 아쉬워했다. 호기심 많고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연암은 하인에게 낙타 생김새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하인 창대는 “그걸 말로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 발굽이 두 쪽이어서 말이라고 하기 어렵고, 머리에 뿔이 없으니 소라고 하기도 어렵고, 양과 얼굴은 닮았지만, 털이 곱슬곱슬하지 않고, 또 등에 두 개 혹이 있으니 양도 아니고, 거위처럼 머리를 들고 장님처럼 눈을 떴습니다.”라고 했다.

연암은 “낙타가 틀림없다”면서 “앞으로 처음 보는 것이 나타나면, 비록 잠자거나 먹을 때도 반드시 알려달라”고 단단히 일렀다. 결국 연암은 8월 17일 연경을 거쳐 북쪽 열하의 피서산장(여름 별장)에 이르는 길에서 낙타를 만나게 된다.

“낙타가 수천, 수백 마리씩​ 떼를 지어 짐을 싣고 갔다. 털은 짧고, 머리는 말처럼 생겼는데 조금 작으며, 눈은 양과 같고, 꼬리는 소와 같다. 가려고 할 때는 반드시 목을 움츠렸다가 드는데, 그 모습이 마치 날아가려는 백로와 같다. 무릎은 두 마디이고 발굽은 양 갈래이다. 걸음걸이는 학처럼 발을 떼고, 거위와 같은 소리를 지른다.(『열하일기』 환연도중록 8월17일)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연행길에 본 코끼리에 대해서는 후한 점수를 줬지만, 낙타는 탐탁지 않게 평가했다. “기르기 매우 어렵고, 비록 물건을 실어 나르려 해도 집이 낮고 좁아 드나들기 어려워 낙타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물건이다.”

■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 낙타의 눈이 슬퍼 보였던 이유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은 창경궁이 일제에 의해 동물원(창경원)으로 전락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순종은 “낙타란 동물의 눈이 참으로 슬퍼 보이지 않는가”라며 한숨을 쉬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실제 낙타의 눈은 슬퍼 보인다. 세상에 낙타 눈보다 더 순수하고 착하게 보이는 눈은 없다. 그래도 아마 진짜 슬퍼 보였던 것은 순종이었을 지도 모른다. 대궐이 헐린 자리를 차지한 동물들을 바라보는 순종의 심경은 누구보다 복잡했을 것이다.

창경궁은 성종이 즉위 15년(1484)에, 당시 생존했던 선왕 세조·덕종·예종의 비(妃)인 정희·소혜·안순왕후를 위해 지은 궁궐이다. 창경궁은 임진왜란 때 경복궁과 함께 불에 탄 뒤 다시 지어져 조선 후기 역사의 중심 무대가 됐다. 여러 왕이 창경궁에서 태어났으며 취선당에서 주로 살았던 장희빈이 처형을 당한 곳도 창경궁이다. 영조는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둔 다음 궁궐 안의 선인문 안뜰에 여드레 동안이나 두어 죽게 했다.

창경궁은 순종이 즉위하고 나서 일제에 의해 크게 훼손됐다. 일제는 전각을 헐어버리고 진귀한 동물과 식물들을 방방곡곡에서 채집해서 옮겨 놓고, 일본에서 벚꽃 나무 수천 그루를 날라다 심었다. 궁의 이름도 창경원으로 바꾸었다. 원(苑)은 사냥이나 놀이를 즐기는 곳이니 궁궐을 유원지로 격하시켜버린 셈이다. 이렇게 해서 동양 최대의 동·식물원이라며 창경원의 문을 연 것은 1909년 11월 1일이었다.

창경원 동물원은 1910년 한일병합 직전인 1909년 일반에 개방됐다. 광복 후에도 유지되다가 1980년대 들어 옛 모습을 되찾았다. 남양주에 조성된 유릉에는 쌍봉낙타와 코끼리 모양 등의 석상이 순종을 지키고 있다.

“낙타의 눈을 본 적이 없지? 그놈들의 큰 눈은 항상 젖어 있다구. 메마른 사막 한가운데서 그래도 젖어 있는 건 낙타의 눈뿐이야. 낙타는 결코 따로 울지는 않지만 말이야” 1991년 영화로도 만들어진 김한길 원작의 <낙타는 따로 울지 않는다> 한 대목이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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