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 전에 필자가 고발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였습니다. 당시 불법 노점상을 취재하고 있었는데 단속에 적발된 노점상이 “왜 우리 같은 힘없는 사람만 취재합니까? 더 큰 도둑들 앞에서는 한마디도 못하면서 왜 우리들처럼 하루 벌어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만 법을 지키라고 합니까?”라고 거세게 항의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몇 분 후 노점상의 흥분이 가라앉았을 때 필자는, “높은 사람들이 법을 지키지 않으니 나도 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논리는 말이 안 됩니다.”라고 말하긴 했지만 마음 한 편에 남아있는 찝찝함은 20년이 지나도 가시지 않고 있습니다.

1990년대 중반, DHEA라는 항산화 작용을 하는 건강보조식품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 때였습니다. 이 DHEA를 복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자 DHEA를 제조하는 외국 공장에서 DHEA 알약 수십만 정을 받아서 여행 가방에 몰래 집어넣고 입국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당시 중국에도 이 DHEA를 제조하는 공장이 있어서 중국에서 입국하는 여행객들의 짐도 검색 대상이 되었습니다. 공항 세관으로 실태 취재를 나갔을 때였습니다. 중국에서 입국하는 한 중년 남자의 여행 가방에서 이상한 느낌이 감지되어 검색을 하게 되었는데 뜻밖에도 여러 봉지의 참깨가 나왔습니다. 다행히 DHEA는 아니었으나, 참깨는 가공되지 않은 농산물이라서 검역을 받아야 통관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 분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는지 그냥 가지고 들어온 거였습니다. 참깨를 담은 봉투가 너무 많이 나오는 모습을 보고, “아휴, 웬 참깨를 이렇게 많이 가지고 들어오셨어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분이 “제가 음식점을 하는데 중국에 여행을 가서 보니 참깨가 너무 싸길래 욕심이 나서 사왔네요. 죄송합니다. 이 참깨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하며 황급히 자리를 떠나는 거였습니다. “아니에요. 검역 받고 통관하실 수 있으면 가지고 들어가셔야죠.”라고 얘기를 했지만 제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분은 제 시야에서 멀어졌습니다.

기분 좋게 여행을 다녀오면서 하필 입국장에서 방송사 취재팀을 만난 그분은 아마 아직도 그때의 수치스러움을 잊지 못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방송사 카메라가 자신의 짐을 검색하는 장면을 다 담았기 때문에 불안한 마음도 무척 컸을 겁니다. 필자는 지금도 그때 그 장면을 떠올리며 ‘내가 좀더 신중하고 배려심이 있었어야 했는데’라고 생각하며 후회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잘못한 점은 분명히 있었지만 자신의 잘못보다 훨씬 더 많은 벌을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방송에는 나가지 않았지만 촬영을 했다는 그 자체가 그분의 명예에 큰 손상을 주었을 것입니다.

당시 필자는 잘못한 사실에만 초점을 맞춰서 촬영을 진행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옳은 줄만 알았습니다. 그래야만 세상이 올바르게 변하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에는 중국 여행을 다녀오면서 참깨를 여행 가방에 하나 가득 가지고 들어온 그분에게 미안한 감정이 조금 있긴 했어도 ‘그래도 잘못을 했으니 자업자득 아닌가?’하는 마음이 더 크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몇 해가 지나고 나서 그분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척 보기에도 법 없이도 살 것 같아 보이는 소심한 모습으로 카메라 앞에 서서 ‘미안합니다’라는 말을 떨리는 목소리로 연거푸 하던 그 모습이 제 머리 속에 무시로 떠올랐습니다. 혹시나 그분이 그 후, 그 일로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리지는 않을까 걱정이 됐습니다.

고발 프로그램을 3년 하고 나서 고등학교 동창모임에 나갔습니다. 친구들이 제 모습을 보며 건넨 첫 말이 “너, 화나 보인다.” “너 형사 같아 보인다.”였습니다. 친구들의 말은 제게 큰 충격이었습니다. 인상이 좋다는 말을 많이 듣던 편이었는데 이제는 인상이 무섭다는 말을 듣게 된 거였습니다. 환경이 변하면 사람의 인상도 달라진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습니다. 험한 현장에서 몸으로 부대끼며 따지고 묻는 일을 주로 하다 보니 배려와 이해심이 부족하게 되고 이러한 내면의 변화가 외모에 비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때 ‘나는 왜 고발 프로그램을 하고 있나?’라고 스스로 물어봤습니다. 일을 하다 보면 그 일을 왜 하는지에 대한 생각보다는 늘 해오던 일이니 그냥 하던 대로 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나는 왜 고발 프로그램을 하고 있나?’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필자는 일상의 함정 속에 빠져버린 자신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안타깝게도 ‘그냥 내게 주어진 방송이니까 고발 프로그램을 하고 있다’ 였습니다. 고발 프로그램으로 세상이 좀더 살기 좋은 곳으로 변하길 바라는 마음은 부차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냥 하루하루 프로그램을 만들어 다음 날 방송하는 것이 가장 큰 목표였던 거였습니다.

우리는 어제 같은 오늘을 사는 것에 매우 익숙합니다. 그러다 보면 시야는 좁아지고 오직 내가 해야 할 일만 눈에 보입니다. 남에 대한 배려와 정의로운 사회에 동참하려는 마음은 자리할 틈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저 ‘내 일만 잘하면 됐지 그게 애국하는 길이지’라는 생각으로 살게 됩니다. 흔히 말하는 관행이라는 것도 어제 같은 오늘을 살기 때문에 생겨나고 고착화됩니다. 전관예우나 관피아 문제 역시 어제 같은 오늘을 살았기 때문에 해결되지 못한 것입니다.

‘어차피 떠들어봐야 원래대로 돌아갈 텐데 뭣 때문에 내 공력을 낭비해?’ 적폐를 근절하자는 당연한 주장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는 머리 속에만 가득하고 실제로 행동에 나서는 노력은 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행을 위한 노력을 해야 현실과 이상의 괴리를 체감하게 되고 이를 통해서 실현 가능한 목표를 세울 수 있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총리 후보로 지명됐던 안대희 씨의 낙마를 보며 불현듯 들었던 생각은 ‘우리의 이상에 부합하는 인물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라는 것이었습니다. ‘능력이 있는 인물이라면 인사청문회를 통과 못할 것이고 인사청문회를 통과할 수 있는 인물은 능력이 없는 인사일 것이다’라는 웃지 못할 얘기가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현실은 개천가에 머물고 있는데 기대치는 구름 위를 떠돕니다.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사람이 총리가 되면 이 세상이 단번에 바뀌게 될까요?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세상이 어느 순간 문을 열면 바로 펼쳐질 거라고 믿는다면 감나무 아래서 입을 벌리고 있는 한심한 사람과 다를 바 없습니다. 10년 후에 우리가 안대희 후보의 낙마가 옳은 선택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혹시 ‘현실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이상만 쫒은 것은 아닌가?’ 하는 뒤늦은 후회를 하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국가란 국민입니다.” 영화 변호인의 명 대사입니다. 그런데 국민이 어제 같은 오늘을, 오늘 같은 내일을 계속 살아간다면 국가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단번에 적폐와 단절할 수 있다는 안이한 생각도 버려야 합니다. 정권이 바뀌어도 이 혐오스러운 적폐는 계속 이어져왔기 때문입니다. 국민의 의지로 자유를 쟁취했던 유럽과 미국 사람들은 중산층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부정과 불법에 저항할 것'을 두고 있습니다 . 지난 수십 년 동안 우리처럼 열심히 잘살아온 나라도 드물 겁니다. 그런데 나만 잘사는 것에 지나치게 치중했습니다. 비리에 침묵하고 거대 권력의 힘에 순응하며 자신의 영달을 좇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세상은 점점 더 각박해지고, 염치없는 일들이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게 됐습니다. 이제는 알아야 할 때가 됐습니다. 우리 각자가 단순히 내 일만 열심히 잘하는 것만으로는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내일은 지방선거를 하는 날입니다. 국민이 제대로 주인이 되는 날입니
박상도

SBS 아나운서. 보성고·연세대 사회학과 졸업
美샌프란시스코주립대 언론정보학과 대학원 졸업
현재 SBS TV 토요일 아침'모닝와이드'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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