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에서 원숭이 한 마리가 포획됐다. 이 원숭이는 지난 3일 마취총을 맞고 달아나서 다시 사흘 만에 잡혔다. 대전 한복판 보문산 자락에 도대체 무슨 영문으로 일본원숭이가 나타난 걸까. 어느 곳에서도 원숭이 탈출 신고가 없어, 개인이 불법으로 길렀던 걸로 추측됐다. 이 원숭이를 잡기 위해 경찰과 119 소방 구조대가 나섰다가 허탕을 치기도 했다. 눈치 백단에, 날쌔기까지 한 원숭이를 잡는 건 쉽지 않다. 일본원숭이는 추위에 강하다. 자칫하면 사로잡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수도 있었다.

이에 앞서 지난 9월 대전 오월드 동물원에서 퓨마 한 마리가 탈출했다. 이 퓨마 ‘뽀롱이’는 결국 엽사에게 사살돼 논란이 많았다. 또 지난 8월, 청양 칠갑산 자연휴양림에서 탈출한 일본원숭이도 마취총을 맞았지만 달아났다가 17일 만에 사살됐다.

4월에는 서울 북한산에도 원숭이가 출몰했다. 깜짝 놀란 주민의 신고를 받고 관계당국이 여러 번 출동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신출귀몰한 녀석을 잡기 위해 특수 제작된 이중 포획틀까지 투입됐다. 심지어 원숭이를 유인하기 위해 암컷 원숭이까지 동원했다. 무려 5개월간 야단법석 끝에 8월 31일, 녀석을 간신히 붙잡았다. 처음에는 동남아 게잡이 원숭이인 줄 알았는데, 잡고 보니 멸종 위기종 히말라야 원숭이였다. 또 송곳니를 뭉툭하게 갈아놓는 등 학대했던 흔적이 보였다. 더 놀라운 건 누군가의 관리를 받았던 듯 목줄까지 차고 있었다. 애완용이나 재주부리기 목적으로 기른 것으로 보인다.

■ 원숭이 재주를 볼 수 있는 고구려 벽화 장천 1호분

흔히 원숭이는 재주와 ‘끼’를 상징한다. 세계적으로 동물 재주부리기는 보편적 놀이문화다. 그중 원숭이 재주부리기는 역사가 매우 오래된 종목의 하나다. 동물 재주부리기의 기원은 원시 인류의 수렵과 목축 활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를 바탕으로 동물 조련에 필요한 경험을 쌓았을 것이다.

우리 역사 속에서 동물 재주부리기 모습을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장천(長川) 1호 벽화다. 대략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고구려 무덤으로 추정된다. 벽화에서 원숭이 한 마리는 큰 나무에서 내려오고 있다. 다른 한 마리는 나무 가장자리에 앉아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장천 1호분에서는 원숭이 말고도 매와 사냥개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꿩을 잡기 위해 날고 있는 매의 동작을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길들인 매를 활용한 매사냥인 것이다. 원숭이 재주부리기가 벽화에 등장할 정도로 인기 있었던 점에 비추어볼 때, 고구려에서는 다른 동물 공연도 성행했을 가능성이 높다.

원숭이 등을 다루는 남녀 놀이꾼은 서역을 거쳐 고구려로 들어온 집시 계열 유랑 집단의 한 뿌리라는 해석도 있다. 원래 인도 유랑 민족이었던 집시는 중·근세 이후 서아시아와 유럽 각지로 뻗어나갔다. 그리곤 특유의 감각적인 춤과 음악으로 유럽의 기층문화 형성에 이바지했다.

고려와 조선시대에도 각종 진귀한 동물의 유입과 관리가 꾸준히 이어져 왔다. 중국과 일본을 통해서 원숭이, 코끼리는 물론 앵무새와 공작 등 진귀한 새들이 유입됐다. 조선시대에는 왕실과 양반 계층에서 취미로 다양한 애완동물을 사육했다.

■ 우리나라 최초의 서커스단인 동춘서커스단

조선 후기가 되면서 다양한 공연 문화가 꽃피웠다. 조선 후기 탈춤에서는 원숭이가 많이 등장한다. 양주 별산대 놀이나 봉산탈춤, 강령탈춤 등에 나오는 원숭이는 대부분 사회 지도층 인물의 비행을 풍자와 해학으로 조롱하는 대목이다. 장이 서는 저잣거리에서는 원숭이 재주 부리기가 인기 있었다.

원숭이 곡예는 당시 중국에서도 크게 유행했다. 베이징에 사신으로 갔던 대부분 연행사들이 개나 원숭이 곡예를 즐겨 관람하고 이를 기록으로 남겼다. 원숭이 공연 모습은 연암 박지원 보다 15년 앞서 1765년 베이징에 간 홍대용의 <연기>에서도 볼 수 있다.

홍대용은 주인의 채찍질에 쉬지 못하는 원숭이를 가여워한다. 당시 베이징에는 동물 곡예로 생업을 삼는 자들이 상당수 있었던 듯하다. 곡예 하는 원숭이는 호손(猢猻), 원숭이 공연을 ‘후희(猴戱)’, 원숭이 조련사는 희자(戱者) 또는 ‘농후자(弄猴者)’라고 불렸다.

대개 한자로 긴꼬리원숭이는 ‘원(猿)’, 긴팔원숭이는 ‘후(猴)’라고 표현한다. 긴팔원숭이는 꼬리가 없다. 대신 팔이 다리보다 길다. 긴팔원숭이는 원숭이(monkey)가 아니다. 오랑우탄처럼 유인원(ape), 즉 인간에 속하는 영장류다.

같은 한자는 없다. 예를 들어 개와 원숭이처럼 사이가 안 좋은 것을 일컫는 ‘견원지간(犬猿之間)’에서는 원숭이 ‘원(猿)자’를 쓴다. 원숭이라는 단어는 긴꼬리원숭이 종류인 원(猿)과 유인원 종을 일컫는 성(猩)을 합친 ‘원성이’에서 나왔다.

손오공은 중국의 판다와 함께 2대 보호동물로 지정될 만큼 희귀한 ‘황금 원숭이’를 모델로 삼았다고 한다. 그러나 황금원숭이는 긴꼬리원숭이 종류로 꼬리가 있다. 손오공 모델이 황금원숭이라는 말은 거짓이다. 손오공은 자신을 ‘미후왕(美猴王)’이라 칭했다. 꼬리가 없는 긴팔원숭이(유인원) 종류이다. 중국의 황금원숭이는 손오공의 모델이 아니다.

일제 강점기 출현한 서커스단은 동물 공연이 주축이었다. 1960년~1970년대만 해도 서커스단의 최대 호황기였다. 전국적으로 최소 20개의 서커스단이 활동했다. 동춘서커스단의 경우 한때 코끼리, 말, 호랑이, 개, 원숭이 등 수많은 동물 공연이 성행했다. 동춘서커스단은 지금도 추억과 향수로 기억된다.

■ 일본의 원숭이 쇼 ‘사루마와시(猿回し)’

일본에서 원숭이 쇼는 ‘사루마와시(猿回し)’라고 한다. 원숭이를 뜻하는 ‘사루’와 돌기를 뜻하는 ‘마와시’를 합친 말이다. 전통 희극 ‘가부키’와 함께 일본에서 가장 오랜 전통문화 중 하나이자, 동물이 등장하는 연희이다.

일본에서는 설날 사루마와시를 집으로 불러들이는 풍습이 있었다. 원숭이는 전염병과 악령으로부터 말을 지켜주는 상징적인 동물로 여겼다. 정월에 원숭이를 외양간이나 마구간 앞에서 춤을 추게 한 것이 사루마와시, 즉 원숭이 재주부리기의 시초다.

인도 북부에서는 ‘말의 병은 원숭이 머리 위에 다 모인다’라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원숭이를 말의 수호신으로 여긴다. 지금도 원숭이를 마구간 지기로 여기는 인식이 남아 있다. 원숭이가 다른 동물에 없는 영적인 힘이 있는 동물로 여긴 인도의 문화는 중국으로 전해졌고, 이를 증명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가 바로<서유기>다. 손오공이 부름을 받고 천계(天界)로 올라가는데, 그때 처음 주어진 직책이 말을 지키는 일, 즉 ‘필마온(弼馬温)’이었다.

일본에서는 전쟁이 빈번했던 터라 말은 없어서는 안 될 무기이자, 전쟁 물품을 옮겼던 중요한 운송수단이었다. 따라서 전염병으로부터 말을 지키기 위해 원숭이 재주가 자주 행해졌다.

원숭이를 키울 형편이 없는 집은 원숭이 두개골이나, 원숭이 형태 나무 장식을 걸어두기도 했다. 이 당시만 해도 원숭이 재주부리기는 공연보다는 주술적인 색채가 강했다. 원숭이는 재주꾼이 아닌 주술사 또는 악령을 쫓아 정화하려는 음양사(陰陽師)와 같은 존재의 의미가 컸던 것이다.

닛코 도쇼쿠(東照宮)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당이자, 유네스코 세계유산이다. 이곳 신큐사 마구간에는 말의 건강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 건물 정면에 5마리, 오른쪽에 3마리 등 도합 8마리 원숭이 조각상 산자루가 유명하다.

■ 18세기 한양 저잣거리에서 대박 난 ‘원숭이 버스킹’

1792년 4월 24일 정조는 규장각 문신들에게 한양의 풍경을 그린 ‘성시도’를 보고 시 한 편을 사흘 안에 써낼 것을 명한다. 시를 제출하자 정조는 등수를 매겼다. 당시 규장각 검서관이었던 박제가(1750-1805)는 2등을 했다. 그는 생동감 있는 거리와 시장에 주목했다.

박제가가 정조의 명을 받고 지은 시 ‘성시전도응령(城市全圖應令)’에서는 조선 후기 한양의 시장에서 벌어진 원숭이 재주부리기, 장대타기, 줄타기, 인형극 등의 전통연희를 실감 나게 묘사했다. 그가 본 원숭이는 사람처럼 절하고 꿇어앉기도 한다. 사람처럼 행동하도록 조련한 탓이다. 이는 흥미진진한 구경거리였다. 원숭이는 장대를 타거나, 사람을 놀래주는 등 흥행을 위해서 꼭 필요한 존재였다. 쇼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한 셈이다.

“꼭두각시 무대에 올라오자/ 동방에 온 사신은 손뼉을 친다/ 조그만 원숭이는 아녀자를 깜짝 놀라게 해/ 사람이 시키는 대로 절도 하고 꿇어도 앉네.”

18세기 이상적인 한양의 모습을 그린 ‘태평성시도(太平城市圖)’에는 원숭이가 장대를 타는 장면이 있다. 그림 속 원숭이 두 마리는 줄을 매고 높은 장대에 오른다. 원숭이를 부리는 조련사 ‘농후자’ 옆에는 염소 두 마리가 보인다. 마지막에는 아마 원숭이가 염소 등에 올라타고 온갖 재주를 펼쳐 보였을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상업 활동 전에 하는 공연은 많은 사람의 이목을 끌기 위한 방법이다. 한양 저잣거리에는 이같은 원숭이 거리 공연이 성행했다.

■ 원숭이 버스킹으로 빌어먹는 거지 ‘농후개자(弄猴丐子)’ 이야기
 
18세기 조선의 기인 열전으로 불리는 <추재기이>란 책이 있다. 거리에 앉아 판소리를 하여 먹고사는 장님 악사, 팔뚝만 한 검은 돌을 맨주먹으로 깨는 차력사 등 조선 후기의 거리 풍경이 오늘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특히 <추재기이>속에 나오는 일지매 이야기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소설, 만화, 영화, 드라마로 인기리에 각색되고 있다. 의적이 재물을 훔치고 매화 한 가지를 남긴다는 스토리다. 추재 조수삼은 당시 조선 사회의 응달에서 살아가는 '마이너리티'들을 조명하면서 연민과 동정, 찬탄과 긍정의 시선을 보냈다.

등장인물 71명 가운데 농후개자(弄猴丐子), 즉 원숭이를 구경시켜 빌어먹는 거지 이야기가 나온다. 그는 벌이가 시원치 않아 거지 행색을 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이유가 원숭이를 몹시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구경꾼이 감탄하며 돈을 낼 만큼 기묘한 재주를 선보이려면 원숭이를 혹독하게 조련해야 했다. 하지만 농후개자는 한 번도 원숭이에게 채찍을 들지 않았다. 또 날이 저물어 집에 갈 때면, 아무리 피곤해도 원숭이를 항상 어깨에 올려놓고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거지가 병에 걸렸다. 원숭이는 눈물을 흘리며 곁을 떠나지 않았다. 구걸을 못하게 된 거지는 결국 굶어 죽었다. 거지를 화장하려 하자, 원숭이는 절하며 돈을 구걸했다. 모든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겼다. 불이 바야흐로 섶에 미치어 활활 타올랐다. 원숭이는 한참 서러운 울음소리를 내더니 불길에 뛰어들어 주인을 따라갔다. 원숭이의 평균 수명은 대략 30년이다. 농후개자와 원숭이는 진정 함께 살아가는 동료였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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