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 달 사이 대전과 청양, 서울에서 잇따라 원숭이가 출몰해 화제다. 대전과 서울에서는 다행히 사로잡혔지만, 청양에서는 엽사에게 사살됐다. 원숭이 하면 떠오르는 구전동요가 있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라는 노래다. 어릴 적 여자애들은 이 노래에 맞춰 고무줄놀이를 했다.

하지만 모든 원숭이 엉덩이가 그런 것은 아니다. 일부 원숭이는 파란색 등 다양한 엉덩이 색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 원숭이는 흑백을 제외한 색을 구분하지 못한다. 일부 원숭이만이 색을 구별한다.

원숭이 엉덩이가 빨개지는 이유는 번식과 관련 있다. 암컷 개코원숭이는 번식기가 되면 엉덩이 색이 빨갛게 변한다. 암컷 침팬지도 엉덩이가 붉어지지만, 고릴라나 오랑우탄은 전혀 변화가 없다.

‘원숭이 엉덩이는 빨개~’는 일본원숭이에서 유래했다. 얼굴과 엉덩이가 빨간 것이 특징이다. ‘긴꼬리 원숭이과’에 속하지만, 꼬리는 10cm 안팎으로 매우 짧다. 온천욕을 즐겨 ‘겨울 원숭이(Snow Monkey)’로 불린다.

원숭이가 바나나를 좋아한다는 것도 속설에 불과하다. 일부 원숭이만이 자연에서 나는 바나나를 먹을 뿐 대다수는 바나나가 나지 않는 지역에 살고 있다. 지난 10월 초 대전 보문산 송학사 인근에 나타난 원숭이를 잡기 위해 대전 남부소방서 119구조대와 경찰이 출동했다.

그러나 20m 높이 나무 꼭대기에 앉아 있는 원숭이를 구경만 해야 했다. 처음엔 마취총 대신 그물을 준비했다. 나무 밑동 쪽에 등산객이 던져 준 것으로 보이는 바나나가 있어서였다. 그런데 원숭이는 본체만체하다 모습을 감췄다. 원숭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은 자몽이다. 원숭이는 잡식성이다. 사람 입맛에 맞춰 당분이 많은 개량된 바나나는 원숭이에게 해롭다.

■ 원숭이가 가장 좋아하는 과일은 바나나가 아니라 자몽

원숭이(Monkey)는 사람과 가장 가까운 동물이다. 영장류(Ape) 동물 중에서 유인원인 고릴라, 오랑우탄, 보노보, 침팬지를 제외한 나머지를 원숭이라고 부른다. 유인원은 외형적으로 팔이 길고, 꼬리가 없는게 특징이다.

원숭이는 인간과 유전자의 93%를 공유한다. 침팬지는 인간과 유전적으로 1.6% 차이가 난다. 원숭이는 몸무게 80g도 안 되는 아기여우 원숭이에서 200kg이 넘는 고릴라까지 모두 200여 종에 달한다. 가장 작은 ‘피그미 마모셋’은 15㎝ 정도. 아마존 열대 우림에 산다. 아프리카 ‘맨드릴 개코원숭이’는 1m에 이른다. 가장 큰데다가, 선명한 붉은색 코가 위협적이다.

전 세계 원숭이 중 절반은 심각한 멸종 위기에 처했다. 중국과 동남아 접경, 열대우림이 사라지는 남아메리카에 사는 원숭이들이 가장 큰 위협을 받고 있다. 24종은 사실상 멸종 단계에 접어들었고, 아시아 원숭이 65종 가운데 71%는 보호가 절실하다.

■ 우리나라 옛 문헌 속 원숭이

원숭이는 우리에게 친숙한 동물이다.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동물 순위에서 항상 앞자리를 차지한다. 동물원 원숭이 우리 앞은 늘 어린이들로 북적인다. 그런데 원숭이가 과거 한반도에도 널리 서식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원숭이는 <삼국유사>에 문헌상 처음으로 등장한다. 신라 법흥왕 14년(527년) 때다. 당시 불교를 섬겼다는 이유로 이차돈을 처형하자 ‘원숭이들이 떼 지어 울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백제의 궁중 정원인 부여 궁남지나 통일신라시대 경주 안압지는 원숭이 등 진귀한 동물을 풀어놓고 길렀다. 백제 금동대향로에도 원숭이와 코끼리, 악어, 사자 등이 새겨져 있다.

경주 괘릉과 김유신 장군의 묘를 지키는 12지신상 호석(護石)에서도 원숭이를 볼 수 있다. 원숭이 상(像)이나 토우 등은 통일신라시대 무덤의 부도, 고분벽화, 석관 등에도 보인다. 모두 불교가 전래된 이후의 유물이다.

고려 시대에는 귀족이나 부유한 집에서 원숭이를 길렀다. 고려 1170년, 정중부가 무신란으로 일컫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당시 19세였던 이인로는 피신해 불문(佛門)에 귀의했다가 환속했다. 그 무렵 이인로는 이상향으로 알려진 지리산 깊은 곳의 청학동을 찾아 나선 적이 있었다. 그러나 끝내 청학동은 찾을 수 없었다. 별수 없이 시 한 수를 바위에 남기고 돌아섰다. <파한집>에 실린 시의 내용은 이러하다.

“지팡이 움켜쥐고 청학동을 찾으려 애썼지만/ 첩첩한 숲속에 원숭이 울음소리뿐”

시 구절 속에 뜬금없는 원숭이 울음소리가 등장한다. 이인로(1152~1220)는 정말 원숭이 울음소리를 들었던 것일까? 당시에도 원숭이가 있었을까? 단지 관용적인 표현으로 원숭이 울음소리를 운운하기에는 이해하기 어렵다.

■ ‘잰납이’는 원숭이를 이르는 말

원숭이에 관한 글은 비슷한 시대 문인 이규보(1168 ~1241) 또한 남기고 있다. 그가 상서(尙書) 벼슬을 하는 기상서 집에 갔더니 성난 원숭이가 있었다. “원숭아, 너는 무엇 때문에 화가 났냐/ 사람마냥 바로서서 나만 보고 야단이니/ 네 고향 파촉의 달빛이 그리우냐” 또 조강부(祖江賦) 라는 시에 “원숭이 울음 구슬픈데, 해는 서산에 걸렸네”라는 의미 깊은 표현을 남겼다. 이규보는 무신정권에 아부한 해바라기성 인물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선시대 <관동별곡> 등으로 잘 알려진 가사문학의 대가 송강 정철은 원숭이를 소재로 다루기도 했다. 그 유명한 권주가인 <장진주사>에서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잔 먹세 그려... 잰납이 휘파람 불제”라는 시구를 썼다.

여기서 ‘잰납이’는 원숭이를 이르는 말. 지금은 ‘잔나비’라고 쓴다. ‘날쌔다’라는 뜻의 동사 ‘재다’와 ‘원숭이’라는 우리말 ‘납’을 합쳤다. 십이지에서 원숭이를 지칭할 때, ‘납 신(申)’자를 쓴다. 그런데 정철은 자신이 원숭이 소리를 들은 것이 아니라 당나라 시인 두보의 시를 인용한 것이다.

송강 정철에 바로 앞서, 중종 때 문신 어숙권은 <패관잡기>에서 “동국(東國ㆍ조선)에는 원숭이가 없으므로, 고금의 시인들이 원숭이 울음소리를 표현한 것은 모두 틀렸다”라고 일갈했다.

■ 선사 시대 한반도 누볐던 원숭이, 왜 자취 감췄나?

우리나라에서 원숭이 흔적은 구석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반도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는 원숭이 유적을 통해 옛 기록보다 더 명확한 증거가 속속 나온다.

1973년 6월 충북 제천시 송학면 용두산 점말 동굴에서 지금은 사라진 짧은 꼬리 원숭이 뼈가 나왔다. 또 1976∼1983년 발굴조사가 이뤄진 충북 청주시 문의면 두루봉 동굴에서도 원숭이 뼈가 출토됐다. 여기서는 코끼리, 코뿔소, 사자, 하이에나 뼈까지 나왔다. 요즘과는 확연히 다른 아열대의 자연환경과 생태계가 존재했다는 점을 그대로 보여줬다.

평양 상원군 검은 모루 동굴에서도 사람 뼈와 집터, 코뿔소와 원숭이, 그리고 물소 같은 사냥해 잡아먹은 동물의 뼈가 발견됐다. 1961년 함경북도 화대군 장덕리에서는 매머드 화석이 발견되기도 했다. 원숭이가 살았던 흔적은 다른 유적지에서도 잇따라 발견됐다. 1986년 발견된 충북 단양군 가곡면 삼태산 남쪽의 구낭굴에서는 총 24종의 동물 화석이 출토됐다. 그 가운데 두루봉 동굴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큰 원숭이 뼈가 있었다.

2004년 발굴 작업이 이뤄진 강원도 영월 연당 쌍굴에서도 역시 같은 큰 원숭이 종으로 추정되는 뼛조각이 나왔다. 이는 한반도에 원숭이가 일정 기간 서식했고, 사슴이나 노루처럼 흔한 동물이었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일본과 대만에는 원숭이가 흔하다. 오래전 한반도와 일본 등 주변 지역은 모두 육지로 연결돼 있었다. 이들 원숭이가 유사한 종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 두루봉 동굴 등에서 발견된 짧은 꼬리 원숭이 뼈와 지금 일본원숭이는 상당히 유사하다.

일본과 우리나라는 위도도 비슷하다. 일본원숭이는 전 세계 원숭이 가운데 가장 북쪽에 산다. 북쪽 아오모리 지역까지 분포하는 만큼 추위에도 강하다. 털이 유난히 길고 두꺼워서 겨울에도 체온 유지가 가능하다.

일본에는 서식하는 원숭이가 한반도에서 사라진 이유는 무엇일까? 우리나라에는 일본에 없는 호랑이나 표범 등 대형 육식동물이 많다. 한반도를 누볐던 원숭이는 맹수의 좋은 사냥감이 됐다. 거기에 춥고 긴 겨울 등 기후변화로 멸종했다.

■ 과거 급제·벽사 ·모정 등 옛 조상들 소망 담은 그림에 등장

원숭이는 모성애·다산·장수·출세욕 등을 상징한다. 때문에 우리 조상들의 생활문화에도 깊숙이 자리 잡았다. 원숭이는 소와 돼지, 닭과 같은 친숙한 가축들과 나란히 ‘12지신 동물’에 낀다. 또 궁궐 등의 추녀마루 위에 일렬로 세운 잡상(雜像) 가운데 하나로 쓰였다. 잡상은 건물에 위엄을 더하고,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한 용도이다. 원숭이가 귀신과 잡귀를 물리치는 ‘벽사’(辟邪) 의미로도 쓰인 것이다.

자식 잃은 부모 아픔을 ‘단장(斷腸)의 슬픔’으로 표현하게 된 배경에도 원숭이가 있다. 새끼를 잃은 어미 원숭이의 창자가 끊어져 있었다는 옛 고사에서 유래했다. 그만큼 모성애가 뛰어난 동물이라는 의미다. 이를 인용해 1956년 가수 이해연은 6.25 한국전쟁이 안겨준 슬픔을 '단장의 미아리 고개'라는 애절한 노래 가락에 담아 부르기도 했다.

원숭이를 그린 민속화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천도복숭아, 포도, 석류다. 민화속 포도는 주로 자식을 의미하며, 속이 야무지게 여문 석류도 다복과 재물을 뜻한다. 천도복숭아는 <서유기>의 손오공이 3000년 만에 열리고 300년이 지나야 익는다는 천도복숭아를 훔쳐 먹은 것을 빗대 ‘장수’의 상징으로 여겼다.

원숭이는 출세의 상징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양반 집에선 원숭이 그림을 선물해 과거 급제를 기원 했다. 공부하는 선비의 사랑방에는 원숭이 그림을 많이 그려놓았다. 조선 후기 ‘안하이갑도(眼下二甲圖)’에서는 원숭이가 나뭇가지로 게 두 마리를 잡는다. 게 두 마리는 소과(小科), 대과(大科)를 뜻한다. 과거에 급제해 높은 벼슬에 오르고자 하는 소망을 담았다.

또 한자의 ‘원숭이 후(猴)’자는 ‘제후 후(侯)’자와 발음이 같아, 벼슬에 나가 성공할 수 있다는 의미로 사용됐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화가인 송암 윤엄(1536~1581년)의 그림으로 알려진 ‘원록도(猿鹿圖)’는 소나무 가지에 앉은 원숭이 두 마리와 사슴을 그렸다. 여기서도 원숭이와 사슴은 출세와 재복을 상징한다.

■ 고사성어 조삼모사와 원숭이

중국과 일본에서 원숭이는 건강, 성공, 수호를 뜻하는 동물이다. 밑바닥에서 시작해 전국 통일을 이룬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에서 출세의 상징으로 통한다. 우리에게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일으킨 원흉이지만, 교토 외곽 도요토미의 신사에는 승진을 기원하는 샐러리맨들과 사업 번창을 비는 이들이 줄을 선다. 원숭이를 연상케 하는 그의 외모도 한몫했다.

중국 춘추전국시대 저공(狙公)은 원숭이를 좋아했다. 형편이 어려워져 원숭이 먹이도 줄여야 했다. 그래서 “도토리를 아침에 3개 주고,저녁에 4개 주겠다”라고 했더니 원숭이들이 화를 냈다. 저공은 다시 “도토리를 아침에 4개, 저녁에 3개 주겠다”라고 말을 바꾸었더니 원숭이들이 만족해했다. 여기서 유래한 ‘조삼모사(朝三暮四)’는 흔히 잔꾀로 남을 속이는 것을 뜻한다.

손오공이야말로 우리나라에서 원숭이가 갖는 의미를 모두 보여준다. 손오공은 처음에는 뛰어난 도술만 믿고, 경박하며 덜렁대는 존재로 묘사된다. 그러다가 삼장법사를 지키면서 그 꾀를 지혜롭게 사용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라는 속담이 있다. 아무리 자신 있고, 쉬운 일도 지나치게 자만하면 실수할 수 있다는 교훈이 담겼다. 허튼 잔꾀로 남을 속이거나 재주만 믿지 말고, 늘 노력하는 사람이 되라는 선인들의 가르침이 아닐까.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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