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동물 선물은 국가 간 친선을 도모하는 좋은 수단이다. 중국의 판더 곰이 대표적이다. 지난 9월 김정은 위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에게 선물한 풍산견 ‘송강’과 ‘곰이’ 한 쌍은 청와대에서 키운다고 한다.

선사시대 우리나라에도 흔했던 원숭이는 언제부터인가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다가 외교 선물로 다시 들어왔다. 조선은 명나라에 매와 사냥개를 보냈고, 명나라와 일본, 유구국(오키나와)에서 원숭이를 받았다. 원숭이는 주로 왕실 상림원(上林園)에서 관리가 맡아 키웠다. 태종 연간에는 원숭이 수가 늘어 궁 밖으로 분양했고, 더러는 우리를 탈출한 원숭이가 야생화되기도 했다.

조선 시대 원숭이는 ‘왕의 동물’이기도 했다. 그리고 왕에게 백성을 섬기라는 교훈을 주었다. 조선 시대 왕의 최고 예복인 구장복 우측 소매에는 호랑이를, 좌측에는 원숭이를 그렸는데 충효를 뜻했다. <세종실록>과 <국조오례의>에서는 구장복과 면류관으로 구성된 예복을 ‘면복’이라 불렀다. 왕이 즉위할 때, 종묘사직에 제사를 지낼 때, 왕비를 맞이하는 등 중요한 행사에 임금이 착용한다.

면류관은 면판과 면판에 늘어뜨린 류(瑬·구슬)를 합쳐 부르는 말. 왕이 예식 때 쓰는 모자다. 앞뒤로 늘어뜨린 구슬은 왕의 시야를 가리는데, 이는 왕이 나쁜 것을 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해석이다. 구장복은 청색 상의에 다섯 문양(용·산·불·꿩·호랑이·원숭이가 새겨진 제기)을, 홍색 하의에 네 가지 문양(풀·쌀·도끼·수 문양)을 수놓아 9가지 문양을 표현한 옷이다.

다섯 문양은 양 어깨에 발톱이 5개인 오조룡(五爪龍)을, 등에는 산을 그려 군주의 권위를 나타냈다. 소매의 단 뒤쪽에는 광명을 뜻하는 불(火), 화려하고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꿩(화충, 華蟲) 등 왕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상징하는 무늬를 표현했다.

■ 제주도에 원숭이가 살았나?

<조선왕조실록>에는 원숭이란 단어가 약 100여 차례 나온다. 1394년(태조3) 7월 13일 일본 사신이 왜구에게 잡혀간 백성 659명을 돌려보내며, 태조 이성계에게 원숭이를 바쳤다. 조선 개국 초, 일본은 조선과 유화책을 쓰기 위한 선물로 원숭이를 택한 것이다. 1408년 4월 18일에는 태종이 태평관에서 명나라 사신 황엄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황엄은 답례로 수컷 2마리, 암컷 1마리 원숭이를 바쳤다는 기록이 보인다.

<태종실록> 1410년 5월 17일 기사는 “일본인들이 잇달아 원숭이를 바쳐 그동안은 사복시(司僕寺; 왕실 목장)에서 기르게 했는데, 이제부터는 각진(鎭)에 나눠 준다”라는 내용이다. 일본이 꾸준하게 원숭이를 보냈던 것 같다.

세종 때는 제주도에서 원숭이를 사로잡아 바쳤다는 기록이 눈길을 끈다. 세종은 제주도에서 잡은 원숭이들을 잘 기르고 번식시키라는 명을 내렸다. 그런데 이 원숭이들은 아마 동남아 지역에 서식했던 게잡이 원숭이로 추정된다.

1434년(세종16) 4월 11일, 세종이 전라도 감사에게 지시한 기록을 먼저 살펴보자. “김인이 제주목사로 있을 때 원숭이 여섯 마리를 잡아 길들여 지금의 목사 이붕에게 인계했다. 그런데, 전라 감사는 굳이 이 원숭이를 육지로 보낼 필요가 없다. 다만 기르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잘 돌본다는 약속을 받고 육지로 가지고 나와서 풀이 무성한 섬(島)이나 갯가에 놓아기르게 하라. 또한 원숭이를 분양받은 사람은 도둑맞지 않도록 주의하고 번식에 힘써라.”라는 내용이다.

언뜻 실록 기사만 보면 처음부터 제주도에 자생했던 원숭이였는지, 일본 등 외지에서 들여와 풀어놓았다가 다시 잡아들인 것인지 쉽게 판단할 수 없다. 어찌됐든 제주목사가 “잡아서 길들였다”라고 하니 원래 사육하던 원숭이는 아닌 것 같다. 또한 “원하는 사람에게 나누어 주라”라는 세종의 명으로 보아, 이때는 원숭이를 귀한 애완동물로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2년 뒤 1436년(세종18) 6월 16일에는 제주 안무사 최해산이 원숭이와 노루 한 쌍을 바쳐 궁에서 기르다 인천 용유도에 방사했다고 한다. 최해산은 고려 말 화포를 개발해 금강하구 진포에서 왜구를 격멸한 최무선의 아들이다. 앞서 김인이 제주도에서 원숭이 6마리를 잡은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최해산이 바친 두 마리를 포함해 2년 사이에 8마리의 원숭이가 생포된 것으로 보아 제법 많은 개체가 서식했던 것 같다.

제주도에서는 원숭이날을 ‘납날’이라고도 한다. 예전 납날에는 나무(낭)를 자르지 않았다고 한다. 이날 자른 목재로 집을 지면, 좀이 많이 슬게 된다고 전한다. 이런 전승이 있는 것을 볼 때, 제주도에 원숭이가 살았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 제주도의 원숭이는 필리핀원숭이(게잡이원숭이)

태종과 세종이 지시한 내용을 잘 살펴보면 2가지 특이점을 알 수 있다. ① 원숭이를 바닷가 수군 진영인 진(鎭)에 나눠 줬다. ② 지금 인천 공항이 들어선 용유도 등 섬에 방사했다는 것. 이는 모두 바다와 연관이 있는 곳임을 알 수 있다.

왜 하필 풀이 무성한 섬이나 갯가에 원숭이를 놓아 줄까? 일반적 상식으론 원숭이가 사는 장소는 깊은 숲속이다. 먹이는 풀이나 나무 열매 위주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원숭이 중에 게잡이 원숭이라는 종이 있다. 갯가의 어패류가 주식이지만, 과일이나 농작물도 잘 먹는다. 게잡이 원숭이 중 하나인 필리핀원숭이는 주로 저지대나 맹그로브 숲에 살며, 게나 조개를 잡아먹는다. 게잡이 원숭이의 서식지는 주로 동남아시아 지역이다. 필리핀은 물론 보르네오 섬, 그리고 말레이시아, 홍콩까지 이른다.

지금 한반도에 원숭이가 없는 이유는 우리나라의 겨울이 춥고 긴 데다 표범, 호랑이 등 상위 포식자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제주도는 아열대에 근접할 만큼 기후가 온화하고 맹수가 없다. 여러 종류의 원숭이가 많이 서식했던 남송(南宋)을 점령했던 몽골을 통해 고려 때 들여왔을 수도 있다.

어떤 경로로 유입됐든, 조선 초기 제주에 야생 원숭이가 서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세종 때 제주도에서 잡힌 8마리의 원숭이는 아마 게잡이 원숭이였을 것이다.

■ 5년간 야생으로 살던 해남 가학산 원숭이

지난 2000년 초반, 수년간 전남 해남 지역을 떠들썩하게 만든 일본원숭이가 있었다. 2001년 영암군 학산면의 한 놀이시설을 탈출한 원숭이는 약 7km가 떨어진 가학산까지 도망쳤다. 이 원숭이는 가학산을 찾는 관광객과 등산객들이 주는 음식을 받아먹기도 하고, 산열매를 따먹으며 살았다.

관계 당국에서 붙잡기 위한 시도가 이어지면서 성격이 사나워졌다. 사람을 공격하고 골칫거리로 낙인찍혀 한때는 사살한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그러다 2006년 10월 갖은 노력 끝에 원숭이를 생포했다. 무려 5년간이나 야생에 적응하며 생존한 것이다. 이 원숭이는 ‘해남이’란 이름을 얻었다.

그리고 남원군에서 남원랜드 동물원을 탈출해 2년간 야생으로 살다가 2006년 12월 붙잡힌 수컷 원숭이 ‘남원이’와 신방을 꾸몄다. 같은 처지였던 두 마리 원숭이는 2007년 1월부터 가학산 자연휴양림에서 두 자식, 손자 손녀 등 3대가 잘 지내고 있다.

‘해남이’가 돌아오자 가장 기뻐한 이는 다름 아닌 가학산 관리사무소를 지키던 삽살개 ‘효리’. 해남이가 가학산을 누빌 때 관리사무소 앞 정자에서 ‘효리’와 서로 이를 잡아주던 사이였다고. 지금 ‘해남이’는 가학산 자연휴양림의 마스코트가 됐다.

‘해남이’는 지난 8월 서울 북한산에서 5개월 만에 잡힌 원숭이처럼, 시설에서 살던 원숭이도 야생 원숭이로서 생존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물론 세종 연간 제주도에는 여럿 원숭이가 살았을 것이다.

■ 옛 원숭이 지명의 공통점은 모두 바닷가

국토지리정보원에 따르면 전국 140만 개 지명 중 원숭이에서 유래한 곳은 8개밖에 없다. 12지 중 ‘용’과 관련한 지명은 1261개, 말이 744개, 호랑이가 389개 등이다. 원숭이 지명 중 대표적인 곳은 경남 거창 함양에 걸쳐 있는 금원산(金猿山)이다. 입구에 들어선 등산객들은 익살스러운 표정의 황금 원숭이 조각상을 마주치게 된다. 옛날 이 산에 금빛 나는 원숭이가 하도 날뛰자, 한 도사가 원암(猿岩)이라는 바위 속에 가두었다는 전설이 산 이름의 유래가 됐다.

조선 초 지리지 <동국여지승람>에는 원숭이 원(猿) 자가 든 지명이 몇 군데 나오는데, 모두가 남해안 지역이다. 한반도에서 살던 원숭이는 게잡이 원숭이라는 가설을 굳혀 준다. 전남 진도는 백제 때 도산현(徒山縣)으로 원숭이산(猿山)이라고도 했다. 백제 성왕 때 전남 여수가 원숭이 마을(원촌현;猿村縣)이었다는 점도 눈길을 끈다.

인천도호부 조에는 봄가을 해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원숭이섬(猿島)이 기재돼 있다. 소섬(우도), 노루섬(장도) 등 짐승 이름의 지명은 많지만, 상대적으로 원숭이 이름을 가진 섬 이름은 드물다. 원숭이를 궁궐에서 옮겨 기른 곳 중의 하나가 원도(猿島)이다. 지금은 해안매립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인천시 남구 용현 5동 낙섬이 바로 원숭이 섬이었다.

■ 원숭이 때문에 곤혹을 치른 임금은 성종

일본의 원숭이 선물은 세종 이후에도 죽 이어졌다. 문종 즉위년(1450년) 10월 7일에도 일본국 축전주(筑前州)의 등원정청(藤源定淸)이 원숭이 2마리를, 1468년(세조14)에도 일본에서 원숭이와 말 한 마리를 보낸 적이 있다.

누구보다 원숭이 때문에 체면을 구긴 임금은 성종이다. 1477년(성종8) 11월 4일 기록을 살펴보자. 유구국(오키나와)에서 원숭이를 바치자, 사복시(말 등 동물을 관리하던 관청)에서 “원숭이에게 옷과 흙 집을 마련해주자”라고 청했다. 음력 11월이면, 양력 1월로 가장 추울 때다.

그런데 손비장이 득달같이 “아니 되옵니다”를 외쳤다. 원숭이를 애지중지하던 성종이 옷을 해 입히고 집을 마련하라 이르자, 손비장이 나선 것이다. 그는 “원숭이는 상서롭지 못한 짐승인데, 사람 옷을 입힐 수는 없습니다. 또 원숭이에게 입힐 옷 한 벌이면, 백성 한 사람이 추위에 얼지 않도록 할 수 있습니다”라고 간언했다. 또 “사관들이 이를 기록으로 남기면, 후세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라며 성종을 압박했다. 당시 좌부승지였던 손비장은 <세조실록>과 <예종실록>을 편찬한 문신이었다.

이에 성종은 “내가 애완동물을 좋아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라며 한발 물러섰다. 그리고는 “외국(유구국)에서 선물로 보낸 것을 얼어 죽게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다. 또 내가 사람의 옷을 주라고 한 것이 아니다. 그저 사슴 가죽으로 원숭이 옷을 해 입히라고 했는데, 경이 잘 못 들었다”라며 궁색한 변명으로 체면을 구겼다.

■ 남의 나라 동물이 된 원숭이

해가 바뀌어 이듬해 1478년(성종9) 8월 10일, 성종은 원숭이 문제에 대해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했다. “지난번 내가 왜인에게 원숭이를 받았는데, 곧 뉘우치고 예조에 명해 다시는 바치지 못하게 했다. 내가 원숭이를 받은 것은 진실로 잘못이다”라며 정중히 사과했다.

사실 성종의 동물 사랑은 유별날 정도였다. 성종이 기른 동물들을 꼽아보면, 거의 동물원 수준이다. 앵무새, 백조, 공작, 노루, 사슴 등 수많은 동물을 키웠다. 그러나 ‘낙타’만큼은 중국에서 수입하는데 실패했다.

성종 이후에도 원숭이 공물로 논란이 잦았다. <연산군일기> 1502년 11월 14일 조에는 일본이 바친 원숭이를 돌려보내라는 내용이 실렸다. “구리와 쇠가 필요하지만, 예산이 부족해 공·사무역을 모두 중지했는데 무익한 짐승을 왜 받는가? 받지 않는다고 전해라.” 같은 해 12월 14일에도 일본이 보낸 원숭이 처리를 두고 격론을 벌였다. 결국 원숭이는 돌려보냈다. 이듬해 연산군 9년 1503년 3월 6일에도 일본 승려 의흥(義興)이 원숭이와 말을 바치자, 말만 받고 원숭이는 돌려보냈다.

1599년(선조 32년) 2월에도 명나라가 예물로 전한 원숭이를 ‘쓸모없는 이물질(異物質)’이라 표현하면서 되돌려 주는 방법을 논의했다. 선사시대 한반도에 그렇게 흔했던 원숭이는 어느새 '남의 나라 짐승'이 됐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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