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뉴스통신 칼럼] = 구름 대신 스케이트보드를 탄다. 머리를 옥죄는 고리 대신 헬멧을 썼다. 마음대로 늘어나는 여의봉 대신 쌍절곤을 휘두른다. 머털도사가 머리카락을 뽑아 도술을 부리는 것처럼, 털을 뽑아 신통력을 부렸다. 바로 <서유기>를 각색한 ‘날아라 슈퍼보드’ 이야기다. 1980~90년대 생이라면 TV에서 한 번쯤 봤을 법한 ‘국민 애니메이션’이다. <식객> <타짜> <각시탈>의 만화가 허영만 원작이다.

<서유기>는 7세기에 당나라 승려 현장(玄奘:602~664)이 인도에 가서 불경을 가져온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뒀다. 중국 역사상 가장 스케일이 큰 소설 가운데 하나다. 한국과 일본에서도 많은 인기를 얻었다. 영화 장르로 분류한다면 ‘판타지’이자, ‘로드 무비’다.

‘삼장법사’는 경·율·론 삼장에 통달한 고승을 이르는 말이다. 원숭이 왕 손오공은 삼장 법사를 호위하기 전에는 근두운을 마음대로 타고 여의봉을 휘둘렀다. 하늘의 신들까지 때려뉘고 제천왕이 되어 천도복숭아까지 멋대로 따먹던 망나니였다. 이런 손오공의 이미지는 오늘날 수많은 대중문화 속에서 변주되고 있다. 허균의 <홍길동전> 또한 주된 스토리 플롯(story plot)에서 후반부는 사실상 <서유기>와 <수호전>의 전개 양상을 참작한 경향이 나타난다.

1347년 즈음에 간행된 <박통사언해(朴通事諺解>“에는 “당나라 삼장 법사의 〈서유기〉를 사러 가자”라는 말이 나온다. 우리나라에 〈서유기〉가 들어온 것이 이미 고려 충목왕 때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아는 명나라 때 오승은이 쓴 〈서유기〉는 1592년경이니, 대략 2백여 년 차이가 난다. 오승은은 <서유기>의 바탕이 되는 무수히 많은 설화, 전설 등을 하나의 큰 이야기로 다시 엮어낸 것이다.

손오공의 문화원형은 인도 신화중의 원숭이 ‘하누만’이다. 힌두교 경전 <라마야나>에 ‘하누만’이라는 신이 등장한다. 하누만과 손오공은 모두 주인에게 목숨을 바칠만한 충성심과 하늘을 나는 능력, 악신을 물리치는 신통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중국 위진 남북조 시대부터 전하는 지괴 소설에서 원숭이나 각종 사물의 요괴, 정령의 유형은 흔하다. 이런 것들이 불교에 영향을 미쳐 지혜로운 원숭이 상징과 손오공이 등장했다.

손오공은 소림사를 중심으로 원숭이 권법을 만들 정도였다. 중국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은 대영웅 손오공은 인도에서 수입한 외래품이다. “뛰어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명언(?)의 주인공은 역시 손오공이다.

■ 통도사서 ‘서유기 벽화’ 발견

지난 2009년 양산 통도사 용화전에서 <서유기>의 7개 장면이 담긴 벽화를 발견했다. 벽화가 제작된 시기는 영조에서 정조 무렵으로 추정됐다. 통도사 가람은 대한민국 거의 모든 사찰 건축의 종합 전시장이라 해도 지나침이 없다. 불전의 다양성만큼 조형을 통한 장엄 세계도 풍부하다. 벽화, 불단, 꽃살문, 닫집, 단청, 천정 장엄 등의 수적·질적인 측면에서 고밀도로 분포한다.

통도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사찰 벽화가 집약되어 있다는 점이다. 대웅전, 영산전, 용화전, 대광명전, 약사전, 관음전, 극락보전, 명부전, 응진전, 해장보각, 삼성각, 안양암 북극전 등 12곳의 전각에 500여 점의 벽화가 현존한다. 불교 교리적 세계관에서부터 〈삼국지연의〉의 삼고초려도, 민화풍의 화조도, 별주부전(토끼전)과 까치호랑이 등 민화풍 그림까지 벽면에 가득하다.

용화전에 <서유기>를 표현한 이유는 간단하다. 사찰 벽화 소재로 적합했기 때문. 삼장법사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경전을 얻게 된다는 극적인 내용들이 수행과 공덕, 깨달음이라는 보편적 불교 교리와 일치한다. 게다가 숱한 요괴들의 방해를 법력으로 물리친 수호적 의미도 부여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화가 장승업이 그린 ‘송하고승도(松下高僧圖)’ 역시 서유기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원숭이가 불교 경전을 노스님에게 바치는 모습을 그렸다.

■ 법주사 팔상전에도 원숭이가 있다

원숭이는 <서유기> 이전부터 불법을 지키는 호법 신장의 존재였다. 불교문화가 꽃피운 아시아 국가에서 원숭이는 부처님 전생이기도 했다. 몇몇 사찰 구석구석을 살펴보면, 숨어있는 원숭이를 찾아볼 수 있다. 사찰에 원숭이 상을 둔 이유는 손오공처럼 잡귀를 물리치는 힘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국립 중앙박물관에 있는 고려 시대 경천사 터 십층 석탑(1348)과 이를 모델로 조선 초기에 세워진 탑골공원의 원각사 터 십층 석탑(1467) 탑신에는 <서유기> 줄거리가 조각돼 있다. 등장인물로 하여금 내부에 안치된 사리를 수호하는 의미를 담았다. 팔공산 환성사 대웅전에는 주먹코가 인상적인 원숭이 모양이 수미단을 받치고 있다. 18세기에 만들어진 해남 미황사 고압 스님 부도에도 몸체 받침에 원숭이가 새겨져 있다.

조계종 5교구 본사인 속리산 법주사도 원숭이와 떼어 놓을 수 없다. 국보인 팔상전 2층 추녀 밑에서 원숭이 모양 야차(夜叉) 상을 볼 수 있다. 머리에는 공양물을 이고 있다. 야차는 고대 인도어 야크사(Yaksha)의 음역으로 초자연적인 힘을 갖고 불법(佛法)을 수호한다. 흔히 말하는 ‘금강역사’가 바로 야차이고, 아예 ‘금강야차’라고 쓸 때도 있다. 예컨대, 고려 무신정권 때 이의민은 금강야차란 별명을 가졌다.

법주사 대웅보전은 돌계단 양쪽 원숭이 나한상이 지킨다. 진짜 원숭이 나한상은 방문객들의 손때가 많이 묻는 바람에 지저분해져 금동 미륵대불 지하의 성보 박물관으로 옮겼다. 현재 나한상은 대체용으로 만들어졌다.

삼장법사의 제자가 돼 불교 경전을 손에 넣는 일을 도왔던 손오공 이야기와 법주사 창건주인 신라의 의신(義信) 대사가 서역에서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왔다는 설화가 닮은 꼴이라, 경내에 원숭이 상을 설치한 것 같다는 게 법주사의 설명이다.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다시 중건한 대다수 사찰에서는 색다른 야차상이나 생령좌를 볼 수 있다. 불국사 사천왕상의 생령좌(마구니)는 악귀가 아닌 훈도시 입은 왜구(일본인)으로 알려졌다. 남원 실상사의 생령좌, 고창 선운사의 '음탕한 여인과 탐관오리' 생령좌 등이 대표적이다. 사천왕이 밟고 있는 생령은 대부분이 귀신이나 마귀로서, 권선징악적인 교훈을 준다.

보은군 마로면 원정리(猿汀里)는 충북에서 유일하게 원숭이와 관련한 지명을 갖고 있다. 조선 중기 문신 최수성(1487∼1521)은 신진 사림파로 조광조 등과 교유했다.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때 가까운 사람들이 희생당하는 것을 보고 벼슬을 포기하고 술과 여행을 즐겼다.

이때 원숭이를 길들여 함께 살면서 원정(猿亭)이라는 호를 얻었다. 심지어 원숭이를 편지를 전하는 데도 썼다고 전한다. 그는 방랑을 하는 과정에서 절친한 친구 김정이 살았던 보은면에 우거했고, 그런 연유로 원숭이 관련 지명(猿亭里)이 생겨났다.

■ 전등사 대웅보전 귀공포 조각상은 벌거벗은 여인?

우리나라에서 4번째로 큰 섬 강화도. 풍전등화 같았던 역사의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곳이다. 몽골 침입 때는 고려의 임시 수도 역할을 했다. 그런가 하면 개화기 서구 열강과 일제가 할퀸 아픈 상처도 고스란히 품고 있다. 강화도는 우리 민족의 ‘마지막 보루’같은 요새였고, 그 중심에 전등사와 삼랑성이 있다.

전등사는 법을 전하는 절이라는 뜻. 이 땅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한 대표적 도량이다. 서기 381년(고구려 소수림왕 11) 아도화상이 창건했다고 전하니, 우리 민족과 함께 한 1700년 불교의 역사를 대변한다. ‘아도’는 실제 승려 이름이 아니다. 약간 검고 이국적인 모습(묵호자·墨胡子)의 서역(인도) 전도 승려를 지칭하는 대명사다.

전등사는 산성의 문이 절의 산문과 사천왕을 대신한다. 전등사 언덕에는 소나무 숲이 펼쳐져 있다. 400년 된 나무 여러 그루 사이로 700살 된 나무까지 보인다. 오솔길을 따라 10여 분을 쉬엄쉬엄 오르면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건물이 대웅보전(보물 제178호)이다. 세 분의 부처님을 모신 경우, 대웅전에서 대웅보전으로 한 단계 명칭을 달리한다.

전등사의 백미는 대웅보전 추녀 네 귀퉁이 귀공포에 끼워져 있는 벌거벗은 여인상. 이 나부상(裸婦像)에 대해 여러 전설이 전하지만, 널리 알려진 게 도편수와 관련된 스토리텔링이다. 익살과 풍자가 섞인 ‘엇나간 사랑’의 전설을 담고 있는 나부상은 흥미를 더해준다.

조선 광해군 시절, 대웅보전 중건 책임을 맡은 목수는 절 짓는 동안 아랫마을 주모와 정이 들었다. 노임까지 그녀에게 맡겼으나, 주모는 불사가 끝날 무렵 줄행랑을 놨다. 상심한 목수는 처마 사이에 벌거벗은 주모의 형상을 조각해 넣었다.

조각상은 쪼그리고 앉아, 한 손 혹은 두 손을 들어 머리 위의 들보를 떠받치는 자세다. 평생 업보의 무게에 짓눌리게 하기 위해서다. 어쩌면 목수는 자신을 배신한 여인을 미워하기보다, 달아난 여인이 날마다 독경소리 들으며 참회하라고 나부상을 새겼는지 모를 일이다.

■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

사실, 전등사 나부상은 원숭이 모양 야차상이다. 임진왜란 직후 중건한 법주사 팔상전 원숭이 야차상을 모델로 삼지 않았을까 할 정도로 흡사하다. 법당은 부처님을 모신 신성한 장소인 만큼, 귀신과 삿된 기운을 물리치는 벽사용(辟邪用) 장치와 장엄(莊嚴)을 설치하는 게 특징이다. 주로 문이나 불단, 건물 기둥이나 대들보 등에 그리거나 조각된다. 벽사로 쓰이는 것 중 가장 흔한 게 도깨비 귀면(鬼面)과 용(龍)이다.

전등사에는 사천왕이 없으므로 수호신 의미로 원숭이 야차상을 넣었던 것 같다. 불전 건축의 의장 역할과 함께 추녀를 지지하기 위한 용도이다. 신성한 사찰의 처마에 옷을 벗은 여인의 상을 올려둔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대부분 사람들은 원숭이 야차상이라는 해석이 마뜩지 않을 것 같다. 아마 목수의 사랑을 배반하고, 도망간 여인을 벌주는 나부상이라는 말을 더 믿고 싶을지 모른다. 가을이면 고창 선운사에는 붉은 ‘꽃무릇’이 유명하다. 언제부턴가 스님을 짝사랑하던 여인이 상사병에 걸려 죽은 후 그 무덤에서 꽃이 피어났다는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진실과 다른 이런 스토리텔링이 잘 먹힌다. 그게 요즘처럼 혼탁한 세상사의 인지상정 아닐까.

일본 사찰 중에도 법주사 팔상전이나 전등사 대웅보전 야차상과 비슷한 형태를 찾아볼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나라현 호류지(法隆寺) 5층 목탑에 장식된 야차상이 바로 그 예이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건축물인 호류지는 법주사 팔상전과 같은 5층 목탑 구조다. 2층 네 모서리 추녀 밑에 야차상이 올려져 있다.

호류지 금당벽화는 고구려의 담징이 그렸다고 전한다. 여기서 금당(金堂)은 불교 전래 초기, 대웅전이 지금처럼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전각으로 정착하지 못한 시기의 명칭이다.

에도 막부의 기초를 닦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묘가 있는 닛코 도쇼쿠(東照宮) 사당에는 눈과 귀와 입을 가린 삼불원(三不猿) 원숭이 조각상이 유명하다. 올바른 일이 아니면,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는 뜻이다.

각각 다른 모양의 3마리 원숭이 모티브는 증강현실 게임 ‘포켓몬 고’의 ‘세 원숭이’ 캐릭터로 이어졌다. 또 미국 다큐 영화 ‘Religulous’(한국 제목; 신은 없다) 포스터에도 쓰였다. 영화는 눈 감은 유태교, 귀를 막은 기독교, 입을 막은 이슬람. 3대 종교에 대하여 독설을 퍼부으며 비난한다. 단순히 종교에 대해 ‘도장 깨기’ 영화는 아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역사를 지어내고, 그것에 매달리는 것. 그것이 바로 종교의 원천이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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