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대한민국은 ‘커피 공화국’이 되어버린 것일까? 우리나라 국민은 1인당 연간 500잔 이상 커피를 마신다. 1년 내내 커피를 달고 산다. 강릉에서는 커피축제까지 열린다.

어떤 커피 전문점은 “커피 아니면 죽음을 달라”라고 써 붙였다. 싸구려 원룸에서 취업에 매달리는 하루를 보내는 20대에게도 장기하의 노래 ‘싸구려 커피’처럼 커피는 필수품이 됐다.

커피는 전 세계에서 석유 다음으로 많은 유통량을 자랑한다. 수 세기 동안 사람들의 혀와 마음을 훔쳤던 기호식품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여전히 열렬한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은 커피와 담배 정도에 불과하다. 그동안 커피 불모지대였던 중국에서도 커피 소비가 점점 늘고 있다.

커피의 기원은 9세기경 에티오피아에서 양을 치던 목동이 발견했다는 설이 유력하다. 커피는 홍해를 건너 예멘의 모카항을 통해 퍼져 나갔다. 현재는 폐쇄된 모카항이 과거에는 커피 무역항이었다. 그래서 예멘 커피를 ‘모카커피’로 불렀다.​

■ 오스트리아 빈에는 ‘비엔나커피’가 있을까?

유럽으로 커피가 전해지게 된 계기를 따지자면 터키로 가게 된다. 오스만제국 시절 오스트리아 빈(비엔나)을 정복하기 위해 떠났던 이들이 커피를 가져갔다. 그런데 빈 정복은 실패하고 커피를 남겨놓게 되면서 커피가 전해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빈에서 ‘비엔나커피’를 찾으면 우리가 흔히 아는 커피 위에 부드러운 크림을 올린 그 메뉴를 만날 수 없다. 비엔나커피의 정식 명칭은 ‘멜랑지(melange) 커피’, 혹은 ‘비엔나 멜랑지 커피’다.

1475년 지금의 터키 이스탄불에 최초의 커피 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1530년대 이후 다마스쿠스와 카이로 같은 중동의 도시에도 커피하우스가 생겼다. 터키에서는 커피 끓이는 솜씨로 신붓감을 고르는 결혼 풍습이 있었다.

중세 유럽에 커피가 처음 전해졌을 때 커피는 이교도인 이슬람인의 기호식품인 까닭에 ‘악마의 음료’로 여겼다. 하지만 1592년 교황에 선출된 클레멘토 8세는 커피를 너무 좋아한 나머지 “모든 인류는 커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라는 말과 함께 커피에게 그리스도 신자의 음료라는 자격을 부여했다.

음악의 아버지 바흐는 커피광이었다. 그는 커피를 예찬하는 ‘커피 칸타타’라는 곡을 만들기까지 했다. 무뚝뚝하고 괴팍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베토벤은 “나는 아침상에 더할 수 없는 벗을 한 번도 빠뜨린 적이 없다. 커피를 빼놓고는 그 어떤 것도 좋을 수가 없다. 한 잔의 커피는 60여 가지의 좋은 아이디어를 가르쳐 준다”라는 커피 예찬의 말을 남겼다. 나폴레옹은 커피가 자신에게 “온기와 특이한 힘과 기쁨과 쾌락이 동반된 고통”을 준다고 말했다.

■ 우리나라 최초 커피 마니아는 고종
 
한국에서는 고종이 처음 커피를 마셨다. 고종은 1895년 8월 일본에 의해 명성황후의 죽음 등 신변 위험을 느끼자, 이듬해 2월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했다. 이른바 아관파천으로 아관(俄館)은 러시아 건물이라는 뜻. 그 후 1년 동안 베베르 공사의 보호 아래 있으면서 커피를 처음 접했다는 것.

하지만 아관파천 이전에 이미 궁중에서 커피가 음용되고 있었다는 몇몇 기록이 있다. 예를 들어 1884년부터 3년간 어의(御醫)를 지낸 호러스 알렌이 1908년 남긴 저서 <Things Korean·한국 풍물>에 따르면, 고종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시종들이 홍차와 커피를 내왔다고 한다.

고종의 커피 이야기는 영화 ‘가비’에서도 그려졌다. 커피는 한자로 가배(伽拜), 또는 가배(呵排)라고 하는 데서 제목을 따왔다. 중국은 실크로드를 통해 예부터 ‘가배’라는 이름으로 커피가 유통됐다. 일본은 1700년대에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 고종은 커피를 좋아했기 때문에 죽을뻔하다 살았다.

커피는 구한말 친러파의 정치적 도구로 이용되기도 했다. 1898년 9월12일, 고종과 태자(순종)는 평소 좋아하는 커피 때문에 죽을 고비를 겪었다. 바로 ‘김홍륙 독다(毒茶) 사건’이다. 당시 김홍륙은 러시아어가 능통해 고종의 통역관으로 활동하며 벼락출세를 한 자였다.

아관파천 이후 득세해 권력을 남용하다가 1898년 친러파가 몰락할 때 관직에서 물러났다. 같은 해 8월 러시아와의 교섭에서 거액을 착복한 죄로 전남 흑산도로 유배됐다. 이에 앙심을 품은 김홍륙은 고종의 생일 만찬에 공홍식을 시켜, 고종과 태자가 마시는 커피에 아편을 넣게 했다.

고종은 커피 냄새가 평소와 다른 것을 이상히 여겨 마시지 않았으나, 태자는 마시다가 토하고 쓰러졌다. 이 일을 공모한 김홍륙과 공홍식 등은 사형 당했다.

민간에서는 명성황후와 친분이 있었던 독일인 손탁(孫澤ㆍA.Sontag)이 정동구락부에서 커피를 팔기 시작했다. 초대 주한 러시아 공사 베베르의 처형이기도 하다. 손탁은 고종을 한국인 최초의 커피마니아로 만들었다. 주한 일본공사관 기록 1898년 9월 25일자는 “폐하께서는 때로 양식(洋食)을 즐겨 찾으시는데 항상 커피를 먼저 찾으시는 것이 상례”라고 보고할 정도였다.

손탁이 고종에게 커피를 권하게 된 계기는 그 유명한 ‘아관파천’이었다. 손탁이 마음에 들었는지 고종은 환궁 후 손탁이 살던 서소문 정동 한옥(이화여고 자리)에 양옥 건물로 서구식 호텔을 지어준다. 대한제국 시대 사실상 영빈관 기능을 했다. 최근 이병헌 주연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 나오는 ‘글로리빈관’의 모티브가 됐다.

이 호텔은 ‘손탁빈관(Sontag賓館)’으로 불리면서 방한한 여러 유명 인사들의 단골 숙소가 됐다. 1904년 러일전쟁을 취재하던 마크 트웨인과 젊은 시절 신문기자였던 윈스턴 처칠도 묵었다. 천재 시인 이상 역시 1930년대 ‘제비’를 시작으로 ‘쯔루’ ‘식스 나인’이란 독특한 이름의 다방을 운영한 적이 있었다.

■ 한국전쟁 이후 커피 대중화

우리나라에서 커피가 널리 퍼지게 된 계기는 한국전쟁이다. 미군이 전쟁 물자로 가져온 인스턴트커피가 시장에 유통되면서 사람들은 ‘물 건너온 미제 음료’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인스턴트커피는 2차 세계대전과 6.25전쟁 등 군수품으로 쓰기 시작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한국전쟁이 인스턴트커피사에 한 획을 그은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1960~1970년대 다방은 대중문화의 중심이었다. 문화공간이 많이 없던 시절 출판기념회, 시낭독회, 단막극 등이 다방에서 열렸다. 사람들은 계란 노른자를 띄운 진한 블랙커피를 마시며 팝송을 들었다.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음악다방도 ‘워크맨(Walk Man, 1979년)’을 필두로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가 보급되면서 인기가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1970년 동서식품이 국내 최초로 인스턴트커피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어 1976년 세계 최초로 믹스 커피를 개발했다. 당초 야외용으로 개발된 믹스 커피는 편리함과 경제성을 무기로 사무실과 공장, 가정까지 파고들었다. 1978년 개발된 커피 자판기도 한몫했다. 정수기가 보급되고 양성평등 의식이 신장하면서 ‘커피 타는 여직원’이 줄어든 것도 믹스커피 대중화에 일조했다.

믹스 커피가 실용적인 이유로 국민들의 입맛을 점령했지만, 그 대칭점에선 ‘문화적 차별성’을 추구하는 새로운 커피문화가 등장했다. ‘바리스타’들이 직접 내려주는 커피가 인기를 끌기 시작한 것이다.

■ 동물 똥 커피 전성시대

커피 문화도 진화한다. 변화의 흐름이 와인과 비슷하다. 제3세계 와인과 유기농 와인이 틈새시장을 형성한 것처럼 커피도 새로운 물결이 등장했다. 요즘 다양한 방식으로 추출하거나 원두를 골라 마시는 스페셜티 커피가 전성기를 맞고 있다. 안티-스타벅시즘(Anti-Starbucksism). 스타벅스가 만들어낸 커피 맛의 획일화, 몰개성화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문화 트렌드다.

우리나라에서는 각종 동물의 배설물에서 채취한 ‘똥 커피’가 유행이다. 사향고양이똥에서 골라 만든 ‘루왁(Kopi Luwak)’이 선두주자다. 뒤를 이어 베트남의 족제비 배설물에서 골라낸 '위즐', 다람쥐를 통한 '콘삭'을 비롯해 예멘에서는 '원숭이 똥'으로 만든 커피를 만들어냈다. 또 태국과 인도에서 코끼리에게 생두를 먹여 만든 ‘아이보리 커피 등 종류도 다양하다.

이렇듯 동물의 소화기관을 거친 커피가 돈이 된다는 소문이 나면서 에티오피아의 염소 커피, 베트남의 당나귀 커피, 서인도제도의 박쥐 커피, 브라질의 멸종 보호종 새인 자쿠 버드(Jacu Bird) 커피까지 등장했다.

온통 똥 커피 천지다. 이러다가는 개똥 커피나 쥐똥 커피가 나오지 말란 법도 없다.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라는 속담이 현실화 될지도 모를 일이다. 루왁커피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한 영화에 소개되면서다. 2007년 개봉된 <버킷 리스트>에서 주인공 잭 니컬슨이 죽기 전에 마시고 싶은 음료로 ‘루왁커피’를 꼽았다.

■ 루왁커피의 유래

그런데, 언제부터 루왁 커피를 마시기 시작한 것일까? 17세기 후반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를 지배하면서 커피나무와 후추 등을 재배했다. 당시 유럽은 커피 시장이 급격하게 커지고 있었다. 1629년에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유럽 최초로 커피하우스가 탄생한다. 영국 런던에는 1650년, 프랑스 파리에는 1672년 첫 커피하우스가 생겼다. 커피하우스는 이후 유럽 문화와 예술과 정치와 혁명의 중심지가 됐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인도네시아에서 재배한 커피를 유럽으로 가져갔다. 공급 물량은 늘 부족했다. 정작 현지 농부조차 접하기 어려웠다. 그러다가 사향고양이가 싸놓은 똥에서 배출된 원두로 커피를 만들어 마신 것이 루왁커피의 기원이다.
 
사향고양이는 인도네시아, 베트남,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지역에 서식하는 야행성 잡식동물이다. 요즘은 자연이 아닌 인위적인 사육장에서 루왁 커피가 만들어지고 있다. 다른 똥 커피 역시 마찬가지다. 쇠창살 안에 사향고양이나 다람쥐, 원숭이 등을 가둬놓고 억지로 커피 열매만을 먹여가며 받아낸다. 야생 동물들이 점점 인간의 탐욕에 갇혀 '커피콩 배설 기계'가 됐다.

루왁커피는 위액에서 발효과정이 대단한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비과학적이고 비상식적인 커피다. 커피 원두에 스미는 똥 냄새와 독성의 영향이 더 크다. 풍미보다는 희소성이 갖는 의미다. 중국의 진미로 꼽히는 ‘팔진 요리’와 매한가지다. 사기꾼들의 상술이 성공한 대표적 사례다. 가격도 고급 호텔에서는 한 잔에 5만 원이 넘는 고가에 판다.

■ 문화 코드로 자리 잡은 한국의 커피

유난히 한국인은 왜 이렇게 커피에 열광할까? 인간은 혼자 있고 싶으면서도, 동시에 여러 사람과 같이 공존하고 싶은 이중적 본성을 갖고 있다. 일하거나 공부할 때 주변에 다른 존재가 비슷한 일을 하고 있으면 자극을 받아 효율이 높아지는 ‘사회촉진 효과’가 카페에서 이뤄지고 있다.

시내와 대학가 카페에는, 일하는 공간으로 쓰는 ‘코피스(coffee+office)족’과 도서관처럼 활용하는 '카공족(카페에서 공부하는 족)' ‘카페브러리(cafe+library)족’으로 가득 찬다. 한국인이 커피를 마시는 것은 문화를 느낄 수 있는 공간을 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제 카페는 단순히 커피를 마시거나 만남을 위한 사랑방에 그치지 않는다. 도서관이자, 사무실, 그리고 누군가에겐 나만의 도피처가 되고 있다.

원래 커피는 이슬람 수도사의 잠을 쫓고 수행을 돕기 위해 처음 음용됐다고 한다. 그런 만큼 명상과 사색의 성격을 띤 음료였다. 유럽의 카페는 문학·미술·음악·사상에 대한 나눔의 장이었다. 어두웠던 시절, 사람들은 다방에 모여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나라와 민족이 처한 시대의 아픔과 예술적 고뇌에 대해 이야기했다.

각종 동물의 학대로 만든 ‘똥 커피’는 철학도 문화도 없다. 좋은 커피와 나쁜 커피는 무엇이 기준일까? 자기 입맛에 맛있는 커피가 가장 좋은 커피다. 건강한 커피는 무엇일까? 커피는 커피 열매의 씨를 볶아서 차로 마신다. 재료의 향미가 본질이다. ‘똥 커피’가 명품 커피라는 상술 속에는 씁쓸한 그림자가 숨어있다.

꼬불꼬불한 파마머리에 눈웃음치는 마담과 붉은 립스틱 짙게 바른 장미다방 ‘레지’가 타주던 커피. 음악다방에서 ‘통기타’ 가수 음악을 들으며 마시던 그 커피가 그립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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