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울릉도는 무릉도, 독도는 우산도로 인식했다. 그러나 사람의 발길이 닿기 어려운 섬이었음은 삼봉도를 둘러싼 이야기에서 잘 알 수 있다. 세종 연간에는 ‘요도(蓼島)’ 성종 때는 ‘삼봉도(三峰島)’라고 알려진 미지의 섬을 찾는 노력을 기울였다. 요도 혹은 삼봉도는 동해 어딘가 있는 섬으로 토지가 비옥하고, 백성들이 많이 거주한다고 풍문이 돌았다. 또 무릉도(울릉도)로 가는 뱃길에서 봤다는 사람도 여럿 있었다. 이 때문에 세종 때부터 사람을 보내어 찾았으나, 발견하지 못한 수수께끼의 섬이었다.

세종은 유난히 영토에 대한 개념이 뚜렷한 왕이었다. 그저 “요도라는 섬이 동해 가운데 있다”라는 말에 의지해 찾아 나서게 한 것도 세종의 국가경영 가치관을 잘 보여준다.

세종은 1425년(세종7) 8월 김인우를 울릉도에 특사로 파견해 20여 명의 주민을 본토로 데려오기도 했다. 이때 배 한 척은 풍랑에 파손됐다. 수군 46명 중 36명이 익사하고 10명은 일본에 표류했다가 12월에서야 돌아왔다. 삼척만호 출신 김인우는 이미 1416년 태종 때 울릉도와 독도 일대를 수색하고 86명의 주민 중 3명을 데려온 경험이 있던 인물이었다.

세종은 울릉도와 독도 말고도 동해 미지의 섬 ‘요도’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강원도나 함경도 감사에게 그 섬에 다녀온 사람을 찾아 지형과 해로를 그려오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조정에서는 요도가 어떠한 섬인지 알기 위해 수소문했지만, 실제 다녀온 사람들은 처벌을 두려워 해 이러한 사실을 숨기고자 했다.

1430년(세종12) 1월, 어렵게 함흥에 사는 김남련이라는 사람이 이 섬에 다녀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자 그에게 말을 태워 조정으로 보내도록 지시한다. 만약 그 사람이 늙고 병들어 올 수가 없다면, 함경 감사가 요도에 사는 사람들의 형편에 대해 자세히 물어서 보고하라고 한다. 또 강원도 감사에게 요도를 찾는 자에게 포상할 것을 명하고,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찾게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

■ 성종, 독도(삼봉도)를 찾아라

1470년 성종 즉위 초의 일이다. 앞서 1467년(세조13) 함경도의 호족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남이 장군에게 진압된 지 얼마 안 된 시점이었다. 함경도 유민과 부역을 피해 도망친 수많은 사람들이 동해 한가운데 ‘삼봉도’라는 섬에 들어가 산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 소문은 더욱 증폭되어 조정에서도 알게 됐다.

정체불명의 섬이 동해에 존재한다는 것은 모반이 일어날 수도 있는 중요한 문제였다. 삼봉도에 대한 성종의 관심은 요도에 대한 세종의 관심 못지않았다. 성종은 동해에 울릉도와 우산도가 있는 줄은 알고 있었으나 ‘삼봉도’가 있음을 보고받고 큰 관심을 기울인다.

조선 조정은 논의 끝에 관리를 파견해 수색하기로 의견을 모은다. 첫 번째 수색은 1472년(성종3) 4월에 시작했다. 성종은 ‘삼봉도 경차관’으로 박종원을 임명하고 직접 갑옷 등을 하사하며 격려한다. 박종원은 초마선 4척에 각각 40명씩 160명의 수군을 자원자 중에서 뽑았다. 노 젓는 격군까지 더한다면, 400명 가까운 대규모 수색대였다. 각종 화포까지 중무장한 이들은 현대판 해병대 수색부대원인 셈이다. 더구나 일본어와 여진어 통역사 각 1명까지 대동해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조선 역사상 최초의 대규모 해병 수색대는 같은 해 5월 28일 울산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곧 강풍을 만나 일행이 뿔뿔이 흩어졌다. 수색대장 박종원의 배는 울릉도를 6km 남겨두고 다시 강풍을 만났다. 닻도 끊어져 표류한 끝에 6월 6일에 이르러서야 구사일생으로 강원도 강성에 닿았다. 다행히 남은 3척의 배는 울릉도 접안에 성공해 3일간 수색을 도모했다. 사람은 보이지 아니하고 다만 옛 집터만 남아있을 따름이었다고 보고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8월 12일 제1차 삼봉도 수색 결과 보고회를 열고, 이듬해까지 다시 만반의 준비를 하도록 계획을 세웠다.

1473년(성종4) 1월 9일, 임금은 함경도 관찰사에게 지시한다. “김한경이란 이가 말하길, 함경도 경흥에서는 청명한 날이면 삼봉도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무릉도(=울릉도)의 북쪽에 요도(蓼島)가 있다는데 한 사람도 다녀온 사람이 없다고 하니, 이것도 의심스럽다. 경이 다시 바닷가에 사는 늙은 뱃사람을 찾아가 물어 상세히 밝혀서 아뢰라.”라고 지시한다. 성종의 명을 받은 함경도 관찰사는 수차 사람을 보냈지만, 삼봉도 탐색에 실패했던 것 같다. 이때부터는 대규모 수색 대신 민간 차원의 소규모 탐사가 진행된다.

■ 조선 성종 때 발견한 ‘삼봉도’는 독도가 맞다

1476년(성종7) 9월 16일 왕의 명령을 받은 김한경, 김자주 등은 함경도 경성에서 배 다섯 척에 나눠 타고 동해 미지의 섬 삼봉도 수색에 나섰다. 일주일간의 항해 끝에 삼봉도에서 3km 떨어진 곳에 정박하고 섬을 살폈다. 탐사대는 “섬 북쪽에 바위 세 개가 나란히 서 있고 다음에 작은 섬과 암초, 중간 섬, 작은 섬이 있으며 모두 바닷물이 통한다”라고 진술했다.

삼봉도를 찾기 위한 항해가 강원도가 아니라 함경도에서 시작한 게 주목할 부분이다. 두만강 하구에서 출발해 울릉도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북쪽에서 독도로 접근한 것이다. 여기서 ‘섬’을 독도의 서도로 본다면, 이 기술은 현재의 독도 주변 배치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이때 묘사한 삼봉도의 모습은 지금의 독도와 다름이 없다.

하지만 삼봉도가 울릉도인지 독도인지를 둘러싼 논란이 독도 영유권과 관련해 계속됐다. 한국인들이 1900년대 초까지 독도를 전혀 몰랐다는 일본 쪽 주장과 달리, 조선 시대에 국가 차원에서 섬을 탐색해 영토 행위를 했음이 보여주는 사례이기 때문이다.

1476년의 9월 19일부터 25일까지 탐색은 세종 때부터 시작된 50년 걸친 탐색 가운데 유일하게 삼봉도의 상세한 모습을 남겼다. 조정에는 이듬해 4월 바람이 온화할 때를 기다려 다시 수색을 재개하기로 한다. 이들은 또 “섬이 우뚝하게 보이고, 사람 30여 명이 섬 입구에 벌려 섰는데 연기가 났다. 그 사람들은 흰옷을 입었는데, 얼굴은 멀리서 보았기 때문에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대개는 조선사람이었는데, 붙잡힐까 두려워 나아갈 수가 없었다”라며 “상륙하지 못하고 대신 섬 모양을 그려 왔다”라고 보고했다.

<성종실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가지 의문시되는 점이 있다. 1476년(성종7) 10월 22일 기록을 보면, 이들은 처음에는 “흰옷을 입은 조선 사람 30여 명을 봤다”라고 보고했다. 하지만 5일 후에 병조에서 올린 진술서에는 “섬 사이에 ‘사람의 형상’(인형·人形) 같은 것이 30개나 되므로 의심이 나고 두려워서 곧바로 갈 수가 없어 섬 모양을 그려 왔다.’라고 말이 조금 바뀌었다. 그러면 과연 독도를 점거하고 있던 30여 명이 사람이 아니라 바다사자였을까? 정말 1476년 9월 독도에는 사람이 아닌 바다사자가 지키고 있었을까?

■ 1476년 독도를 지킨 것은 바다사자(강치) 일까?

1476년 9월의 탐색에 앞서 성종은 1476년 2월 8일, 김한경 등이 삼봉도로 추정되는 섬을 목격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상세하게 보고하라고 함경도 관찰사에게 지시한 일이 있었다. 김한경 일행이 그 전해인 1475년 5월에 경원을 떠나 배를 타고 3일 항해한 끝에 삼봉도를 봤다는 것이다. 이 일행이 멀리서 바라보니 섬 가운데에 7~8인이 있었으나, 고단하고 힘들어 육지에 내려가지도 못하고 돌아왔다는 말을 접했기 때문이다.

성종의 지시를 받은 관찰사는 자세한 내용을 보고한 것으로 보인다. 애초 김한경 외 2인은 1471년(성종2) 5월에 삼봉도에 표류해 섬사람들과 서로 만났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1475년 5월에 6명이 삼봉도로 가다가 7, 8리쯤 떨어진 곳에서 섬이 멀리 바라보였지만 바람에 막혀 끝내 도달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1476년 6월 22일 성종은 “이 말을 비록 믿을 수는 없지만, 또한 혹시라도 거짓이 아니라면, 지금 건장하면서도 믿을 만한 사람 3인을 보내어 김한경 등과 섬 안으로 들어가서 수색하라.”라고 지시한다. 그해 9월의 탐색은 이렇게 해서 진행됐다. 이때 삼봉도에서 목격한 ‘30여 명의 사람 형상’은 바다사자나 바다표범 무리였을 가능성이 크다. 탐사 지점이 해변으로부터 2㎞ 정도 떨어졌고, 계절 또한 바다사자 번식기이기 때문이다.
 
물론 김한경 일행이 1471년에는 직접 삼봉도(독도)에 상륙해서 사람을 만났다는 게 거짓말일 수 있다. 또 1475년과 1476년 탐사 때 멀리서 바다사자를 보고 사람 형상으로 혼동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어부들이 울릉도에서 따로 떨어져 나와 독도에 오랜 기간 상주할 수 있다. 두 섬을 왕래하거나 몇 개월씩 체류하면서 어업활동을 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실제 울릉도와 독도까지 뗏목을 타고 왕래한 사례도 많고, 한시적으로 독도에 거주한 사례도 많다.

사람이 살기에 적합한 유인도와 무인도의 가장 큰 잣대는 식수 존재 여부다. 독도의 유일한 우물은 1950년대에 독도 수비대가 주둔하고 있으면서 다이너마이트로 판 것이라고 알려졌다. 하지만 그전에도 바위틈에서 물이 스며 나왔다. 물만 있다면, 어패류 자원이 풍부한 독도에서 생활하기에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더욱이 조선 시대 독도는 지금의 독도 규모보다 더 컸음을 상기해야 한다. 독도는 해방 후 수차례 미군의 폭격 훈련장으로 쓰였다. 1948년 6월, 독도에서 고기잡이와 미역을 따던 어민 150여 명이 미군 B-29 폭격기의 폭격훈련으로 숨졌다. 서도의 물골 근처에는 지금도 녹슨 유탄이 남아 그때의 참상을 전한다. 1952년 9월에도 미군기의 독도 폭격 훈련 사건이 재개됐다. 이 두 번째 폭격 사건은 독도 영유권을 빼앗기 위해 일본이 획책한 게 반세기 만에 드러났다. 여러 차례에 걸친 대규모 폭격 훈련으로 독도의 크기는 상당 부분 훼손됐음이 분명하다.

■ 해방 후 수차례 폭격 훈련장으로 쓰인 독도

1477년(성종8) 3월 4일, 다시 삼봉도를 찾는 논의가 재개됐다. 성종의 의지는 강력했지만,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대규모 수색대나 관리를 파견하기보다는 1467년 이시애의 반란 이후 돌아선 함경도의 민심 수습이 우선이라는 대신들의 건의 때문이었다.

1479년(성종10) 5월 12일, 오랜 논쟁 끝에 조선 조정은 삼봉도에 이주한 사람을 조사하기 위해 조정의 관리를 보내는 것을 보류한다. 그런데 다시 두 달 후인 7월 13일 성종은 1472년 5월에 실시한 박종원의 대규모 수색을 거론하면서 다시 삼봉도를 찾겠다는 의지를 피력한다. 그 무렵 함경도 경차관 신중거로부터 삼봉도에 도피해 사는 주민이 1,000명이나 된다는 보고를 접했기 때문이다. 신중거는 울릉도와 독도를 혼동했을 가능성이 높다.

삼봉도 문제에 대해 성종은 집요했다. 8월 30일 성종은 삼봉도 토벌을 위해 군함 50척을 건조할 것을 명령하고, 토벌 계획을 널리 알리도록 지시한다. 9월 5일에는 삼봉도 토벌대장에 조위를 임명했으나, 곧 대대적인 토벌보다는 회유하기로 방향을 바꾼다. 9월 12일에는 삼봉도의 주민을 회유하는 담화문을 발표한다.

삼봉도 주민 회유에 참여를 원하는 군사와 예전에 다녀온 김한경 등 민간인을 포함한 33명을 모집해 10월에 3척의 배에 나눠타고 삼봉도로 출발한다. 삼봉도를 찾아간 일행의 여정은 순조롭지 못했다. 풍랑 때문에 되돌아왔다가 다시 떠났는데, 1개월이 되도록 아무런 보고가 없자 조정에서는 걱정스러운 의논을 한다.

성종은 “간혹 배가 부서져서 물에 빠져 죽는 것은 다만 한때의 변고일 뿐이니, 어찌 이런 일로써 하지 않겠는가?”라는 태도를 보인다. 12월이 다 되어 돌아온 초무사 일행은 뚜렷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같다. 12월 19일 성종은 병조판서 이극증의 건의에 따라 이듬해 삼봉도에 군사를 보내 도망한 자를 잡도록 한다.

■ 독도는 전설의 아틀란티스일까 삼봉도 일까?

해가 바뀌어 1480년이 됐다. 2월 12일 병조에서는 삼봉도를 수색하기 위한 인원 선발을 위해 수도권 군사와 수군 중에서 우수한 사람을 뽑기로 계획을 세운다. 2월 24일에는 삼봉도 초무사의 직책을 회피하려 한 상호군 정석희를 보직에서 해임하고 창원에 유배했다. 사단장급 군관이 임무를 거부한 것이다. 그러나 2월 28일 정석희의 후임자로 다시 박종원을 임명했는데, 그 또한 병을 핑계 대다가 김해로 유배됐다.

박종원은 8년 전 1472년 5월에 실시한 대규모 수색 때 수색대장으로 파견됐다가 울릉도에서 풍랑을 만나 죽은 고비를 넘긴 인물이었다. 아마 그때의 트라우마가 있어서 그랬는지, 칭병하다가 의금부에 걸려 파직됐다. 3월 3일 조정은 삼봉도 초무사로 심안인을 다시 임명했다. 아울러 “삼봉도에 사는 주민이 많으면 우두머리만 데려 오고 나머지는 머물러 있게 하되, 바로 스스로 나오지 않는다면 대규모 군사를 동원해 반드시 토벌하라”라고 지시한다.

3월 11일에 이르러 김흔, 노사신, 서거정 등이 한꺼번에 200여 명에 달하는 많은 군사를 보내지 말고 두세 명만 선발대로 먼저 보내자고 건의했지만 성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3월 17일 성종은 여진의 여러 족장에게 교서를 내린다. 삼봉도 초무사 일행을 호송하고, 만약 일이 잘못되어 배가 표류하다가 여진의 경계에 이른다면 구조를 당부하는 내용이었다. 5월 30일 심안인이 9척의 배와 무기 등을 준비하는 가운데 장마가 시작됐다. 그래서 날씨가 좋지 않으니, 중지하라는 명령이 하달된다.

다시 또 해가 바뀌었다. 성종의 삼봉도에 관한 관심은 식지 않았다. 1481년(성종12) 1월 9일, 함경도 관찰사 이극돈이 삼봉도를 찾는 계책을 상소한다. “①동북해역은 풍랑이 험해 다른 해역과 비교가 안 된다. 또 삼봉도가 확실하게 어느 곳에 있다는 것을 모르면서 사람을 뽑아 들여보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대규모 토벌이 계속 실패한다면, 혹시라도 홍수와 가뭄 등의 재해나 전쟁이 날 경우 틀림없이 도망가서 나라를 배반하는 사람들이 계속 나온다.

②그러므로 1479년 말 경차관 조위 때의 예와 같이 본토에서 자원하는 사람 30여 명 정도를 편성해 왕의 회유 문서를 가지고 들여보내어 삼봉도가 있는 곳을 탐지하게 하는 게 옳다. 그리고 형편을 봐서 무마할 만하면 불러들이고, 만일 대적할 수 없으면 다시 군사를 파견해 가서 토벌해도 늦지 않다. 그리고 만약 갔다가 돌아오는 사이에 비록 잃은 것이 있다 하더라도 큰 피해가 없을 것이다.

③지난번에 삼봉도에 왕래한 자들 가운데 어떤 이는 “멀리서 보았다” 하고, 어떤 이는 “보지 못하였다” 하니, 진실인지 거짓인지를 분별할 수가 없다. 지금 사람을 보내어 찾아보고, 만일 끝내 이 섬이 없으면 처음에 삼봉도 이야기를 꺼낸 김한경이가 속인 죄가 분명하니, 극형에 처해 본보기로 삼아야 한다.

④만약 올해에 들여보낸다면 2월 초에 순풍을 기다리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순풍을 기다리다가 장마를 만나게 되면 배를 출발시킬 도리가 없다.”라는 내용이었다.

결국, 조정에서는 삼봉도를 찾는 계획을 수정했다. 자원하는 사람 30여 명 정도를 뽑기로 하고, 나머지는 함경도 관찰사의 상소에 따르기로 의견을 모았다. 2월 24일, 함경도에 삼봉도 주민에게 알리는 왕의 담화문을 보내고 그것을 모집에 응한 사람에게 주어 보내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이같이 성종 연간에는 울릉도 부근에 삼봉도(지금의 독도)가 있다는 말을 듣고 수차례 찾아 나섰다가 결국 찾지 못했다. 일부는 두려워 상륙하지 못하고 그림만 그려오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삼봉도가 실존한다는 발언을 처음으로 한 김한경은 1482년 “거짓말로 사람들을 미혹했다”라는 이유로 극형에 처해졌다. 그의 딸인 10대의 어린 소녀 김귀진은 관청의 노비가 됐다.

■ 삼봉도, 바닷가 사람들의 영원한 이상향

이때부터 미지의 섬 삼봉도는 200여 년간 역사에서 홀연히 사라졌다. 임진왜란 이후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1613년(광해군5) 삼척영장 김연성은 갑사 80명, 포수 100명을 거느리고 울릉도 정세를 살폈다. 이들은 돌아오는 중 거센 풍랑을 만나 김연성과 많은 군졸이 익사하는 변고를 당했다. 오직 작은 배 한 척에 몇 명의 생존자만이 바람에 밀려 평해(=현 경북 울진군)에 표착해 그 사실을 전했는데, 삼봉도의 기록은 없었다.
 
1728년(영조4) 무신란(이인좌의 난) 때 역모 혐의를 받던 전 함경도 영흥부사 황부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진술이 나온다. 황부가 함경도 경흥에서 배를 타고 삼봉도로 들어가려 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심문관은 “만약 급한 일이 생기면 섬으로 도주하려 한 것이 아니냐?”라고 추궁했다. 그러자 황부는 그 섬에 대해 자기가 들은 이야기를 해 준다.

“그 섬의 너비는 거의 1,000리에 달하고 인가(人家)도 매우 많다고 한다. 건너편 복숭아 섬(桃島)까지 가 본 사람은 있는데, 그곳 주민들이 쓰는 언어는 우리나라와 같았다. 맑은 날 두리산 봉화대에 올라가면 그 섬 모습이 아스라이 보이는데 누워 있는 소처럼 생겼다는 말도 있다. 6시간 정도 배를 타고 나가니 섬이 시야에 들어왔다”라고 한다. 황부는 “그 섬이 우리나라 지도에 빠졌기에 영토에 편입시키기 위해 판옥선을 만들다가 변고를 듣고 그만두었고, 바다로 들어가 피란한다는 말은 본인 입으로 발언한 게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섬에 대한 묘사는 조금 다르지만, 두만강 하구인 경흥에서 배를 타고 찾는다는 것 등을 보면 전혀 다른 섬 같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황부가 형 집행 전에 죽은 뒤로 이 섬에 대한 기록은 두 번 다시 나오지 않는다.

이 사건은 <영조실록>보다 조선의 대검찰청이었던 의금부의 수사 일지 <추안급국안>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책은 1601년(선조34)부터 1905년(광무9)까지 300년 동안 의금부로 넘겨진 중죄인에 대한 추국(推鞫·심문) 내용을 기록한 규장각 소장 자료다. 역모, 변란, 삼강오륜을 거스른 사건까지 수만 건의 심문이 331책 분량에 수록돼 있다.

<추안급국안>의 다른 진술들과 마찬가지로 황부의 진술이 반드시 ‘진실’이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 섬이 과연 어디였는지는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는다. 황부가 찾아가려고 했던 그 미지의 섬 ‘삼봉도’는 독도였을까?

■ ‘정감록’과 ‘해도진인설’, 새 세상을 꿈꾸는 민중들의 예언서

그런데 황부의 사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 사건 이후로 백성들 사이에는 하나의 이야기가 급속도로 퍼져 나갔다. “삼봉도라는 섬이 동해 가운데 있으며, 둘레가 심히 크고 사람도 많으나 예부터 나라의 교화를 벗어나 도망친 사람들이 만든 섬이다. 가난하고 미천한 자를 위해 망명 역적인 황진기가 장군이 되어 정진인(鄭眞人)을 모시고 울릉도에서 나온다. 청주와 문의가 먼저 함락되고, 서울이 함락될 것이다. 이(李)씨 대신에 정(鄭)씨가 들어서서 가난 없고 귀천 없는 새 세상을 만들 것이다.”

청주는 이인좌의 쿠데타가 일어난 진원지다. 영조는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의심 많은 성격을 더욱 키우게 된다. 급기야 아들 세도 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어 죽게 한다. 황진기는 영조 때 선전관을 지낸 인물인데, 바로 황부의 아들이었다. 황진기는 1728년(영조4) 이인좌의 난 혹은 무신란이란 반란 사건에 연루되어 아버지가 옥에 갇히고, 자신에게도 체포령이 떨어지자 모습을 감춘 인물이다.

조선 조정에서는 황진기가 청나라에 망명했다는 소문을 듣고 그를 잡기 위해 청나라로 군사를 보내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평안도에서 중이 되었다’ ‘충남 가야산에서 은둔했다’는 등의 소문만 무성했고, 20년이 넘도록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다. 한 때 180여 개에 달하던 충남 가야산의 절집은 그가 도피했다는 풍문이 돌아 거의 폐사됐다고 한다. 황진기는 조선 시대 최고의 도망자로 명성을 날렸다.

해도진인(海島眞人) 설은 바다 한가운데의 섬에서 세상을 구하는 영웅이 나온다는 이야기다. 허균의 <홍길동전>이나 박지원의 <허생전>에도 해도진인 이야기가 실려 있다. <홍길동전> 속의 율도국은 오키나와 설, 울릉도 설, 전라도 위도 설 등으로 해석이 엇갈린다. 조선 후기 민중의 바이블이었던 <정감록>과 같은 예언서에는 빠짐없이 전설 속 아틀란티스와 같은 유토피아가 등장한다.

세종의 요도 탐색과 성종의 삼봉도 탐색은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조선 중기 왜란과 호란을 겪으면서 ‘삼봉도’는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그렇지만, 이 같은 해도진인설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무릉도원을 본떠 무릉도로 일컫던 울릉도의 ‘해도진인’ 이야기는 <정감록>과 함께 쌍두마차가 되어 조선을 내내 뒤흔들었다. 그 언제쯤이면, 독도에 대한 시대적 인식을 제대로 할 줄 아는 ‘해도진인(海島眞人)’이 ‘대한민국호’를 힘차게 이끌어 갈까.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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