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는 재위 중 신하들에게 시 문답 시험을 여러 차례 내렸다. 그 중 울릉도와 독도의 방어책을 묻는 시험 ‘친시(親試)을 치른 적이 있다. 조선의 앞날을 책임질 젊은 문신들에게 국가의 지리적 상황을 큰 차원에서 점검해보라는 문제를 낸 것이다. 여기에서 정약용이 1등을 했다. 1789년 윤 5월 일이다.

정조의 질문은 정조의 시문집 <홍재전서> 제50권 책문3 ‘지세 地勢’ 초계문신의 친시(1789년)에 적혀 있다. 정약용의 답변은 다산 시문집의 ‘대책(對策)’ 편에 있다. 정약용은 이 시험에서 1등(首位)을 차지했다고 머리말에 적었다.

정조는 “우리나라는 하늘의 명을 받들어 동방 전체를 소유했다. 강토가 수천리를 넘고 태평을 수백 년 동안 누려왔다. 비옥한 들녘에는 뽕나무와 인삼이 풍족하고, 깊은 숲과 큰 강에는 재물과 보화가 연일 생산된다. 백성과 물산은 풍요롭고 풍속과 기질은 문명을 이뤄 중원 밖의 나라 가운데 최고일 것이다. 그렇건만 어째서 근래에 사람들은 지리가 정치의 근본임을 모르는가? 관문은 방비가 허술하여 한탄스럽고, 성곽을 보수한 성과가 없다. 서울을 수비하는 사령관에 대해 의견이 일치되지 않고, 강화도를 방비하는 방법을 놓고 논의가 분분하다.”라고 하면서 갈수록 국방이 허술해지는 점을 개탄했다.

■ 정조의 독도 문답 시험에 대한 다산 정약용의 생각

정조는 내륙과 수도권의 방어만을 문제 삼지 않았다. 하늘로부터 받은 이 아름답고 풍요로운 국토를 어떻게 개발하고, 어떻게 보위할지에 대한 문제까지도 함께 물었다. 나라와 국토에 대한 자부심과 나라를 보전할 책무를 진 국왕으로서의 다부진 자세를 느낄 수 있다.

계속해서 정조는 “울릉도와 손죽도(損竹島=독도)는 오래도록 무인도로 버려졌다. 여연과 무창(=압록강 상류 지역)은 아득히 옛 군현을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 몇 가지 사안을 구제하는 대책을 그대들이 아니면 누구에게 자문하겠는가? 바라건대, 여러 대신은 모두 대책을 들추어 저술하라. 내 친히 열람하리라”라고 지시했다.

이에 정약용은 “울릉도는 옛날 우산국으로 신라 지증왕이 정복했던 곳이다. 화살대나 담비 가죽과 기이한 나무 등이 제주도보다 많고, 물길이 일본과 가깝다. 울릉도와 독도를 빈 섬으로 내버려 두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니다. 만일 교활한 왜인들이 몰래 와서 울릉도를 먼저 점거해 버린다면, 국가의 큰 걱정거리다. 지금이라도 백성을 모집해 울릉도로 들어가서 살도록 하고, 진보(=군사시설)의 설치도 바로 해야 한다”라고 답했다.

독도에 대해서는 “조그마한 섬인 데다 우려할 만한 문젯거리도 없으니, 비록 내버려 두더라도 해로움이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정약용의 답변은 국왕 정조의 문제의식에 완벽하게 부응하지는 못했다. 그래도 정약용은 답지에서 중국과 고구려와 부여, 가야의 역사까지 두루 꿰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 “국가를 보전하는 것이 덕(德)에 있지, 지리의 험악한 데 있지 않다.”면서 “지형적으로 유리한 것이 인심(人心)의 화합된 것만 못하다고 했으므로, 신이 감히 이 두 마디 말을 전하(殿下)에게 말씀드리는 바입니다.”라고 맺었다.

한편 다산 정약용의 한시 <탐진어가 耽津漁歌>에는 전라도 강진의 남포 주민들이 울릉도로 홍합을 잡으러 간다는 기록이 있고, 다산의 제자 황상 역시 남포 주민들이 울릉도로 대나무를 베러 갔다는 한시를 남겼다.

<고종실록>을 보면 1882년 검찰사 이규원이 울릉도를 향해 출발하기 전 고종이 “울릉도 옆에 있는 송죽도(松竹島)와 우산도 혹은 송도와 죽도라 부르는 섬들의 지리를 살필 것”을 지시한 적이 있다. 정조는 독도를 ‘손죽도’로 일컬었는데, ‘송죽도’와 발음이 거의 유사하다는 점에서 독도로 추정한다. 정조와 고종은 울릉도 이외에 또 하나의 섬(독도)이 있음을 분명히 파악하고 있었다.

■ 울릉도에 전라도 사람이 안방 드나들 듯한 이유는

조선 시대 울릉도·독도 지역에 대한 통치방식은 수토 정책(搜討政策)이었다. 주민의 거주를 금지하고 섬을 비워두되, 정기적으로 순찰했다. 여진족의 위협과 고려 후기 이래 극성을 부린 왜구의 침입이 주원인이었다.

수토정책은 주민을 육지로 이주시키는 것과 함께 정기적인 순찰을 병행하는 것이었으므로 국가의 부담은 계속 남아 있었다. 따라서 섬을 비우기보다는 관청을 설치하고 주민을 정착시키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라는 논란이 계속됐다. 이 같은 조정의 거주 제한 정책에도 불구하고 본토 주민들은 끊임없이 울릉도와 독도에 내왕하며 어로작업을 했고, 농사를 지으며 정착하기도 했다.

1882년 고종의 명을 받고 울릉도를 조사한 검찰사 이규원은 그 당시 울릉도에 거주하는 사람을 조선인 141명, 일본인 78명으로 파악했다. 수토 정책이 한창이던 당시 이규원 검찰사 일행을 반갑게 맞을 리 없다. 아마 본토로 소환되기 싫어 산속으로 숨어든 사람들도 있어서 파악된 인원보다는 분명 많았을 것이다. 이들은 주로 배를 건조하거나 해산물을 채취하며 살았다.

그중 가장 많은 사람이 전라도 출신이었다. 141명 중 전라도 사람이 115명, 강원도 14명, 경상도 11명, 경기도 1명이었다. 전라도인 중에서는 고흥과 거문도 출신이 61명으로 가장 많았고, 여수 초도 33명, 낙안(순천) 21명이었다. 당시 전라도 사람들이 많았던 까닭은 조선(造船) 기술이 전국에서 제일 좋은 사람들이 전라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남해안의 거문도가 멀어도 한참은 먼 동해의 섬 울릉도와 많은 교류를 했다는 게 아주 특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울릉도는 수토정책 아래서도 동남해안 어민들의 삶의 터전

이규원의 <검찰일기>에서 주목되는 게 바로 이 부분이다. “전라도와 강원도에서 온 사람들은 봄에 울릉도에 도항해 모두 13~24명이 1단(團)을 이루어 벌목해서 배를 만들다. 그리고 틈틈이 미역·전복·물고기·산채 등을 잡아 말려서 배 만들기가 끝나면 이것을 싣고 귀향한다”라고 서술했다.

이러한 사실은 <검찰일기> 외에도 프랑스 라 페루즈 탐험대(1787년)의 <세계 탐험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탐험기에서는 울릉도에서 배를 건조하는 사람들을 ‘목수’라고 기록했다. 이 기록을 보면 이규원이 검찰활동을 펼치기 100년 전부터 울릉도에 벌목과 조선 활동이 성행했음을 알 수 있다. 울릉도를 최초로 발견한 서양인 페루즈 탐험대는 1787년 5월27일 울릉도를 발견하고, 천문학자 다즐레(Dagelet)의 이름을 붙여줬다. 이후 서양 기록에는 1950년대까지 150여 년간 울릉도가 ‘다즐레’라는 이름으로 사용됐다.

고종은 일본인들의 빈번한 울릉도 불법 침입을 우려해 그때까지의 방침을 바꿔 육지 주민들의 이주를 장려했다. (울릉도 개척령; 1882년). 배의 건조 또한 허용하되 세금을 내게 했다. 그리고 울릉도를 담당할 관리인 도감을 임명했다. 1890년(고종27) 9월에 초대 울릉도 도감으로 거문도 서도리 사람인 오성일이 교지를 받았다. 그의 비문에 따르면, 오성일은 거문도의 어민과 함께 울릉도에 가서 생활하다가 그곳 사람들의 추천으로 도감에 임명됐다. 1896년 울릉도의 거주 인구는 277가구 1,134명에 이르렀다.

■ 1890년 임명된 울릉도 초대 도감은 거문도 사람 오성일

어떻게 거문도 사람이 울릉도의 도감을 했는지 그 사연이 이렇다. 예전 거문중학교에 근무했던 유성종 교사의 연구에 따르면, 거문도 사람들의 울릉도행은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거문도는 구릉지가 많고 토양층이 얇다. 또 바람이 세기 때문에 큰 나무가 자랄 수 없는 환경이었다. 당연히 집 짓고 배를 건조할 나무가 부족해 이를 구할 수 있는 곳을 찾게 됐다.

가까운 육지나 섬들은 관리자가 있어 불가능했다. 그런 와중에 거문도 사람들이 찾은 곳이 바로 울릉도였다. 울릉도는 울창한 숲과 해산물이 풍부해 일본인들이 몰래 들어와 나무를 베어 가고, 제멋대로 어업 활동을 하던 곳이었다. 항해에 능하고 진취력이 강한 거문도 사람들에겐 울릉도가 안성맞춤이었다.

해마다 춘삼월이 되면 거문도 사람들은 동남풍과 한반도 주변을 따라 북상하는 쿠로시오 난류를 이용해 울릉도로 향했다. 거제도와 부산·포항·영일을 거쳐 울릉도까지 보름에서 한 달이 걸리는 긴 여정이었다. 출발 전엔 세말의 콩을 볶아 가지고 갔다. 긴 항해 기간에 키를 잡은 사공의 졸음을 쫓기 위해서였다.

거문도 사람들은 도착 직후부터 나무를 베어 새로운 배를 만들었고, 여름내 전복과 미역을 채집했다. 6개월 후 가을철 하늬바람(북서풍)이 불면 목재와 해조류, 말린 고기를 가득 싣고 남하하면서 경상도 포구에서 판매하거나 물물교환을 하며 귀향했다. 거문도에 도착하고 나서는 뗏목(목재)만 남겨두고 곧바로 서해로 나가 어로 활동과 함께 울릉도의 건어물과 해조류를 곳곳의 포구에서 팔았다. 이들의 활동 범위는 대동강의 진남포까지 이어졌고, 서울 마포나루와 금강하구 강경에도 들러 생필품과 쌀을 구해왔다.

2001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거문도엔 100년도 훨씬 넘은 울릉도 목재(노간주나무·귀목)로 지어진 집과 절구통, 다듬이, 홍두깨 등의 생활 도구가 많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20세기 초반부터 나타난 독도라는 이름도 결국은 돌섬의 전라도 사투리에서 유래한 것이다. 독도에 있는 작은 바위섬 중 ‘보찰바위’ 라는 이름이 있는데, 보찰은 거북손의 거문도 일대 방언이다.

거문도 사람들은 광복 이후 1970년대까지 울릉도와 독도 근해 어장에서 오징어 채낚기 작업을 많이 했다. 얼마 전까지 서도리 장촌마을에 가면 당시 뱃일을 했던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동해안과 서해안, 남해안 일대를 누비고 다녔던 선조들의 정신이 거문도 사람들에게 자긍심이 되고 있다. 거문도 사람들에게 울릉도와 독도는 여전히 특별한 이름이다.

■ 독도수비대 홍대장의 조부는 러일전쟁 때 침몰한 선원 구조

1882년에는 태종 이후 400년 동안 실시해온 수토 정책을 공식적으로 폐지하고 54명을 울릉도에 들여보냈다.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사 대사관으로 몸을 피한 아관파천이 발생했다. 조선에는 친일 내각이 사라지고 친러 내각이 자리 잡았다. 러시아는 고종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압록강 연안과 울릉도의 삼림 벌채권 등 갖가지 이권을 차지했다. 옛 명작 영화 <왕과 나>의 주인공으로 유명한 영화배우 율 브리너의 할아버지가 울릉도 삼림 벌채권을 갖고 있었다.

당시 일본을 경계하던 러시아는 울릉도를 해군 기지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상인이었던 브리너(Y.I. Brynner)에게 1896년 주한 외교사절을 통해 압록강, 두만강과 더불어 울릉도 삼림벌채권을 얻어준 것이다. 그는 수백 년 이상 된 고목을 수도 없이 러시아로 실어 날랐다. 1900년대부터 울릉도에는 일본의 벌목꾼과 어민들이 500여 명을 넘어섰다. 일본의 노략질과 러시아 사람들의 행패에 울릉도 주민들은 이중고를 겪었지만, 당시 우리나라는 외적의 침탈에 맞설 힘이 없던 시기였다.

대한제국 말에는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운동 등 어수선한 환경을 틈타 울릉도로 들어가는 이들이 많았다. 동학농민운동 이후에는 동학의 남은 세력이 숨어들기도 했다. 공식적으로 독도에 사람이 정착하게 된 것은 1953년 33명의 ‘독도의용수비대’ 체류 이후다.

수비대는 홍순칠 대장을 비롯해 6·25 참전 경험이 있는 청년들을 중심으로 순수 민간 조직을 결성해 1956년까지 독도를 지켰다. 홍대장의 조부는 1905년 5월 러일전쟁 당시 울릉도 앞에서 침몰한 러시아 순양함 드미트리 돈스코이호의 승무원 구조에 나서기도 했다. 1883년 울릉도 개척령이 내려졌을 때 첫발을 내디딘 개척민이었다.

울릉도에 상륙한 러시아 수병들은 주민들의 적극적인 구조와 치료에 감사해 청동 주전자, 금화 등을 건넸다. 청동 물주전자는 현재 독립기념관에 보관, 전시 중이다. 일부 사망한 러시아 수병의 시신은 도동에서 저동 사이 산 중턱에 묻혔다. 러시아의 어느 수병은 울릉도에 정착해서 주민과 결혼해 딸까지 낳았다는 후일담도 전해진다.

지난 7월 중순 돈스코이호 선체 발견 소식이 전국을 뒤흔들었다. 러일전쟁 때 러시아 발트 함대의 군자금을 실었다는 것이다. 이 보물선은 사기 의혹과 함께 호사가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다.

■ 바다를 모르면 지는 거다.

100년 전 조선은 왜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나락으로 떨어졌을까? 지금도 여전히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일본의 저의는 무엇일까? 15세기부터 20세기까지 세계를 나눴던 제국주의 국가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1581년 4월, 37세의 이순신은 전라좌수영 관내의 고흥에서 부대장 격인 ‘발포 만호’를 맡고 있다가 모함을 당해 첫 번째 파직을 당한다. 당시 조선은 역대 가장 무능한 임금 중 하나인 선조 재위 14년째. 같은 해 4월 4일, 지구 반대편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은 ‘해적왕 드레이크’에게 기사 작위 ‘경 Sir’을 수여했다. 그 어느 나라에서도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더구나 그 무렵 영국은 가장 철저한 신분사회였다. 영국 내에서도 소탕해야 한다는 여론이 분분한 해적 두목에게 최고 명예인 기사 작위를 준 것이다. 영국은 해적선장 드레이크에게 귀족의 작위를 하사하면서까지 해양제국 건설에 매진했다.

같은 시기 임진왜란 이후 바다를 닫은 조선은 세계화의 조류에서 밀려났다. 제국주의자 식민지, 그리고 근대의 명암을 가른 결정적인 계기는 바로 바다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 부재였다. 지구는 사실상 표면의 70%가 바다인 ‘해구’다. 바다를 모르면 지는 거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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