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역사와 함께하는 동물은 바다사자다.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독도는 강치 혹은 가제, 가지라고 부르는 바다사자가 주인일 정도로 해양 포유류의 천국이었다. 독도 수면 위로 드러난 바위는 물개나 바다사자, 바다표범들이 서식하기에 안성맞춤이다.

강치는 넓은 의미로 물개과의 바다사자 종류다. 전 세계적으로 크게 캘리포니아, 갈라파고스, 독도 강치 3종류로 나뉜다. 독도의 다 자란 강치 수컷은 평균 길이가 2.5m, 몸집이 400kg 정도로 암컷에 비해 매우 크다. 수컷 한 마리가 암컷 수십 마리를 거느리고 번식한다. 수명은 약 20년으로 군집을 이뤄 생활한다. 주로 멸치, 오징어, 꽁치, 고등어 등 다양한 어패류를 먹는다.

독도·울릉도를 포함한 동해에는 강치만 살았던 것은 아니다. 지난 2009년과 2015년 5월 독도에 나타난 물개를 비롯해 점박이 물범 등이 독도에서 쉬어 가는 것을 봐도 유추할 수 있다.

물개와 바다사자, 물범(바다표범)은 다들 비슷하게 생겼다. 언뜻 보면 구분이 안된다. 도대체 어떻게 구분할까? 물개는 크기가 가장 작은 종으로 날렵하고 작다. 물개 쇼를 보면 상체를 일으키고, 박수도 치고 네발로 걸어 다닌다. 물론 바다사자와 바다코끼리도 걸어 다닐 수 있지만 물개보다 크기가 큰 편이다. 물개의 특징으로는 귓바퀴가 있고 손톱이 없다.

바다표범은 앞발이 짧다. 꿈틀꿈틀 움직이면서 얼음 위나 해안에 누워있는 모습이 많이 보인다. 물개와 달리 귓바퀴가 없는 대신 손톱과 얼룩무늬가 짙다. 바다사자는 물개와 정말 비슷하다. 차이점은 물개보다 몸집이 커서 굼뜨다. 또 귓바퀴가 작고 손톱이 뚜렷하다. 바다코끼리는 코끼리 상아 같은 큰 이빨이 특징이다.

우리 역사에는 독도 강치와 관련된 기록들이 다수 등장한다. 1417년 <태종실록>에는 울릉도와 독도 일대를 수색하고 돌아온 김인우가 “수우피(水牛皮)라는 소처럼 생긴 바다에 사는 동물 가죽을 바쳤다”라고 기록했다. 또 1694년에 삼척영장 장한상은 “울릉도 남쪽 해안 동굴에 많은 가지어(可支魚)가 서식하고 있다”라는 보고서를 올렸다.

“바닷속에 큰 짐승이 있다. 소 모양에다 눈동자는 붉고 꼬리는 없다. 해안에 떼를 지어 누워 있다가, 사람을 만나면 달아나 물속으로 들어가는데 이름을 ‘가지’라 한다”. 신경준(1712~1781)이 편찬한 <동국문헌비고 여지고>에 나오는 기록이다. 1700~1800년대에 울릉도에 순찰을 다녀온 관리들은 증거물로 '가지' 가죽을 조정에 바쳤다.

■ 독도의 역사와 함께하는 동물 강치

독도를 숙종 때는 자산도(子山島), 정조 때는 가지도(可支道)라고 부르기도 했다. 가지도는 동해안 어민들이 독도에 많이 서식한 강치를 ‘가재’ 또는 ‘가제’라고 부른 것을 한자로 가지어(可支漁)로 표기한 데서 유래했다. 울릉도·독도 내에서는 가제바위 가제굴 등 바다사자를 칭하는 지명이 많이 남아 있다. 이 때문에 독도의 바다사자는 ‘강치’ 아닌 우리 고유의 ‘가제’로 불러야 한다는 목소리도 여전하다.

독도는 인간의 손길로 무참히 도륙된 강치의 아픔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울릉도와 독도를 중심으로 동해안 인근 해안에서 서식했던 강치는 일본인들이 무차별적으로 불법 포획해 멸종으로 이어졌다.

1800년대 후반에서 1900년대 초 울릉도에 고기잡이 온 전라도 어부들의 증언에도 독도의 강치 잡이가 등장한다. 강치는 식용 또는 가죽을 취하고, 기름으로 등불을 밝혔다.

고래잡이 때문에 동해로 왔다가 독도에 발을 디뎌 강치를 잡은 미국 포경선원도 있었다. ‘헨리 닐런드’(Henry Kneeland)호의 선원은 “1853년 4월 18일 독도(seal rock)에 상륙해 물범 7마리를 잡았다”라고 항해일지에 썼다. ‘seal rock’ 즉 물범 바위는 바로 독도를 가리킨다. 그가 독도에서 잡았다는 ‘seal’(물범)은 사실 강치일 것이다. 강치를 모양이 비슷한 물범으로 오인한 것이었다.

그 많던 독도의 강치는 다 어디로 갔을까? 19세기 초반 4만~5만 마리에 이르던 강치는 독도에서 157㎞나 떨어진 일본 오키섬 어부들의 남획으로 멸종됐다. 독도에서 본격적인 강치 사냥은 1903년부터 최신식 선박과 장비를 갖추고 진행됐다. 강치 남획에 나섰던 대표적인 일본 수산업자는 나카이 요자부로(中井養三郞)다. 러시아령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삼을 잡으며 살던 나카이는 1903년 독도에 강치와 해삼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강치 가죽은 비단처럼 부드러워서 고급 가방을 만드는 인기 재료였다. 살과 뼈는 비료로, 지방에서는 기름을 뽑았다. 산 채로 잡은 새끼 강치는 서커스단에 팔았다. 강치 수컷의 생식기는 물개의 해구신(海狗腎)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해구신은 산삼, 녹용처럼 선약(仙藥)으로 꼽혔다. 특히 정력에 좋다고 소문나면서 비싼 가격에 팔렸다. 당시 강치 한 마리가 소 10마리 값이었다고 한다. 이를 알게 된 나카이는 떼돈을 벌 수 있는 강치를 탐냈다. 그는 강치 잡이로 큰 이득을 챙겨 거부가 된다.

■ 일제의 우리 영토 침략의 시작은 독도, 첫 희생자는 바다사자

1903년부터 독도에서 강치잡이를 시작한 나까이는 1904년 한 해 동안만 무려 3,200마리의 강치를 도살했다. 당시 대한제국 조정의 어떠한 허가도 없이 불법적으로 이뤄졌다. 욕심이 생긴 그는 어업을 독점할 수 있도록 독도를 아예 일본 영토로 편입해 달라는 ‘청원서’를 일본 정부에 냈다.

일본의 내무성은 처음엔 나카이의 청원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럴 즈음 일본은 대한제국 지배에 방해되는 러시아를 제거하려고 1904년 2월 러·일 전쟁을 도발한다. 일본이 청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지 10년 만의 일이다. 서해에서 선제 기습공격으로 기선을 잡은 일본군은 러시아 발트함대를 감시하려고 6월 21일 울진군 죽변과 울릉도 사이에 해저전선을 연결하고 망루를 설치했다.

일본 외무성은 러일전쟁이 벌어지자 러시아 함대를 감시해야 한다는 명목 아래 독도 임대 청원을 허락하고, 일본 정부는 슬그머니 독도를 시마네 현에 집어넣었다.

1905년 2월 22일 일본 정부는 독도를 ‘다케시마’라는 이름으로 자국 영토에 포함하는 시마네현 고시 40호를 선포한다. 이것은 일본이 지금까지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는 근거가 됐다. 그 대가로 나카이는 강치잡이를 독차지했다.

공식적으로 제출한 신고서에만 1905년부터 8년간 1만 4000여 마리의 강치를 죽였다. 큰 수컷은 총으로 쏴 죽이고, 새끼가 딸린 어미도 포획하며 새끼까지 몽둥이로 때려 포획했다. 일본 기록에는 1905년에 2800마리, 1906년에 1919마리, 1907년에 2104마리를 잡았다. 신고하지 않은 강치는 몇 배에 달할 것이다.

일본 어부들은 쌓인 강치를 가져가지 못해 독도에 버려두고 갈 정도로 학살했다. 무자비한 강치잡이로 울릉도까지 피 냄새가 진동했다고 한다. 심지어 일본 해군에서 강치잡이 자제를 요청했을 정도였다. 그때부터 독도강치는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다. 19세기 초반 4만~5만 마리에 이르던 강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1941년에 잡은 것은 고작 16마리였다.

1950년대 독도의용수비대가 독도에 있을 때만 해도 약 100마리의 강치가 살았다고 전한다. 하지만 1974년 일본 북해도에서 한 마리가 생포된 것이 마지막 모습이었다. 지금 정부는 강치 복원사업에 나서고 있다.

우리 땅의 호랑이는 일제 강점기에 자취를 감췄다. 일제의 우리 영토 침략의 시작은 독도였고, 그 첫 목격자이자 희생자는 강치였다. 2015년 8월, 정부는 광복 70주년을 맞아 독도에 강치 벽화를 새겼다. 강치는 독도의 주인이었고, 독도는 강치잡이를 통해 일본이 영토 야욕을 불태웠던 학살현장이었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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