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에서 지구는 오직 단 하나"

[내외뉴스통신 칼럼] 한석만 교수 = 우리는 우주에서 유일한 지적 생명체 이다. 그것은 우주가 말하고 있다. 지구라는 환경이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희박한 우연처럼 탄생되었듯 인간도 그런 우연이 억겁이 연속되어 탄생되었을 것이다. 그런 자연환경이 지금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고 있다.

공룡이라는 생명체가 우리보다 먼저 이 땅을 지배하였고, 어떤 이유로 사라졌는지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지구에서 태어나고 자란 생명에 선배인 것은 분명하다. 지구 안에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순환에 고리를 형성하며 수십억 세월을 버티어온 것처럼 누군가는 희생되었다는 것이다. 지구라는 인규베이터(Incubator) 속에서 생명력을 유지시킬 수 있는 어떤 작용에 의하여 모든 생물이 살아가듯 그런 공간에서 끊임없이 탄생하고 먹고, 자라고, 그리고 죽고 또다시 탄생되는 순환의 고리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고리가 또 수십억년이 흘러서 과잉(過剩)이 된다면 무슨 이유에서건 또 다시 소멸하듯 지구 안에 있는 생명유지 장치는 최적화된 시스템을 갖추고 수많은 생명체를 진화시켜 왔으나, 결코 대량 증식이나 포화(飽和)를 용납하지 않았음을 알아야 한다. 즉, 공급이 수요를 넘어가지는 안는다는 것이다.

인간이 늘어남에 따라 다른 생명이 사라지듯 우리가 모르는 양적 질량은 항상 같게 유지 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지구가 아직까지 유지되어온 자연 순환적 시스템이라는 것이다.

다른 객체가 늘어나면 그러한 객체 또는 다른 객체가 감소하여 늘어난 만큼을 소멸하는 논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지구라는 생태계에서 우리는 더 이상 벗어날 수도 벗어나서 그러한 생명력을 유지한다는 것은 순환하는 생명력을 거부함으로 이러한 연결고리가 끊어짐과 동시에 생명이 멈추듯 그렇게 지구는 멈추어 버릴 것이다.

아직은 생명력을 유지하는 장치가 작동하고 있고, 작동된 시스템이 지구에서 살고 있는 모든 생명을 키우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이 생명력을 부여한 것이 아니라 이 지구가 그러한 생명을 탄생 시키고 키워왔다는 사실을 한 순간도 잊어서는 안 된다. 단지 인간은 그러한 시스템 속에 개체로 순응하며 적응하였을 뿐이다.

지구상 모든 생명은 우연한 탄생으로 시작되었기에 그 누구도 종속 받을 필요도 없으면 소멸하여도 또 다른 우연으로 새로운 생명이 재탄생될 뿐이다. 인간이 이 지구상에 사라 진다해도 또 다른 우연에서 자란 다른 지적 생명을 또 키워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구에서 태어난 지적 생명체가 지금처럼 육식을 하고 산다는 것은 아마도 우리들 생각일수도 있을 것이다. 먹는 방식을 새롭게 바꾸어 나가는 생명체가 탄생될 것이라는 것이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명체는 동등하며 그러한 동등함 속에 누구를 먹고 먹히는 종속적 관계가 아닌 서로가 함께 지구에서 태어나고 자란 생명체 일 뿐이다.

결국 모두 변화할 것이다. 인간도 사라지고 또 다른 생명이 새로운 형체로 새로운 먹이 사슬로 공존하는 길을 탄생시킬 것이다. 그 탄생은 인간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차원이 다른 개념이 될 것이다. 단지 그 시간이 인간이 생각하는 기간과 우주의 시간적 개념이 차이가 있을 뿐이다.

수많은 별 중 과연 우리와 같은 지적 생명력을 가진 별이 있을까? 필자는 없다고 본다. 우연이 우연을 창조하듯 그런 우연은 그리 흔하게 탄생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이 우주에서 지적 생명체를 찾은 기간 동안 인간은 지구의 법칙에서 보면 이미 사라져 있을 수 있기에 그런 노력이 헛되 시간일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 시간이 언제 멈출지 모르기에 또 다른 생명체를 찾아 나설 뿐이다.

고로 지구상 모든 생명은 아름답고 가치가 있다. 우주보다 더 큰 가치와 생명력이 바로 우주인 것이다. 우주 속에 살아가는 생명, 수많은 우연과 헤아릴 수 없는 과학적 확률이 그리고 일치로 그냥 우리는 존재할 뿐이다. 그 존재 가치가 있던지 없던지 그냥 지구 속에 살아갈 뿐이다. 고로 우주에서 지적 생명력을 가진 별은 오직 지구뿐일 것이라는 믿음이 있다.

두 가지 가설을 생각해 보자, 첫째 지구와 같은 별이 있다. 둘째, 지구와 같은 별이 없다. 이러한 가설 중 우리가 쉽게 짐작하고 맞을 확률적 가설은 있다 보다 없다가 더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즉, 있다 보다 없다가 더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쉽고 접근 가능한 현재의 논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가설은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증명해야 함에 있어서 그 생명력이 꺼진다면 어떤 것이 더 증명이 가능 한가이다. 밝혀진 것이 없기에 없다가 더 설득력이 있는 논리다. 즉, 입증할 수 없다면 없다가 지금으로써는 정답이다. 있다를 과학적으로 증명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한 인간이 지구상 모든 생명체에 대하여 죽이고 먹고 한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가 없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무에서 무로 모든 것이 지구라는 환경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을 사육할 뿐이고 그런 사육 환경에 의하여 유지될 뿐이다. 결국 인간도 지구 안에서 자연적으로 사라진다는 것이다.

인간이 살아감에 있어 두 번 다시 오직 않은 삶을 행복하게 사는 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최선의 행동이라는 것이다. 부활도 윤회도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기에 지금은 없다 이다.

인간은 어떤 테두리 내에서 학습을 통해 인간이 만든 룰에 따라 어떤 인간은 그 룰에 대하여 빨리 적응하고 그러한 룰을 그 자손에게 전파해줌으로 부자가 되고, 어떤 인간은 그 룰을 이해 못함으로 아직도 가난하게 산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머리가 아닌 룰을 누가 빨리 이해하는가에 따라 부가 갈린다는 것이다.

이치를 빨리 깨닫는 것이 부자가 더 빨리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룰이 절대로 부자가 될 수 없는 시스템적 모순을 가지고 있으나 그 모순을 다른 인간보다 다르게 해석하고 이해하고 행동하는 시각적 공간적 다름이 그 이치를 깨닫는 것과 같다. 즉 보통 인간이 생각하는 룰은 합법적이며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법적 테두리 법주에서 행동한다면, 부자들은 이러한 범주를 깨고 비논리적 접근을 통해 남들이 생각하지 않은 부를 창출한 것이다.

그들이 잘 나서 머리가 똑똑해서 부자가 되었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무모함이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의식이 뚜렷하다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한다는 것이다. 결국 남들이 하지 않은 도전이 그 들을 부자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부자는 끊임없이 그러한 방법을 연구하고 모색함으로 다른 인간과 구별된 행동을 자자손손 이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주의 비밀을 풀듯 부자가 부자로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했을 뿐이다. 감옥이라는 공간과 세월은 그들에게 있어 찰나(刹那)일 뿐이고, 부는 영원하다는 것을 그들은 스스로가 깨달았을 것이다. 그것이 부자로써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한석만 박사

현) (사)한국부동산경제협회 상임이사

현) (사)한국주거환경학회 이사

현) 한국부동산학 박사회 부회장

현) 한국신문방송언론인협회 이사

현) 서울벤처대학원대학교 평생교육원 교수

현) 내외경제TV/서울경제TV/아시아경제TV/이데일리TV 등 다수 경제TV 부동산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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