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이 명나라로부터 마카오를 점유한 게 1557년. 그로부터 조선과 이양선의 접촉은 적지 않았다. 조선에서는 서양 선박을 이상하게 생겼다고 하여 ‘이양선·異樣船’ 또는 황당하게 크고 빠르다 하여 ‘황당선’이라 불렀다. 16세기 조선의 바다에 출몰한 이양선은 대부분 포르투갈 배였다. 이어 17세기에는 주로 일본 나가사키를 오가던 네덜란드 배가 출현했다. 이런 사실은 박연(벨테브레)과 하멜 등의 사례에서 잘 알 수 있다. 18세기 들어서는 네덜란드를 비롯해 영국, 프랑스 등 유럽 각국의 범선이 출몰했다.

이양선들이 조선을 찾은 목적은 여러 가지다. 조난이나 피항, 물자 보급, 항로개척이나 해안선 탐사, 무역 통상과 선교, 포경, 군사적 목적 등이었다. 1840년대부터는 동해에 고래가 엄청나게 많은 것을 알게 된 서구의 포경선들이 몰려왔다. 그 무렵 조선의 해역에는 수많은 이양선이 출몰한 기록이 남아 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서구 열강의 선박 출몰은 더욱 활발해졌다

대개 한미 관계 시작을 1866년(고종3) 대동강에서 일어났던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1871년(고종8) 강화도에서 벌어진 신미양요(辛未洋擾)만을 주목한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한국과 미국은 포경을 매개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17세기부터 뉴잉글랜드 지방을 중심으로 연안 포경이 시작되어, 점차 원양 포경으로 발전했다. 첫 원양 포경선은 1791년 태평양에 진출했으며, 1820년대에는 태평양을 횡단해 일본 근해까지 진출했다. 미국 포경선은 1843년 캄차카 어장을 개척했고, 1847년 오호츠크해 어장을 열었다. 1848년에는 베링해 어장을 개척했다. 동해는 각종 고래 자원이 매우 풍부했다. 1840년대 중반부터 미국 등 전 세계 포경선이 동해에 진입하게 된 것은 이러한 극동 수역 포경 어장 개척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 조선은 언제부터 미국을 인식했을까?

우리나라를 처음 방문한 미국인은 고래를 잡으러 온 포경선원이었다. 1852년 12월 21일(음력, 철종3년) 부산 동래부 용당포 앞바다에 미국 포경선이 표착했다. 배에는 미국인 42명, 일본인 2명이 승선했다. 우리나라와 미국이 처음으로 조우한 순간이었다.

동래부사 유석환은 배에 올라 국적 등을 물었다. 당연히 대화가 안됐다. 이듬해 1월 6일 경상감사 홍설모가 조정에 올린 보고서에는 “그들의 머리가 고슴도치 같고, 자신을 가리키며 ‘며리계’를 여러 번 지껄였다”라고 기록했다. 아메리카(America)를 ‘며리계’로 듣고, 한자 ‘여리계·旀里界’로 표기했던 것.

영어 ‘America’는 보통 ‘A’가 약하게 발음된다. 그러니 잘 듣지 못하고, 연이어 ‘메리커’도 ‘메’에 강세가 있기 때문에 한자로 ‘며리계’라고 쓴 것으로 추정된다. ‘며’에 강세를 두고 읽어보면 사뭇 비슷하다. 그 당시 부산에 왔던 배는 미국 포경선 사우스 아메리카 (South America)로 당시로서는 대형인 616톤의 선박이었다. 우리 측 자료에는 없지만, 그 배의 항해일지를 연구한 고 박구병 교수에 따르면 선원들은 부산에 내려서 사냥도 했던 것으로 기록 되어있다.

조선과 미국의 첫 조우는 서로 인식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우리 측 기록 <일성록>에 의하면, “말이 통하지 않아 필담을 시작했지만, 그들이 쓴 글씨는 구름 같기도 하고, 그림 같기도 하고, 전서(篆書)도 언문도 아니어서 도무지 알아볼 수가 없었다.”라고 썼다.

지방 관리의 보고대로 언어의 불통 때문에 우연한 조우로 끝나고 말았다. 미국 선적의 그 포경선은 부산항에서 열흘 동안 머물다가 떠났다. 그 무렵 동해안에서 외국 포경선의 조난이나 불법 상륙은 빈번하게 일어났다. 일본에서 페리 제독의 함대가 무력시위를 벌인게 1853년 7월이다. 1852년 미국 포경선의 우연한 부산 표착은 어쩌면 조선에게 국익의 호기가 될 수 있었다.

1860년대 이후 포경선과 상선 등 미국 선박이 더욱 빈번하게 출현했다. 흥미로운 것은 우리나라는 미국을 비슷한 소리를 만들어내서 ‘아미리’(亞美里)로, 일본에서는 ‘아묵리가(亞墨利加)로, 중국에서는 ‘미리견국’(彌利堅國) 혹은 ‘미리견 합중국’(彌利堅 合衆國)으로 불렀다는 점이다. 후일 조선의 최한기는 미국에 대한 일본식 표기와 중국식 표기를 적당히 조합해 ‘북 아묵리가 미리견 합중국’(北亞墨利加米利堅合衆國)이라고 불렀다.

한편 산업혁명 이후 크게 발전한 미국의 포경 산업은 일본 개항의 단초가 됐다. 고래 기름과 수염 등을 노린 미국이 일본을 태평양을 항해하는 자국 포경선의 보급기지로 삼기 위해 강제적으로 개항시켰기 때문이다.

■ 동해 포경선에 비롯된 한국과 미국과의 접촉

1983년 11월 12일, 미국 레이건 대통령이 일본을 거쳐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한국 언론은 레이건의 방한을 전두환 정권의 업적인 것처럼 선전했다. 그러나 외교부가 2014년 3월 27일 자로 공개한 1983년도 비밀외교문서에 따르면 사실이 아니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취임 초기인 1981년부터 이미 미국 대통령의 방문을 요청한 것으로 드러났다.

1981년 9월 백악관에 보낸 친서를 보면 전두환은 “본인과 내자(당시 영부인 이순자)가 내년 서울에서 각하를 영접할 수 있는 기쁨을 갖게 되길 바란다”라며 레이건의 방한을 간절히 부탁한 사실이 나온다. 정통성 없는 전두환 정권이 레이건의 방한 이벤트를 통해 미국의 인정을 받고 있다는 이미지를 국민들에게 보여주려고 집권 초기부터 얼마나 노력했는가를 이 문서들은 잘 보여준다.

전두환 정권은 레이건 대통령 방한에 맞춰, 모든 정부 부처를 동원해 대규모 환영행사를 열었다. 특히 공항에서 여의도 국회에 이르기까지 카퍼레이드 경로와 주요 행사장 길가에는 학생과 시민 100만 명을 동원해 대대적으로 레이건을 환영했다.

레이건은 전국에 TV로 생방송 된 국회 연설에서 뜻밖에도 19세기 조선에 표류해온 미국 선원들을 따뜻하게 대우해주고, 중국을 통해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준 우리 민족의 선행을 소개했다.

레이건이 언급한 것은 1855년(철종6) 7월 강원도 통천에 표착한 미국 포경선 ‘투브라더스(TWO BROTHERS)호’ 선원이다. 이 배의 선원 4명에 대한 구조 이야기는 한국과 미국에 자세한 기록이 남아있다. 이들 4명은 우리나라 땅에 상륙한 최초의 미국인들이었다. 23세의 멜빌 켈시 등 20대 전후 젊은이였다.

조선은 청나라 외에는 다른 나라와 수교가 없었으므로, 이방인은 청국으로 보내는 것이 관례였다. 표류 선원을 북경까지 호송해서야 이들이 미국인 (미리견인·彌利堅人)임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사실 이들은 포경선에서 비인간적 처우에 반발해 탈출한 20대 전후 젊은 선원들이었다. 강원도 어민 앞에서 눈물까지 흘리며 기막힌 신파 연극을 했던 미국인들은 진짜 난파했던 배의 선원들이 아니었던 것. 미국 최대 포경기지 뉴 베드퍼드 항 소속 포경선 투 브라더스호에서 학대받다가 도망친 선원들임이 밝혀졌다.

죽을힘을 다해 조선으로 탈출해서 상해까지 갔던 선원 네 명의 운명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들은 고향 땅을 밟는 대신, 미국법에 따라 계약 의무를 다하도록 원래 타던 포경선으로 다시 보내졌다. 그럼에도 그들은 “조선인은 온갖 친절로 의복과 음식을 후하게 주고, 우리를 인간답게 대우했다”라고 증언했다.

■ 원스 어폰 어 타임 1855년 동해, 외국 포경선의 천국

미국인들을 감동하게 해서 대통령의 입에 오르기까지 했던 미국 선원 구조 선행은 조선말에 여러 차례 더 있었다. 1866년 5월 평안도 철산에 표착한 ‘서프라이즈’호의 선원 8명도 조선의 배려로 중국을 통해 귀국할 수 있었다. 조선의 <일성록 日省錄> 1866년 5월 21일(음력)에는 암호 같은 기록이 있다. “서양 인명과 지명을 한자로 기록하기 어려워 언문으로 기록했다”라는 철산 부사의 보고와 함께, “난파된 배는 화기국(花旗國)의 상선으로서 ‘미ㅾl쓸넌’과 ‘미실낙기’는 누야우地에 산다.”는 식이었다.

‘화기국’이라는 이름은 미국 선박이 내건 ‘성조기’(星條旗)’에서 기원했다. ‘누야우’는 뉴욕(NewYork)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지만, ‘미ㅾl쓸넌’과 ‘미실낙기’라는 사람 이름은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하기 어렵다. 그때까지만 해도 표착한 이양선에 대한 조선 측의 태도는 관대했다. 이양선이 오면 사정을 알아본 뒤 식량을 넉넉하게 제공했으며, 결코 대가를 받지 않았던 게 관행이었다.

1866년 8월에는 한미 관계를 엮는 중요한 사건이 발생한다. 통상의 길을 트기 위해 대동강을 타고 평양에까지 올라온 미국 선적의 ‘제너럴 셔먼’호가 불태워졌다. 셔먼호는 무리하게 평양까지 올라와 교역을 요구하다가 사고 난 경우다. 1871년 3월에도 ‘셔먼’호의 행방과 통상의 길을 찾기 위해 강화도 앞바다까지 들어왔던 미국 함대를 격퇴하는 신미양요가 발생한다. 이를 계기로 전국의 요소마다 서양인과의 화친을 거부하는 이른바 척화비를 세우게 됐다. 그 후 조선은 일본의 강압에 못 이겨 1876년 통상조약을 맺었다. 미국과는 1882년 통상 수호조약을 맺고, 척화비를 없앴다.

오늘 우리가 미국이라고 부르는 나라를 조선은 ‘며리계’(㫆里界)라고 호칭했다. 또 중국의 방식대로 화기국(花旗國), 혹은 미리견(彌利堅)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러다가 편의상 줄여서 ‘미’자만 남았다. 처음에는 쌀 미(米)를 거쳐 미국(米國)으로 표기하다가 지금의 아름다울 미(美) 자를 써 미국(美國)으로 칭했다. 여차하면 미국이 아니라 ‘메국’ ‘주한 메군’ ‘메국 대통령’이 될 뻔했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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