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내외뉴스통신] 김현옥 기자 =배를 매고 배를 밀었다가 느닷없이 후진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상처를 입은 사람이 있었다. 생각지 못했던 상실로 빈 마당에 서서 왼쪽 가슴 아래께를 자꾸 만지던 장석남 시인이 <꽃 밟을 일을 근심하다>(창비)를 들고 돌아왔다.

십 수 년 전 장석남은 면도를 한 후 애프터쉐이브를 바른 모습이더니, 이번에는 벙거지를 쓰고 수염을 기른 여행자 차림이다. 그간 어디서 무얼 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을 한다.

“소매 끝으로 나비를 날리며 걸어갔지/바위살림에 귀화를 청해보다 돌아왔지/답은 더디고/아래위 옷깃마다 묻은 초록은 무거워 쉬엄쉬엄 왔지/푸른 바위에 허기져 돌아왔지/답은 더디고”(‘소풍’)

서른 여섯 적 살구나무에 올라 딴 열매 속에는 별자리의 행렬이 보이고, 팥배나무 하얀 꽃들로 덮인 바위 속도 잘 보이더니, 지금은 꽃잎과 열매가 내려온 길들 조차 잘 보이지 않나보다다. 영원한 지혜와 소멸을 상징하는 바위 앞에 금방 배고픔을 느끼는 건 이 때문일까.

“부엌문이 열리고/솥을 여는 소리//누굴까?//이내 천천히 솥뚜껑을 밀어 닫는 소리//벽 안에서/가랑잎 숨을 쉬며 누워/누군가?하고 부를 수 없는 어미는//솥뚜껑이/열리고/닫히는/사이에/크고도 깊은 쓸쓸한 나라를 세웠으니//국경처럼 섰는 소년이여”(‘녹슨 솥 곁에서’ 중)

들킨 허기에 나라를 잃은 사람처럼 서 있던 시인은 어머니의 가랑잎 숨이 내는 갈잎소리에서 영원한 소멸을 찾고자 한다.

“나는 긴 비문을 쓰려 해, 읽으면/갈잎 소리 나는 말로 쓰려 해/……//나는 가장 단단한 돌을 골라 나를 새기려 해/꽃 흔한 철을 골라 꽃을 문질러 새기려 해/이웃의 남는 웃음이나 빌려다가 펼쳐 새기려 해”(‘불멸’ 중)

대장간 연금술사처럼 그는 고대적 언어로 ‘크고도 깊은 쓸쓸한 나라’ 같은 ‘사랑을 한번 더’ 주문한다.

“불을 모시던 풍습처럼/쓸모도 없는 호미를 하나 고르며/둘러보면,/고대의 고적한 말들 더듬더듬 걸려 있다//주문을 받는다 하니 나는 배포 크게/나라를 하나 부탁해볼까?/사랑을 하나 부탁해볼까?”(‘대장간을 지나며’ 중)

놀던 기타를 팔고 한바탕 울고 난 다음 “큰 가을을 샀네”라고 위안하는 시인은, 배를 매다가 상처를 입었던 바다로 기어이 다시 간다. 이번에는 통 크게 바다를 아예 마당에 끌어들인다.

“마당에 들인 바다 속으로/나의 노래 가라앉고/바다에 들인 하늘이/나의 숨을 집어먹고/나는 온몸을 파랗게 펄럭여서/못 깨우친 사랑을/거기서 깨우칠 거야/악기를 하나 배워/비양도쯤에나 가야겠어/가슴에 바다를 들여야겠어”(‘악기나 하나 들고’ 중)

그곳에서 꽃과 노을을 쓸며 밤새 뒤척이다 “꽃에게 졌다”고 말하는 시인은, 입춘을 앞두고 들뜬 마음으로 꽃 밟을 일을 걱정한다.

“끓인 밥을/창가 식탁에 퍼다놓고/커튼을 내리고/달그락거리니/침침해진 벽/문득 다가서며/밥 먹는가,/앉아 쉬던 기러기들 쫓는다//오는 봄/꽃 밟을 일을 근심한다/발이 땅에 닿아야만 하니까”(‘입춘 부근’)

하지만 염려 안 해도 될 듯 합니다. 사랑의 법칙이 그렇듯, 우리가 디딘 발 밑에서 말랑말랑한 흙이 솟아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무거울수록 더 깊고 단단하게 말이죠.

“그러나 아직 눈밭이고/여자를 업은 한 남자가 두사람 무게의 깊은/발자국을 남긴 것 말고는/아무것 없습니다//풀뿌리들이 소곤거리기 시작했으니/곧 발자국에서/흙이 올라올 겁니다//무거웠던 자국에서/가장 먼저 흙이 올라올 겁니다”(‘한 소식’ 중)

fargo3@nbnnews.co.kr

내외뉴스통신, NBNNEWS

기사 URL : http://www.nb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94093

저작권자 © 내외뉴스통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