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봐도/ 가슴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네/ 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앉았네/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 삼등 삼등 완행열차 기차를 타고/ 신화처럼 숨을 쉬는 고래 잡으러…”

세월은 가도 음악은 남는다. 통기타 가수 트윈폴리오와 세시봉의 대명사인 송창식은 1974년 ‘피리 부는 사나이’에 이어 1984년 ‘고래사냥’을 발표했다. 노래는 최인호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에 담겼다. 미지의 망망대해를 헤쳐 가는 고래의 장대한 모습은 젊음의 고뇌에 대한 표상이었다.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7080세대는 그야말로 ‘고래고래’ 목놓아 불렀다. 이 노래는 당시 대학가가 안고 있던 절망과 희망을 대변하면서 청년들을 끊임없이 선동했다. 전두환 신군부 정권에 맞서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1980년대, 온갖 시위 현장에서 운동가로 불리기도 했다. 그리고 ‘퇴폐와 자학’이라는 낙인이 찍힌 채 금지곡이 돼버렸다.

■ <자산어보>에서는 고래를 고래어(古來魚)

‘고래사냥’ 노래 가사처럼 고래는 우리 민족 숱한 신화 속에 살아 숨 쉬는 존재다. 효녀 심청이의 용궁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연오랑 세오녀’ 설화에 나오는 움직이는 바위가 바로 귀신고래라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실학자 정약전이 흑산도 유배 중에 쓴 어류학서 <자산어보>에서는 고래를 고래어(古來魚)라고 표현했다. 오래전부터 인간과 함께 있었던 물고기라고 여겼다. 정약전은 고래가 사람이나 소처럼 새끼를 낳아 젖을 먹이는 포유동물임을 몰랐던 것 같다.

<자산어보>에서는 또 범고래, 토종 돌고래 상괭이, 사람을 닮은 ‘옥붕어’란 인어 이야기가 나온다. 사람들은 대체로 인어가 서양의 전설이나 동화 속에만 나오는 줄 알지만, 한국이나 중국 등 동양권에서도 전해오는 인어 이야기가 적지 않다.

우리 선조들은 동해를 고래의 바다, 경해(鯨海)라 불렀을 정도로 고래가 많았다. 쿠로시오 해류의 지류인 쓰시마 난류와 북한 한류가 맞부딪혀 섞이는 동해는 고래의 주 먹이인 새우와 오징어가 풍부했다. 또 남북으로 이동하는 고래 떼의 계절적인 통로이기도 했다.

울산 장생포는 1891년 러시아 황태자 니콜라이 2세가 일본으로 가던 중 장생포 앞바다에서 큰 고래 떼를 발견, 이곳을 고래 해체장으로 이용하면서부터 고래 마을이 됐다고 한다. 고래 고기는 해방 당시까지 대중적 음식이었다. 소나 돼지가 귀한 시절, 고래 고기만 한 단백질 섭취원이 드물었다. 일제 강점기부터 포경선이 드나들던 장생포는 해방 이후에도 상업포경이 금지될 때까지 국내 고래잡이의 전진기지였다.

■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서 볼 수 있는 고래는?

2014년 여름에 개봉해 화제가 된 영화 ‘해적, 바다로 간 산적’은 조선 개국 초 고래가 국새를 삼켜 일어나는 사건을 다뤘다. 동해 연안에서 가장 많이 분포했던 고래인 귀신고래를 소재로 만들었다. 그런데 실제 영화에 등장하는 고래는 귀신고래와 유사한 혹등고래로 길이가 16m에 달한다.

<고려사>에는 997년(성종16) 8월 왕이 동경(경주)에 행차했다고 적었다. 9월에 흥례부(울산) 태화루(太和樓)에서 연회를 베풀었고, 이때 ‘큰 고기’가 잡혔다는 기록이 있다. ‘큰 고기’는 아마 고래 종류인 것 같다.

왕의 지방 순행이 쉽지 않던 시기에, 경주와 울산 방문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뚜렷하지 않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을 것이다. 고려의 기틀을 다지고 성군이라 칭송받던 성종은 울산 행차 후, 곧 병이 나서 10월에 눈을 감았다. 재위 기간 16년 3개월 만이었고 당시 나이 38세로 꽤 젊은 나이였다.

국립수산과학원 고래연구소가 펴낸 도감에는 우리 바다에 고래 30여 종이 사는데 이 가운데 성체 길이가 15m가 넘는 것은 7가지라고 설명한다. 봤다는 이야기만 전해지는 길이 33m 대왕고래(흰긴수염고래)와 참고래(긴수염고래), 보리고래와 브라이드고래 등이다.

2004년 영국 BBC는 인류 최초로 고래잡이를 한 곳이 한반도라고 보도해 큰 관심을 모았다. BBC가 제시한 근거는 반구대 암각화였다. 이 암각화는 최소 5000년 전부터 만들어졌다. 선사시대부터 고래를 잡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반구대 바위에는 호랑이, 멧돼지 등의 육지동물을 사냥하는 장면과 작살 맞은 고래 등 총 200여 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고래 관련 그림이 전체의 5분의 1인 58점이나 된다. 우리말에 ‘고래 등 같은 기와집’ ‘술고래’ ‘고래 힘줄 같은 고집’ 등을 봐도 고래는 조상들과 관계가 밀접했음을 알 수 있다.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진 고래 그림을 보면 오랜 시간 가까이서 관찰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표현할 수 없는 특징들이 보인다. 영일만 지역에 고래가 많이 몰려왔던 이유는 고래들이 이곳에 와서 해산하고, 조혈과 젖 생산을 돕기 위해 미역을 먹기 위한 것으로 설명한다.

암각화는 말 그대로 바위에 새겨진 그림이다. 문자가 존재하기 이전 인간의 가장 오래된 예술 표현이자 일종의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전 세계적으로 암각화는 북방 문화권과 관련된 유적으로 우리 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알려주는 소중한 자료다.

■ 고뢰! 우리 바다에 이렇게 고래가 많았나?

귀신고래는 우리나라 연안에서 살던 대표적 고래였다. 세계에서 우리 학명 ‘KoreanGreyWhale’이 붙은 유일한 고래다.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 선사시대 귀신고래가 출몰했던 형상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최대 16m에 달하는 귀신고래의 몸체는 기생하는 따개비에 의한 상처로 흉측한 모습이다. 또 머리와 입 주변은 흉터투성이다. 개펄을 기어 다니는 갑각류를 좋아하는데 먹이를 먹기 위해서 머리로 개펄을 헤집기 때문이다. 귀신고래는 혹등고래와 함께 수면 위에서 가장 활동적인 고래이기도 하다.

배 근처에서 수면 위로 솟아올라 입에서 물을 토해내면서 떨어지는 ‘고래 뛰기’가 장관이다. 회백색 몸체를 하늘로 비상해 수면을 때리는 동작이나 머리를 수면에 수직으로 세워 주위를 둘러보는 듯한 행동을 한다. 그야말로 신출귀몰하는 것이 옛사람의 눈에 귀신같이 보였다.

귀신고래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전 세계에서 두 집단이 분포했다. 태평양을 건너편의 캘리포니아 귀신고래는 알래스카에서 먹이를 먹고 아메리카 서해안을 따라 따뜻한 멕시코까지 가서 번식하는 무리이다. 한국계 귀신고래는 사할린 어딘가에서 몸집을 불린 뒤 동해나 남해의 다도해에서 번식하는 것으로 추정해 왔다.

한국계 귀신고래를 세계에 알린 이는 미국의 탐험가이자, 동물학자인 로이 채프만 앤드루스(1884~1960)이다. 영화 <인디아나 존스>의 고고학자 모델이다. 그는 1912년 울산 장생포에서 포경선에 잡혀온 귀신고래가 캘리포니아 귀신고래와 같은 종이지만 다른 집단임을 발표했고, ‘한국계 귀신고래’란 이름을 붙였다.

앤드후스가 포경선에 잡힌 귀신고래를 도포 입은 한국 사람들과 함께 찍은 사진은 전 세계의 귀신고래 관련 서적에 빠지지 않을 정도로 유명하다. 도포를 입고 담뱃대를 소매에 꽂은 한국인의 모습이 당시의 시대상황을 잘 표현한다.

귀신고래는 19세기부터 시작된 미국과 일본 포경선의 남획으로 멸종 위기에 빠졌다. 일제는 1911년부터 1933년까지 한반도 연안에서 귀신고래 1304마리를 잡은 것으로 집계했다. 일부일처제로 금실이 좋아 암놈이 죽으면 수놈이 곁을 지키다가 같이 잡혀 죽음을 맞는다고 한다. 가족 간 우애가 사람과 흡사하다. 새끼가 먼저 작살을 맞으면, 암수 어미가 새끼 곁을 빙빙 돌다가 마침내 같이 잡힌다. 동물의 정을 역이용한 인간의 야비한 사냥 방식이다. 산모가 미역국을 먹게 된 것도 귀신고래로부터 배웠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한국계 귀신고래는 1977년 이후 동해에서 자취를 감춰 천연기념물 126호로 지정됐다. 현재 약 130마리가 러시아 사할린 근해에서 확인된다. 번식 가능한 암컷은 20여 마리에 불과하다. 전 세계 멸종 위기종 고래 가운데 가장 급박한 처지다. 국제자연보전연맹(IUCN)은 ‘멸종 위급’ 종으로 분류한다. 캘리포니아 귀신고래는 보호 정책이 주효해 현재 18,000마리 이상으로 불어났다. 느리게 해안 가까이 이동해 미국과 캐나다에서 고래관광의 중요한 대상이다.

동해에서 귀신고래를 다시 보려면 사할린에 일부 남아있는 귀신고래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야 한다. 문제는 사할린 개체군이 워낙 작은 데다 어업용 그물에 걸려 죽는 혼획, 빈번한 해상 운송에 따른 오염과 충돌, 유전개발 등 위협요인이 상존한다는 것이다.

■ 뉴질랜드 마오리족의 신화를 담은 영화 ‘웨일 라이더’

뉴질랜드의 원주민인 마오리족에게는 고래 등을 타고 온 조상 이야기와 고래 자체가 그들의 조상이라는 신화가 있다. 부족의 조상이 고래를 타고 왔다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영화 ‘웨일 라이더(The Whale Rider)’는 뉴질랜드 출신 감독에 의해 마오리족의 전설을 담았다. 고래와 인간의 상호 환생 사상은 원시 고래잡이 문화에서 볼 수 있는 공통점이다. 고래 문화의 흔적은 한반도와 알래스카, 폴리네시아와 뉴질랜드를 비롯해 아메리카 원주민 등 환태평양 연안에서 공통으로 나타난다.

전설에 살이 붙고 뼈가 굵어지는 것은 전설이 생명력이 있다는 증거나 다름없다. 마치 동해 바닷가에 살던 연오랑과 세오녀를 태우고 일본으로 간 ‘바위 같은 물고기’가 바로 고래라는 해석과 맥락을 같이한다.

요즘 동해안에서는 밍크고래와 참돌고래, 낫돌고래와 흑범고래 등 비교적 작은 개체들은 자주 목격된다. 이따금 그물에 걸렸다가 구조돼 치료와 보호를 받는 상괭이는 귀여운 모습과 애교로 사람들의 관심을 독차지한다. 2015년 2월, 중순 길이가 13m에 달하는 긴수염고래가 남해 양식장에서 발견돼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1974년 동해에서 포경선이 잡은 이후 단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던 북방 긴수염고래가 그야말로 ‘불쑥’ 나타난 것이다. 사람으로 치면 아직 청소년기에 불과하지만, 눈앞에서 거대한 모습을 목격한 고래 학자들은 감회가 남달랐다.

국립수산과학원은 귀신고래를 사진으로 찍으면 500만 원, 그물에 걸리거나 좌초한 개체를 신고하면 1000만 원을 주겠다고 포상금을 내걸었다. 현상금이 걸린 동물은 귀신고래가 유일하다. 현재까지 혹등고래를 오인해 신고한 것은 있지만, 진짜 귀신고래를 보았다는 사람은 없다. 귀신고래가 우리 바다에서 머지않아 볼 수 있는 날이 오길 기대한다.

“푸른 바다에 고래가 없으면/ 푸른 바다가 아니지/ 마음속에 푸른 바다의/ 고래 한 마리 키우지 않으면/ 청년이 아니지.” 정호승 시인의 ‘고래를 위하여’라는 시의 한 대목이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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