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3년 2월 11일 폭풍우가 몰아치던 밤. 태평양 하와이 근처를 지나던 포경선 ‘투 브라더스’호가 산호초에 좌초됐다. 배가 가라앉는 사이 조지 폴라드 선장을 비롯해 선원 약 20명은 다른 포경선의 도움으로 다행히 목숨을 구했다.

하지만 소설 <모비딕>의 모티브가 된 포경선 ‘에식스’호의 비극을 딛고 재기를 꿈꿨던 폴라드 선장은 불운했다. 또다시 투 브라더스호 침몰을 계기로 바다를 떠나야 했다. 폴라드 선장의 꿈과 함께 바닷속으로 가라앉았던 포경선 ‘투 브라더스’호는 해양 고고학자들의 노력 덕분에 정확히 188년 만인 2011년 2월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나무로 만들어진 배 대부분은 약 200년간 하와이의 따뜻한 물속에 잠겨 있으면서 사라졌지만, 작살과 고래기름 정제용 냄비와 솥 등이 산호초에 둘러싸인 채 발견됐다. 폴라드 선장은 허먼 멜빌(1819~1891)의 명작 소설 <모비딕>이 탄생하는 데 영감을 준 에식스호의 선장으로 잘 알려졌다.

■ 비운의 폴라드 선장과 소설 <모비딕>

19세기경, 난폭하기로 유명했던 ‘모카 딕’(Mocha Dick)이라는 향유고래가 있었다. 대략 1800년경쯤 태어난 이 고래는 매우 영리해서 뱃사람들 사이에 악명 높았다.

1819년 여름, 238t의 포경선 에식스호는 미국 매사추세츠 낸터킷 섬에서 출항해 일상적인 고래잡이에 나섰다. 1800년부터 1840년까지 낸터킷은 세계에서 가장 붐비는 포경선 항구였고, 지역 경제는 포경업에 의존했다.

1820년 11월 20일 에식스호는 남태평양에서 24m가 넘는 향유고래 ‘모카 딕’에 받혀 침몰한다. 겨우 살아남은 폴라드 선장과 선원 19명은 3척의 구명보트에 나눠 타고 망망대해를 헤맸다. 7,200㎞를 표류한 끝에 93일 만에 칠레 인근에서 구조됐다. 살아남은 선원은 겨우 8명. 3년 후 투 브라더스호를 타고 다시 항해에 나섰던 폴라드 선장은 그 배마저 침몰하자, 결국 뱃사람으로서의 꿈을 접고 여생을 뭍에서 야경꾼으로 살았다.

에식스호를 침몰시킨 다음에도 모카 딕은 끊임없이 인간의 욕망과 사투를 벌여왔다. 모카 딕의 활약은 1851년 포경선 앤 알렉산더호를 부숴버린 것이 마지막이었다. 1859년 몸에 19개나 되는 작살을 맞고서 사람들에게 잡혔다는 얘기도 있다.

에식스호 선원들의 기적 같은 생환을 다룬 논픽션 소설 <바다 한가운데서· In the Heart of the Sea>는 구조 당시 처참한 모습을 이렇게 기록했다. “선원들의 살갗은 온통 종기로 덮였다. 눈은 두개골의 움푹 팬 곳에서 툭 튀어나와 있었으며, 턱수염에는 소금과 피가 엉긴 채 말라붙어 있었다. 그들은 죽은 동료 선원의 뼈에서 골수를 빨아먹느라고 정신없었다.” 살아남은 선원들은 바다 한가운데서 물과 식량 없이 3개월간 표류하면서 제비뽑기로 동료의 인육까지 먹었던 것이다. 19세기 최대의 해양 참사였다.

<바다 한가운데서>는 이 비극적인 사건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어졌다. 소설 <모비 딕>이 끝나는 시점 이후부터 진가를 발휘한다. 이 책을 기초로 한 영화 ‘Heart of the Sea’가 2015년에 개봉됐다.

■ 19세기 포경산업은 최대의 비즈니스

유럽에서의 포경은 오랜 기간 바이킹족과 스페인 북부 바스크족(Basques)이 지배해왔다. 미국에서는 일찍부터 인디언들이 고래를 잡고 있었다. 고래는 몸이 아파 죽을 때가 되면 깊은 바다에서 육지 가까이 왔다. 인디언들은 작살을 던져 병든 고래를 잡았다. 고래는 영리해져 아파도 뭍으로 나가지 않았다. 인디언들은 배를 타고 점점 멀리 나갔다. 이렇게 해서 고래산업이 시작됐다.

18세기부터 뉴잉글랜드 지방을 중심으로 한 연안 포경업이 시작되어, 점차 원양 포경업으로 발전했다. 대서양에서 포경 활동이 대폭 확장되면서 남획으로 인해 고래 개체 수가 감소했다. 그래서 19세기 초부터 남반구로 어장을 확대하게 됐다. 포경선들은 인도양과 남태평양·칠레 연안·페루 연안 등을 새로운 어장으로 개척했다. 그리고 포경산업은 마침내 동해를 포함하는 북태평양 지역으로 확장된다. 이 시기에 포경산업은 전성기를 맞게 된다.

19세기 포경업은 미국인들이 주도했다. 미 동부 해안에 위치한 낸터킷(Nantucket)과 뉴베드퍼드(New Bedford)는 <모비딕> 첫머리의 무대이자 19세기 세계 포경업의 중심지였다. 프랑스·러시아·프러시아·영국이 미국의 뒤를 따르는 국가들이었다. 미국은 당시 가장 우수한 선원과 선박들을 보유했다.

고래산업은 19세기 가장 수익성이 높은 대박 비즈니스였다. 19세기 후반부터 석유가 대량생산되기 전까지 고래는 바다를 떠다니는 ‘자원의 보고’였다. 고래 한 마리를 잡으면 양초를 만드는 기름은 물론 화장품과 의약품, 공업용 세제 등의 원료를 조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포경선은 19세기 중엽 미국에서 단순한 어업 활동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미국이 신흥 산업자본주의 국가로 발돋움하는 중요한 성장 동력이었다.

1927년 뉴베드퍼드에서 마지막 포경선이 출항했다. 1985년에는 세계적으로 상업포경이 금지됐다. 하지만, 뉴잉글랜드의 후손들은 고래와 다시 만났다. ‘죽은 고래’가 아닌 ‘산 고래’가 돈을 가져다주는 고래관광 산업을 시작했다.

고래는 크게 수염고래와 범고래와 같은 이빨고래로 나뉜다. 대개 수염고래 종류가 이빨고래보다 크다. 향유고래는 이빨고래 가운데 가장 큰 종류다. 대왕고래로 불리는 흰수염고래는 지구상 동물 가운데 가장 대형이다.

평균 길이 30m, 무게 150t에 달한다. 영어 속어로 ‘Dick’은 ‘남성의 성기’를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moby’는 ‘아주 큰’을 뜻한다. 세계에서 제일 큰 생식기를 가진 동물은 흰수염고래다. 길이가 2.5~3m, 1회 사정량은 20리터 이상이다. 현재 기록된 최고치는 5m다. ‘진짜 모비딕’이란 이름으로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고 한다.

그런데 흰수염고래의 고환은 약 90kg에 불과(?) 하다. 고환만 놓고 볼 때는 몸무게가 흰수염고래의 2/3에 불과한 참고래가 가장 크다. 참고래 고환은 지름 1m, 무게는 각각 500㎏이나 된다. 합쳐서 1톤. 크기도 2.7m가 넘는다. 몸에 비례하여 대단히 큰 편인데, 짝짓기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 소설 <모비딕>의 작가 허먼 멜빌은 포경선 선원 경험

소설 <모비 딕>을 국내에 소개한 <백경·白鯨>은 하얀 고래라는 뜻. 원래 일본에서 쓰던 번역 제목이다. 향유고래는 몸 색깔은 어두운 회색 계열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흰색에 가까워진다. 거대한 향유고래 ‘모비 딕’(Moby Dick)에게 한쪽 다리를 잃은 포경선 피쿼드(Pequod)호 선장 에이해브가 고래에게 복수하기 위해 대양을 누비는 이야기다.

현재 미국의 동북부에 살던 원주민 피쿼드족은 유럽에서 건너온 백인들에 의해 전멸한다. 멜빌은 포경선 이름에서 사라진 원주민을 대변하고자 했고, 상대할 수 없는 백인의 힘을 ‘모비 딕’으로 표현했다. 소설속 고래 ‘모비 딕’은 인간의 힘을 넘어서는 절대적인 존재로 묘사됐다. 피쿼드호 선원들은 고래를 이길 수 없었다.

허먼 멜빌은 소설 집필을 앞두고 롱아일랜드 몬탁 근처 색하버(Sag Harbor)에서 실제 포경선을 탄 경험을 가진 특이한 이력의 작가다. 생활고에 견디다 못해 1840년 1월 초 태평양으로 출어하는 포경선에 승선해 장장 3년 10개월이 걸린 고래잡이 여정을 떠났다. 멜빌은 여러 포경선을 탔는데, 그 와중에 몇 달간 남태평양 식인(食人) 원주민 마을에서 지내기도 했다.

그의 소설은 바다에서 낚시하듯이 거저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는 목숨을 걸고 포경선을 탔고, 몇 년간 선원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20세기 중반만 해도 영국 도서관에서 <모비딕>은 ‘19세기 문학’이 아니라 ‘고래학’으로 분류됐다. 정말 웃지 못할 이야기다.

소설에는 고래 포획과, 포경선에서의 삶, 낸터킷의 포경산업이 그려졌다. 이 책은 그만큼 백과 사전식 섬세한 묘사와 진지한 무게를 지닌 소설이다. 1851년 발표된 <모비딕>은 멜빌이 죽은 후 30년이 지나서야 ‘19세기 미국이 낳은 명작’으로 평가받았다.

 ■ 스타벅스 커피 이름은 소설 <모비 딕>에서 유래

<모비 딕>을 게이 소설로 분류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사실 그런 오해를 살 여지도 있다. 특히 뉴질랜드 마오리족 출신인 작살잡이 퀴퀘그와 허먼 밸빌의 소설적 분신인 이스마엘의 우정에 대한 서술 부분이 거론된다.

젊은 청년 이스마엘과 퀴퀘그는 처음 만난 날부터 한 침대에서 잠을 자고 다음 날 아침 뒤엉킨 채 눈을 뜨는가 하면, 이스마엘은 거침없이 자신과 퀴퀘그가 결혼했다고 표현한다.

게다가 퀴퀘그의 우정 표현은 이스마엘의 이마에 자기 이마를 비비적거리는 것이다. 이외에 일등 항해사 스타벅과 에이허브 선장의 갈등 관계도 묘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모비 딕과 마지막 결전 과정에서 의족이 부러진 에이허브 선장을 부축하는 스타벅과 선장의 대사를 보면 거의 농밀한 수준이다.

시애틀을 상징하는 것은 스타벅스 커피와 시애틀 중앙도서관이다. 또 시애틀을 세계적인 ‘잠 못 이루는 도시’로 만든 장본인은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다.

세계적 커피 브랜드의 대명사가 된 ‘스타벅스’는 어떻게 만들었을까? 스타벅스 초기의 이름은 소설 <모비 딕>에 등장하는 포경선 '피쿼드'로 지어졌다. 그런데 다른 동업자가 피쿼드호의 일등항해사 '스타벅'으로 지을 것을 고집해서 이름이 바뀌었다. 스타벅(Starbuck) 이라는 이름에다가 복수형 ‘S’를 붙였다. 그리고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인어 ‘사이렌’을 심벌로 삼았다. 1971년 일이다.

소설 속 ‘스타벅’이 커피를 무척 좋아해서 그 이름을 따서 지었다는 것은 거짓. 눈 씻고 읽어봐도 그가 커피를 마시는 장면조차 없다. 그 소설의 누구도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 스타벅스 커피가 스타벅의 이름을 딴 이유는 초창기 창업주가 <모비 딕>의 열광적 팬이었고, 본거지인 시애틀이 항구도시였기 때문.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인간은 세 가지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라고 했다.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모비 딕>은 이 세 가지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을 알려준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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