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달 국정감사 최고의 화제는 자유한국당 김진태 의원이 데리고 나온 ‘벵갈고양이’였다. 대전 오월드 동물원을 탈출한 퓨마를 사살한 사건을 질타하기 위해 벵갈고양이를 등장시킨 것. 하지만 정치적 이벤트를 위해 철제 우리에 넣은 채 데려와 동물 학대 논란 등 후폭풍도 만만치 않았다.

앞으론 이런 일이 법으로 금지될 전망이다. 김병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관련 법안을 발의했기 때문. 살아있는 동물을 국정감사를 비롯한 주요 회의에 반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이른바 '벵갈고양이 방지법'이다. 그렇지만 국감장에 동물이 등장한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4년에는 새누리당 김용남 의원이 '괴물 쥐'로 불리는 뉴트리아를 데려왔다. 2010년에는 당시 차명진 한나라당 의원이 구렁이를, 민주당 이윤석 의원이 낙지까지 등장시켰다.

전 세계 고양이는 40여 종류다. 태국이 원산인 샴고양이 홈페이지에 따르면 한국, 중국, 일본, 싱가포르 고양이는 유전적으로 샴고양이와 비슷한 부분이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고양이는 언제 들어왔을까? 대개 6세기경 삼국시대, 불교와 함께 들어왔다고 여긴다. 쥐로부터 불경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풀이한다.

경주박물관 부지의 신라 우물 제사 유적에서는 고양이 뼈가 출토됐다. 일본 헤이안 시대 우다 천황의 일기에 집고양이 기록이 나타난다. 중국 당나라 시절 양귀비는 애완동물로 개와 고양이를 길렀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오랫동안 애완동물로 친숙했던 고양이는 왜 12지신에 없을까?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12지신의 원류인 도교에서 고양이는 쥐의 거짓말 때문에 12지신에 속하지 못했고, 그 이유로 쥐를 잡으러 다닌다는 것. 또 원래 12지신을 뽑을 때 고양이는 모든 동물의 무술 스승이었기 때문에 ‘1빠’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데 쥐의 거짓말로 최종 간택에서 탈락한 비운의 동물로 그려진다. 어떤 이유에서든 쥐는 고양이와 상극인 것 같다.

■ 스핑크스는 사자가 아니라 고양이

고양이는 우리 선조들에게 이로운 동물이었다. 농경사회에서 쥐를 잡아주는 고마운 짐승이니까. 일생 동안 가장 많은 쥐를 잡은 고양이는 약 30,000마리를 잡았다. 다산 정약용은 지역 수령들이 창고를 관리하는 방법으로 벽돌을 쓰고, 고양이 키우기를 권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고양이를 신으로 숭배했다. 사자 몸통으로 알려진 스핑크스는 본래 고양이다. 주인이 죽으면 주인의 무덤에 함께 넣기도 했다. 고양이와 주인이 같은 무덤에 있으면 함께 사후세계로 갈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나일강을 오르내리는 배에도 고양이를 태웠다. 식량을 축내고 밧줄과 목재를 갉아먹는 쥐를 잡기 위해서다.

‘짬타이거’는 장병들이 남긴 '짬(잔반)'을 얻어먹고 사는 군부대 주변 길고양이를 말한다. 몸집이 호랑이만 하다는 비유에서다. 현역병보다 군부대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니 자연스레 ‘냥병장’이나 ‘냥하사’로도 불린다. 사실 ‘짬타이거’는 멀리 로마시대부터 존재했다.

고양이를 신성시했던 이집트와는 달리 기독교에서는 고양이를 죄악시했다. 고양이는 악마의 사자로 표현되는 나쁜 짐승이었다. ‘공포의 검은 고양이’는 기독교 문화에서 전파됐다. 검은 고양이는 마녀가 변한 모습으로 간주했다.

일본은 세계 최고의 애묘 국가다. 800만 종류의 신을 믿는다는 일본인의 삶에는 다양한 엔기모노(緣起物)가 존재한다. 행복을 부르고 재수가 대통하는 길조를 상징하는 것들이다.

대표적인 게 바로 마네키네코(招き猫;まねきねこ). 한쪽 팔을 들고 있는 고양이 인형이다. 돈과 손님을 불러들인다고 믿기 때문에 대부분 가게 계산대 등에 올려놓았다. 굳이 일본을 가지 않아도 일식집에서 쉽게 볼 수 있다. 1974년에 출시된 빨간 고양이 ‘헬로키티’는 일본의 대표 캐릭터이자 대중문화의 상징 중 하나로 꼽힌다.

■ 고양이를 너무 좋아해 효종에게 혼난 숙명공주

조선 시대 세조가 피부병 치료를 위해 오대산 상원사를 들른 적이 있다. 그때 고양이가 자객이 숨어 있음을 경고해 목숨을 구해줬다는 설화가 전한다. 세조는 그 고양이를 위해 논 5백 섬지기를 상원사에 내렸고, 나중에 제사를 지내주도록 했다. 상원사 문수전 앞 고양이 석상의 유래다.

그러나 이 고양이상은 원래 사자(견)상이다. 졸지에 고양이로 둔갑했다. 벌거벗은 여인상으로 알려진 강화도 전등사 나찰상과 유사한 사례다. 목수를 배신하고 도망간 주모를 벌주기 위해서 그랬다는 것이다. 둘 다 사실과 다른 잘못된 스토리텔링이지만, 덕분에 유명세를 모으는데 한 몫 한다.

조선시대 최고의 고양이 ‘덕후’는 효종의 셋째 딸 숙명공주다. 왕실 편지에 효종이 숙명 공주가 고양이만 좋아한다고 꾸중하는 내용이 전한다. 편지 내용은 이렇다. “딸아, 너는 어째 시집가서도 고양이만 끌어안고 있느냐. 행여 감기 걸렸거든 약이나 잘 먹어라” 감기 걱정보다는 고양이를 지적한 것.

숙명공주의 어머니 인선왕후 역시 편지로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네 여동생(숙휘공주)은 벌써 임신했다. 요즘 아기 베개에 수놓는다고 수선 떨고 있는데, 너는 어쩌자고 고양이만 좋아하냐?"라고.<1658년 인선왕후가 숙명공주에게 보낸 편지첩 중> 효종과 인선왕후는 시집가서도 늘 고양이만 끼고 사는 공주가 얼마나 답답했으면 이런 편지를 보냈을까?

숙명공주는 13살에 11살 청평위 심익현과 결혼했다. 고양이만 애지중지하며 살았을 때는 아직 아이를 낳기 전이었다. 친정 부모님의 성화에 못이긴 것인지, 나이가 차서 그런지 숙명은 편지를 받고, 바로 아이를 가졌다. 19살이 되어 첫아들인 심정보와 이듬해 둘째 아들 심정협을 낳았다. 현종의 한 살위 누나이기도 하다.

드라마 <마의>에서는 오히려 숙명의 여동생 넷째 숙휘공주가 ‘냥 덕후’로 묘사했다. 효종의 손자인 숙종도 ‘고양이 덕후’였던 것을 보면 고양이 사랑은 집안 내력인 것 같다. 숙종의 애묘는 고모 숙명공주에게 영향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숙종은 고양이를 각별하게 아꼈다.

■ 조선 임금 중 최고 애묘가는 숙종

고양이는 중국과 우리나라 왕실에서 공주와 후궁들에게 인기 높은 애완동물이었다. 특히 금묘(金猫), 황금빛 고양이는 희귀한 애완동물로 가치가 매우 높았다. 1417년(태종17) 11월 24일 실록에 따르면, 양녕대군은 세자 시절 이 금색 고양이를 구하려고 그 주인인 신효창(申孝昌)을 협박까지 했다. 신효창은 관찰사와 동지총제 등을 역임한 고위 대신이었다. 신하의 집에서 왕세자가 고양이를 내놓으라고 닦달을 한 셈이다.

조선 왕 가운데 숙종은 못 말리는 애묘가였다. 양녕대군이 눈 독을 들였던 금빛 고양이였던 것 같다. 손수 ‘금손이’란 이름을 지어주며, 항상 곁에 두고 ‘쓰담쓰담’하면서 정사를 보았다. 수라상을 받을 때도 손수 고기반찬을 집어서 먹여줬을 정도였다. 요즘 말로 ‘금손이’는 ‘퍼스트 캣’이고, 임금님이 오히려 ‘고양이 집사’였던 것이다.

세 차례의 큰 당파싸움을 비롯해 장희빈의 폐위 등 재위 동안 수많은 풍파를 겪었던 숙종에게 ‘금손이’가 큰 위로가 됐던 것일까. ‘금손이’ 역시 숙종을 어미처럼 따랐다. 1720년, 재위 46년만에 숙종이 세상을 떠났다. 주인을 잃고 식음을 전폐하던 ‘금손이’도 결국 숙종의 뒤를 따랐다. 숙종이 승하한지 20일째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겨 인원왕후 김씨가 숙종 무덤 옆에 묻었다.

■ 고양이 생가죽 처방을 거부한 영조

<조선왕조실록>에는 고양이가 궁궐에 들어와 사고를 치는 기록들이 숙종실록 이후 정조실록까지 유독 많이 나타난다. 숙종의 고양이 사랑은 아들 영조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나 보다. 그래서인지 실록에는 고양이를 아끼는 영조의 모습이 적혀있다. 영조는 ‘길냥이’ 아니 ‘궐냥이’들을 아꼈다.

1737년(영조13) 5월 24일, 영조는 팔에 통증이 왔다. 어의는 “고양이 생가죽으로 찜질을 하면 낫는다”라고 직접 시험해보기를 권했다. 어의치고는 비과학적 민간요법 수준이다.

하지만 영조는 “어릴 때부터 고양이를 봐서 그런지, 내 차마 고양이를 죽일 수가 없소”라고 거절했다. 영조는 부제조 유엄이 ‘고양이 생가죽’ 처방을 여러 번 권했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영조에게 고양이 처방을 권유한 것은 여러 번인 것 같다. 그로부터 27년 후 영조는 “내가 고양이 가죽을 쓰면 온 나라가 본받아서 장차 고양이가 멸종될 것이오”라고 술회했다. (1764년, 영조 40년 4월 24일)

그 무렵 민간요법에 의하면 고양이 고기가 쓸개 병(담증)에 좋고, 신경통에는 고양이 가죽이 특효약이라는 소문이 퍼져 있었다. 조선시대 내내 애꿎은 고양이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만약 영조가 고양이 가죽 처방을 썼다면, 고양이는 벌써 멸종되었을지 모른다.

■ 콜레라를 잡는 건 고양이?

콜레라를 한자로 ‘호열자(虎列刺)’라고 한다. 콜레라는 본래 인도의 벵갈 지방에서 유행하던 풍토병이다. 보통 물을 통해 쉽게 전염된다. 그러다가 영국의 식민지정책 때문에 세계 여러 나라로 퍼졌다. 우리나라에는 19세기 초에 들어와서 19세기 후반까지 크게 유행했다. 호머 헐버트 박사는 1886년 7월 한양에 만연한 콜레라로 인해 처음 10일간 전체 20만 명 인구 중에서 3140명이 사망했다고 기록했다.

콜레라가 유행할 당시 사람들은 ‘쥐통’ 혹은 ‘쥣병’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언뜻 쥐가 병원균을 옮기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사실 콜레라와 쥐는 연관성이 없다. ‘쥐통’이나 ‘쥣병’은 콜레라에 걸리면 마치 쥐가 발을 물어 근육에 쥐가 오르는 듯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쥐가 오르는 듯한 증상이 발에서 시작해 몸 위쪽으로 올라가는 것을 보고 쥐 귀신이 붙어서 생긴 병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콜레라가 돌면 고양이 그림을 그려서 대문에 붙이거나 고양이 수염을 태워서 먹기도 했다. 물론 콜레라와 ‘벵갈고양이’와는 전현 관련 없다.

경험하지 못한 괴이한 질병과 이로 인한 두려움은 역설적으로 누군가에게는 기회였다. 일부는 천주교에 귀의하는 방식으로 극한의 공포를 극복하고자 했다. 최제우는 19세기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등에 업고 동학으로 파고들었다.

흔히 ‘고양이 기생충’으로 불리는 전염성 기생충이 있다. 톡소플라스마 곤디(Toxoplasma gondii)라는 기생충은 임산부에게 유산을 일으킨다. 인간의 뇌에 장기적인 악영향을 끼친다. 그래서 인간의 정신 영역에 이상 증상을 유발한다는 것. 어떤 연구에 따르면, 남성을 시무룩하고 칠칠치 못한 외톨이로 만들고 여성의 성적 매력을 높여준다고 밝혀졌다.

서양에서는 많은 예술가가 애묘인이었다. 소문난 고양이 ‘덕후’로 황금빛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앙리 마티스, 소설가 헤밍웨이 등을 꼽는다. 헤밍웨이는 고양이를 50마리나 길렀다. 고양이는 기분 좋을 때 ‘그르릉’ 거리는 소리를 낸다. 이 25~150hz의 낮은 음파는 만성질환자의 고통을 덜 느끼게 한다. 그리고 뼈의 성장과 골절 회복을 돕는다고 한다. 다시, 고양이를 부탁한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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