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수확의 계절이지만, 물고기 씨알이 굵어지는 때다. ‘정조 타임’은 바닷물의 흐름이 잠시 멈춰있는 시간을 말한다. 밀물과 썰물이 바뀌는 과정에서 조류가 정지한 것처럼 느려지는데, 대략 30분에서 1시간 정도 이어진다. 파도가 잔잔해 대물을 낚는 적기로 꼽는다.

최근 낚시 관련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다. 주 52시간 근무제 영향도 크다. 지렁이 등을 꿰어야 하는 낚시는 여자들이 가장 싫어하는 남편의 취미였다. 오랫동안 낚시광 남편을 둔 부인들은 진절머리를 쳤다. 심지어 이혼 사유 1순위로 꼽혔다. 요즘 남자 혼자 나가서 밤새 있다가 오는 낚시문화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부부 조사나 여성 낚시인도 크게 늘었다. 도시에는 낚시 카페까지 꽤 생겼다. 일반인들도 쉽게 낚시를 접할 수 있다. 온 가족이 나가서 즐기는 레저스포츠로 발전하면서 도시 근교 바닷가와 방파제는 주발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다. 브래드 피트 주연의 영화<흐르는 강물처럼>에서처럼 플라이낚시 장면은 수많은 남자들의 로망이기도 하다.

낚시는 선사시대부터 해온 생계활동의 일종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 낚시 기록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나타난다. 신라 제4대 왕 석탈해가 “낚시로 고기를 잡아 어머니를 공양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율곡 이이도 낚시를 좋아했다. 강릉 경호정에 나가 밤낚시하는 즐거움을 표현한 시가 전한다. 이순신 장군도 낚시를 즐겼다. 전남 보성에서 신혼을 보내면서 낚시 삼매경에 빠졌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이순신 장군은 임진왜란 중에 한 지인에게 글을 보냈는데, “전쟁이 끝나면 평범한 촌부로 돌아가 낚시를 하며 살고 싶다”는 소회를 적어 보냈기도 했다. 애석하게 충무공은 이런 소망을 실현하지 못하고, 노량해전에서 왜군의 흉탄에 쓰러졌다.

■ 정조, 낚시대회를 열다

<조선왕조실록>에는 470여 년간 총 71 차례 ‘낚시’가 언급된다. 1429년(세종11) 6월 18일과 7월 1일 기록을 보면, 명나라 사신 창성과 윤봉은 한강에서 황어 낚시를 즐겼다. 하지만 세종은 낚시에 부정적 인식을 가졌었다.

조선 500년을 통틀어 낚시를 즐겼던 왕은 정조가 유일하다.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확인할 수 정조의 낚시 사실은 총 3차례(정조16, 18, 19)이다. 그러나 <홍제전서>에는 1788년(정조12)과 정조17년에도 낚시놀이를 했다는 기록이 있어 실제론 더 많았을 것이다.

정조는 재임 12년째인 1788년부터 매년 봄 규장각 신하들과 함께 창덕궁 후원에서 꽃 구경을 하고 낚시까지 즐기며 시를 짓기도 했다. 정조와 대신들은 연못가에 빙 둘러앉아 낚시를 하면서 한 마리 잡을 때마다 기(旗)를 들고 음악을 연주했다. 이 모임은 내원상조회(內苑賞釣會)로 이름 붙여 정례화했다.

1792년(정조16) 3월 21일 실록을 살펴보자. 실록은 음력 기준이므로 양력으로 하면 4월 말이나 5월 초가 되겠다. 그날은 날씨가 너무 좋아서 절로 꽃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나 보다.

신하들의 자제들까지 참석하도록 했다. 이렇게 모인 인원이 29명이었다. 정조는 이들과 함께 창덕궁의 후원으로 나가 꽃구경을 했다. 행렬이 부용정의 연못에 다다랐을 때 정조는 낚시 대회를 열 것을 명한다. 신하들은 남쪽과 서쪽에서, 자제들은 동쪽으로 가서 낚싯대를 드리웠다.

연못에 둘러앉아 낚시를 하게 하고 윤행임을 심판으로 삼았다. 행사가 무르익자 활쏘기 시합까지 벌어졌다. 행사는 저녁까지 계속됐다. 그런데 정조의 낚시 대회는 조금 특이했다. 정조는 누가 몇 마리의 물고기를 낚았는지를 일일이 기록하여 물고기를 낚지 못한 자에겐 벌주를 내렸다.

낚시대회에 참여했던 다산 정약용은 “고기를 낚지 못한 자는 벌로 술을 마시게 했다”라고 <부용정가>라는 시에서 증언했다. 정약용은 술을 잘 못했다. 정조는 애주가 중의 애주가라서 여러 연회에서 정조가 술 따라줄 때는 정약용은 매우 힘들어했다. 정약용은 유배지에서 자식들에게 편지로 교육하면서 “술은 가급적 피하고, '원샷'은 절대로 해서는 안된다”며 술에 대해 가르쳤다. 반면, ‘다산’이란 호에서 알 수 있듯 차(茶)의 달인이었다.

1800년 정조가 급사한 후, 정조의 총애를 받던 다산의 운명은 바뀌었다. 18년 동안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했고, 끝내 관직에 복귀하지 못했다. 1823년 4월 15일, 정약용은 말년에 낚시 배를 마련하고 '산수록재(山水綠齋)'라고 이름 붙였다. 두물머리, 즉 한강 양수리를 기점으로 춘천까지 북한강과 남한강을 오고 갔다. 정약용은 쏘가리를 즐겨먹었다.

■ 정조의 낚시 실력은

정조는 낚시대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조황을 상세히 기록했다. 그렇다면 정조의 낚시 실력은 어땠을까? 놀랍게도 ‘정조배 낚시대회’에서 가장 많은 고기를 잡은 사람은 다름 아닌 정조였다. 정조는 자신이 개최한 대부분 낚시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1792년(정조16) 대회에서는 정조가 3마리로 가장 많이 잡았고, 서용보와 서영보가 2마리를 잡아 2등을 차지했다. 1794년(정조18) 대회 때는 정조가 5마리로 1등을 차지했고, 2등은 2마리밖에 잡지 못했다. 1795년(정조19) 3월 10일 대회에서도 정조가 4마리를 잡아 1등을 했다. 정조의 낚시실력이 범상했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실록에 따르면 “임금이 낚시로 물고기 네 마리를 낚았다. 신하들과 유생들은 낚은 사람도 있고 낚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한 마리를 낚아 올릴 때마다 음악을 한 곡 연주했다. 다 끝나고 나서는 다시 연못 속에 놓아 주었다. 밤이 되어서야 자리를 파했다.”고 한다.

물고기를 잡을 때마다 음악을 한 곡씩 연주했으니 조용한 낚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밤늦게까지 계속되었던 것을 보면 매우 흥겨운 자리였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 이것이 공식 기록으로 남아있는 최초의 ‘캐치 앤 릴리즈’(낚은 고기 놓아주기)가 아닐까 한다.

정조의 낚시대회는 해마다 참여인원이 늘어났다. 정조 16년엔 29명, 정조 19년엔 54명이 참여했다. 정조가 낚은 물고기는 어떤 물고기였을까? 낚시 장소가 인공연못이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잉어나 붕어였을 것이다. 정조에게 낚시터는 인재의 등용문이기도 했다. 정조는 낚시를 화합과 탕평의 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했다.

■ 낚시는 기다림의 미학(美學)

많은 낚시꾼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우리는 고기를 낚는 게 아니고 인생을 낚는 것이다."라고. 낚시는 인문학적 사유에서 본다면, 시대를 반영하는 하나의 척도(尺度)였다.

“낚시나 하며 소일한다”라는 것 자체가 정치적 실각을 의미하거나 은둔과 기다림의 다른 표현이었다. 조카 단종을 폐위시키고 등극한 세조에 철저히 반기를 든 사육신과 생육신 중 생육신은 한결같이 은둔과 낚시로 일생을 마쳤다.

때를 기다리는 ‘기다림의 미학‘으로 낚시를 포장한 것은 중국 강태공(姜太公)이 원조다. 그는 위수(渭水)의 강가에서 매일 낚시를 했다. 그가 집안일을 돌보지 않자 생활고에 찌든 아내는 집을 나갔다.

그런데 강태공은 낚시에 미끼를 끼우지 않은 채 낚싯바늘을 물에 드리웠다. 미끼도 없는 낚시에 물고기가 걸려 들리는 만무이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가 낚시를 하는 까닭은 물고기를 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낚으려는 것이었다. 드디어 강태공에게 기회가 왔다. 주(周) 문왕(文王)은 은나라를 정벌하기 위해서는 현인이 필요했다.

우연히 낚시 중인 강태공을 만난 주 문왕은 천하의 정세에 대해 몇 마디 나누다 그의 비상함에 감탄하여 그를 자신의 수레에 태워 대궐로 돌아왔다. 강태공은 주 문왕의 소망처럼 은을 멸망시키는 데 큰 공을 세우고 제후국인 제나라의 임금에 봉해졌다.

언젠가 때가 되면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이 나타나 출세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주는 이야기이니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3000년 전 전설 속 인물인 그는 오늘날 낚시인의 대명사로 일컬어진다.

■ 낚시와 낚시질의 차이는 무엇

낚시와 낚시질, 그 차이를 무엇일까? 요즈음 인터넷에 ‘낚시성’이니 ‘낚시질’이란 표현이 난무한다. 이 때문에 ‘낚시’라는 순수한 단어가 오염되고 있는 듯하다.

소설가 이외수는 낚시의 등급을 세분화하기도 했다. 14등급으로 분류한 ‘구조오작위(九釣五作慰)’가 바로 그것이다. 조졸(釣卒 초보자), 조사(釣肆 방자한 낚시꾼), 조마(釣痲 낚시 홍역자), 조상(釣孀 주말과부인 아내), 조포(釣怖 낚시 절제), 조차(釣且 다시 조락), 조궁(釣窮 조도의 문 앞에 이름)을 거쳐 조성(釣聖 낚시의 도 깨우침)과 조선(釣仙 입신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 구조(九釣)에 해당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남작(藍作 겸허함), 자작(慈作 자비로움), 백작(百作 지혜로움), 후작(厚作 온후하고 두터움), 공작(空作 마음을 비움)이 오작위(五作尉)에 속한다고 분류했다.

이미 기원전 500년 시대의 공자는 '조이불망(釣而不網)'이라고 설파했다. '군자는 물고기를 낚시로 낚을지언정 그물로는 잡지 않는다'고 했으니, 이미 그 시대에 낚시의 덕목을 가르친 것이다.

강태공은 오랜 기다림을 통한 자기 수양의 낚시를 했다. <노인과 바다>를 쓴 헤밍웨이는 도전의 낚시를 했다. 정조는 훌륭한 통치수단으로 화합의 낚시를 했다. 결국 낚시의 등급은 낚시를 하는 사람의 행동에 따라서 나온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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