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나 지금이나 막내는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한다. 막내아들은 늘 ‘버릇없음’의 대명사가 되곤 했다. 세종이 가장 예뻐한 아들은 1434년 정비 소헌왕후가 낳은 8남 2녀 중 막내 영응대군이다. 세종이 38세 때였다. 당시 산모 나이 40세는 요즘으로 치면 환갑이 지난 나이다.

세종은 12살에 장가갔다. 1408년 두 살 연상인 청송 심씨와 결혼해 4년 뒤 첫 공주를 낳았다. 나이 16세에 아빠가 된 것. 자식 농사는 풍년이었다. 왕비와 후궁 다섯을 합쳐 부인이 여섯, 자녀는 22명. 18남 4녀를 뒀다. 아들이 많다 보니 며느리도 많고 탈도 많았다. 특히 맏아들 문종에게 시집온 맏며느리들은 질투와 동성애로 점철됐다.

세종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막내의 양육을 신빈 김씨에게 부탁했다. 소헌왕후는 병약해 도저히 아이를 키울 상태가 못 되었다. 수양대군이 어리고 칭얼거릴 때 궁궐에 갓 들어온 신빈 김씨가 얼러주고 업어주며 키웠던 적이 있었기 때문. 천성이 착하고 깔끔해 영응대군의 유모로서 최적이었다.

영응대군은 부모는 물론 신빈 김씨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조선에서 가장 행복한 왕자였다. 다른 왕자들은 왕실 예절에 따라 세종에게 ‘진상’(進上)이라 불렀지만 막내에게만큼은 ‘아버지’라 부르게 했다. 정실 왕자 8명 가운데 용모가 가장 수려하고 품성도 총명했으니, 세종이 편애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

세종의 후궁 신빈 김씨는 노비 출신에서 궁녀를 거쳐 내명부 최고 품계인 정1품 빈의 지위에 올랐다. 세종과 사이에 여섯 아들을 두었는데, 1439년 마지막으로 담양군을 낳았다. 세종이 승하하자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다.

■ 세종대왕이 막내아들에게 선물로 준 이색 애완동물

1442년(세종24) 3월 10일, 영응대군이 9살 때였다. 세종은 강원도 관찰사에게 하늘다람쥐 두 마리와 독수리 새끼 두 마리를 바치게 했다. 실록에는 “세종이 영응대군을 즐겁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적었다. 영응대군은 글씨와 그림에 뛰어나며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동물도 좋아했던 것 같다.

요즘으로 말하면 ‘어린이날’ 선물인 셈. 조금은 황당하다. 개나 고양이도 아니고, 하늘다람쥐와 새끼 독수리를 주었기 때문. 하늘다람쥐와 독수리 모두 쉽게 접할 수 있는 동물은 아니다. 이런 야생 동물은 세종이 스스로 골라 선물한 것은 아닐 것이다. 하늘다람쥐는 덩치에 비해 눈망울이 유난히 크다. 눈의 크기가 커서 까맣게 빛난다. 아마 어린 왕자는 하늘다람쥐를 숨죽이며 바라봤을 것 같다.

5일 뒤 세종은 또다시 강원도 관찰사에게 진기한 새를 바치게 했다. 이것 또한 영응대군에게 주려는 것이었다. ‘아홉 살 인생’ 어린 왕자님이 어떤 새를 키웠을까 궁금하다. 세종의 아버지인 태종은 자신의 왕자들이 마음을 바로잡지 못하고 공부에 소홀할까 봐 애완동물들을 멀리하라고 했다.

오히려 세종대왕은 동물을 선물로 줄 정도였다. 확실히 ‘아들 바보’ 아버지였던 것 같다. 세종은 영응대군이 아홉 살이 되자 데리고 사냥터에 나갔다. 그리고 아직 활 솜씨가 서툰 아들을 위해 짐승을 몰아주기도 했다.

“여러 대군들이 모두 이리저리 달리면서 활을 쏘았다. 이때 영응대군이 아홉 살인데, 임금이 그를 대단히 사랑했다. 만약 쫓기다 지친 짐승이 엎드려 있으면, 왕자의 말을 그리로 몰게 하여 활을 쏘게 했다.”-<세종실록 1442년 3월 7일> 늘 그러하듯, 이날도 수양과 왕자 몇몇이 대부분 짐승 사냥을 독차지했다.

■ 부친 세종의 사랑을 독차지한 영응대군

1444년 3월, 세종은 충북 청원 초정약수를 찾았다. 그때도 세자(문종)와 영응대군을 대동했다. 그곳에서 4개월간 머물면서 세종은 눈병을 치료하고, 영응대군과 매사냥에 나서기도 했다. 수양은 한양에 남아 대궐을 지켰다.

1444년 7월 8일 세종은 경복궁 사정전에서 며느리 후보들을 면접하고 직접 막내며느리를 골랐다. 영응대군은 12세 되던 이듬해 1445년(세종27) 4월 21일, 판관 송복원의 딸을 아내로 맞아 안국동 새 저택으로 분가했다. 막내를 사랑한 세종이 아들에게 준 혼수품은 다른 왕자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영응이 혼례를 올리기 직전, 5남 광평대군과 7남 평원대군이 몇 달 사이를 두고 연거푸 병들어 죽는 일이 발생했다. 이 충격으로 소헌왕후의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 유림의 반대를 물리치고 궐내에 불당을 지었다. 세종과 소헌왕후의 치성에도 불구하고 혼례를 올린 지 3년이 넘도록 영응대군 부인 송씨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결국 4년 뒤 세종은 막내며느리를 내쳤다. 아들을 못 낳았기 때문이다. 영응대군은 정춘경의 딸과 강제로 재혼했다. 그로부터 1년 후 세종은 그토록 사랑했던 영응대군의 집에서 눈을 감았다. 향년 54세. 세종의 혼인과 이혼 명령에 고분고분 순응했던 영응대군, 그러나 부왕이 승하하자마자 본심을 드러냈다. 이혼한 첫 아내 송씨를 그리워 한 것이다.

■ 세종이 승하하자 전처와 재결합한 영응대군

세종의 형제 중에서 영응대군을 귀여워한 사람은 둘째 형 수양대군이다. 영응은 수양대군 세조와는 17살 차이가 난다. 수양은 동생이 송씨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송씨는 친오빠 송현수의 집에 머물고 있었는데, 마침 송현수가 수양의 절친한 벗이었던 것.

송현수의 집에 동생을 데리고 간 수양은 송씨와의 재결합을 부추겼다. 이후 영응대군은 수시로 송씨 집을 찾아가 정을 나누더니 딸까지 낳았다. 이쯤 되면 첫사랑 순정인지, 불륜인지 자못 헷갈리는 장면이다.

문종도 승하하고 단종이 12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수양대군은 자기 맘대로 영의정에 올랐다. 그리고 단종 1년(1453) 11월 28일 어명을 빙자해 송씨를 다시 영응대군의 부인으로 맞아들이라고 했다. 영응대군은 기다렸다는 듯이 둘째 부인 정씨와 이혼하고, 첫사랑 송씨와 다시 결합했다.

영응대군은 늦둥이 아들을 사랑한 아버지 세종의 유언으로 궁궐의 수많은 금은보화를 받았다. 노비 1만 명을 거느리는 거부가 된 것이다. 그런 영응대군이 34세의 젊은 나이로 죽자 모든 재산은 송씨 것이 됐다. 송씨는 세종에게는 쫓겨난 며느리였지만, 단종·세조·예종·성종·연산군·중종 여섯 왕의 비호를 받았다. 송씨는 평생 호화로운 삶을 살다가 80여생 천수를 누렸다.

■ 다람쥐를 수출하기 위해 만든 ‘다람쥐 섬’

우리 역사상 불세출의 성군 세종대왕은 동물에게도 성군이었다. 실록에는 일본이 선물한 코끼리나 원숭이 등 동물의 생명까지도 아낀 흔적이 많이 나타난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가장 많이 보낸 동물은 원숭이다. 조선에서는 별로 달갑지 않은 원숭이를 자꾸 선물로 가져와, 사육 방법을 두고 고민한 기록이 많다. 심지어 연산군은 여러 번 원숭이를 돌려보내기까지 했다.

세종이 승하하고, 문종이 왕위에 오르자 일본 여러 지방 제후들이 잇달아 취임 선물을 보냈다. 문종 즉위년 1450년 10월 7일, 일본에서는 원숭이 2마리를 보냈고, 답례로 다람쥐 2마리, 강아지 2마리, 거위 1쌍, 흰 오리 1쌍을 얻어갔다.

그때 일본이 얻어간 다람쥐가 세종이 막내에게 줬던 하늘다람쥐인지는 알 길이 없다. 다람쥐를 뜻하는 영어 스쿼럴(squirrel)은 청설모를 가리킨다. 청설모는 주로 붓의 재료로 쓰였다. 우리가 흔히 보는 갈색 줄무늬 다람쥐는 영어로 칩뭉크(chipmunk). 유럽에선 줄무늬 다람쥐가 살지 않아서다.

국내에 서식하는 다람쥣과 동물은 하늘다람쥐, 청설모, 다람쥐 등 3종이다. 날다람쥐 일종으로 우리나라에 서식하는 것은 하늘다람쥐다. 날다람쥐는 1923년 서울의 한 모피상에서 모피를 발견했다는 보고가 있을 뿐, 국내 서식 여부에 대해선 확실치가 않다.

한국산 다람쥐는 특히 줄무늬가 뚜렷해 귀엽기로 정평이 나있다. 1960~1970년대 한해 30만~10만 마리까지 애완용으로 일본 등에 수출했다. 햄스터와 달리 취선이 없어 냄새가 적은 편이다. 다람쥐가 돈이 되니까 잡아다가 무인도에서 기르려는 사람도 있었을 정도였다. 그 섬은 춘천시와 화천군 사이 파로호에 있었는데, 지금도 ‘다람쥐 섬’으로 불린다.

그러나 다람쥐 번식 작전은 실패했다. 다람쥐를 잡아다 무인도에다가 풀어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파로호가 가뭄으로 말라붙어버렸다. 이 바람에 섬과 육지가 연결됐고, 다람쥐들은 모두 육지로 탈출했다.

■ 우리가 잘 모르는 ‘숲의 모태’ 다람쥐

어린 시절 누구나 불러 봤을 ‘산골짜기 다람쥐’ 동요를 기억하는지. 다람쥐는 동요 소재가 될 만큼 우리에게 아주 친숙한 동물이다. 귀여운 생김새 덕분에 산과 숲에 가면 만날 수 있는 다람쥐를 다들 반가워한다. 특히 날다람쥐는 왠지 민첩할 것 같은 인상을 주기 때문에 산을 잘 타는 사람의 별명으로 쓰인다.

다람쥐 이빨은 평생 동안 자란다. 그래서 다람쥐는 이빨을 닳게 하려고 껍질이 단단한 열매나 씨를 갉아먹는다. 다람쥐가 즐겨 먹는 것은 도토리다. 그런데 도토리를 저장하는 방식이 남다르다. 대량으로 저장해 둘 때는 땅속 둥지에 모아두는데 이것을 ‘둥지 내 저장’이라고 한다. 도토리를 발견하고 생각나는 대로 얕게 묻어둘 때가 있는데 이것은 ‘분산 저장’이라고 한다.

우스운 건 자신이 묻어둔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다. 하지만 묻어둔 채 잊어버린 도토리는 이듬해 귀한 식량으로 쓴다. 자기가 묻어둔 곳은 잊어버리지만, 다른 다람쥐들도 똑같이 묻어두고 잊어버리기 때문. 다람쥐들은 먹이의 20%는 이처럼 남이 저장한 걸 획득한다. 서로가 묻어둔 도토리를 찾아먹으며 힘든 겨울을 이겨낸다. 한 연구에서 다람쥐 지능은 IQ 80 정도로 개와 비슷한 수준이라고 발표했다.

도토리는 건조한 곳에서는 싹을 틔우지 못한다. 그래서 땅 위로 떨어지면 그대로 말라 버린다. 너무 깊은 땅속에 묻혀도 안 된다. 식물은 태양빛을 받아야 살 수 있다. 너무 깊이 묻힌 도토리는 뿌리가 나오고 싹이 터도, 빛을 받지 못해 죽어 버린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도토리를 묻는 다람쥐는 도토리가 죽지 않고 자랄 수 있는 깊이를 잘 알고 있다. 나무를 심는 데 아주 중요한 일꾼이다. 그러니 다람쥐가 사라진다면, 숲도 사라질 수 있는 거다. 조그만 다람쥐에게 이런 지혜가 있다는 사실에 놀랍다.

■ 다람쥐는 잡식성

다람쥐는 도토리만 먹지 않는다. 메뚜기, 개구리까지 먹는 잡식성 동물이다. 새싹이나 꽃봉오리도 먹는 등 계절마다 먹이가 달라진다. 또 위기에 놓이면, 천적인 뱀한테 덤비는 대담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다람쥐 등에 있는 갈색 줄무늬는 곰이 할퀴고 간 자국이다. 물론 사실이 아니고 전설 속 이야기다.

하늘다람쥐는 앞다리와 뒷다리 사이에 신축성이 높은 피부조직인 날개막이 달려있다. 일종의 행글라이더 역할을 한다. 얼핏 보면 나는 것 같지만, 새처럼 위아래로 날지 못한다. 비행이 아닌 공기를 타고 내려오는 활공을 하는 것이다. 다리를 뻗어 비막을 펼치고, 꼬리로 균형을 잡는다.

나무 위 같은 높은 곳에서 뛰어내릴 때, 이를 넓게 펼쳐 수십m 거리를 이동할 수 있다. 하늘다람쥐는 한때 서식지인 숲이 파괴되면서 거처를 잃어갔다. 이 때문에 그 수가 점점 줄어 멸종 위기종이 됐다. 1982년 천연기념물 제328호로, 2012년에는 멸종 위기 야생동물 2급으로 지정돼 보호받는다. 다행히 최근 들어 숲이 우거지면서 하늘다람쥐들이 곳곳에서 목격된다. 뒷산 도토리는 다람쥐 몫으로 남겨 두자.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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