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한의 運發코칭] 요즘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빈민 가족들이 집단적으로 자살이라는 막다른 길을 택하는 뉴스를 접하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다. 이는 필시 자신의 운명을 비관해서가 아닐까? 역시 타고난 사주팔자는 고정된 천명(天命)이므로 변하지 않는다. 이렇게 천명은 정해져 있다. 그러나 후천적인 운명(運命)과 운(運)은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영역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운명은 진행되어가는 과정이므로 천지만물의 자연현상 속에서 자신에게 결핍된 부분을 발견하고 필요한 기운을 적절히 동원하여 흉운(凶運)을 물리치고 길운(吉運)을 불러들이는 다양한 개운(開運)법을 동원하여 변화시킬 수가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운(運)과 명(命)을 조화롭게 상생시켜야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운명에 대한 확실한 로드맵인 지도를 가지고 살기를 희망한다. 그런데 삶의 진행과정인 운을 모르고서 산다는 것은 곧 강물의 깊이를 모른 채 무모하게 강물을 건너는 꼴과 다름 아니다. 

타고난 명(命)은 정해진 바로 하늘인 조물주가 이미 떡하니 정해둔 것이니 말이다. 이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운행되도록 이미 정해놓은 바이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 이는 언제 태어나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으라고 하는 조물주의 설계도이자 천명이고 천도(天道)인 셈이기 때문이다. 

천도(天道)는 절대 불변이어서 모두가 정해진바 그대로 살아야만 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는 수도 있음 또한 만물과 세상의 이치가 아니고 뭐겠는가? 이는 바로 철학(哲學)의 문제라고 할 것이다. 

바로 운(運)이라는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불변의 고정체인 명(命)은 천도이다. 그런데 이와는 달리 늘 변화할 수 있는 유동체인 운(運)은 인성(人性)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명(命)과 운(運)이 결합된 것이 바로 운명(運命)이고, 이런 모든 것들이 조화된 결과가 바로 숙명(宿命)으로 나타난다.

혹자는 운명은 있기도 할 것 같고 없기도 할 것 같으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 라는 식으로 갑론을박을 한다. 그런데 운명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그 운명이 그대로 그 자리에 쭉 계속해서 머물러 있으리라고 믿기도 어려운 일이 아닌가 말이다.

누구나 평소에 악행을 삼가고 선행을 닦고 공덕을 쌓음으로써 운(運)을 변화시키고 삶의 질도 또한 변화시킬 수 있음이니 말이다.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이 있듯이 모든 불운이나 행운이 아무런 이유나 조건 없이 오지 않음이 자연의 이치일 것이고 섭리이기 때문이다.
 
천명과 운명은 정해져 있지만 운명은 우리 자신의 노력에 의하여 새롭게 창조되고 결정된다는 것이 진실일 것이라고 가정을 해보자. 누구나 자기가 목표하는 바를 이루어 성공한 삶을 이루기를 소망한다. 그런데 과연 성공하는 인생의 문(門)을 열기 위한 열쇠가 단 1가지의 열쇠만으로 정해졌다고 단정함은 정답일까?

열쇠가 없어서 문(門)을 열지 못하고 또 안 되는 길이며 안 열리는 문(門)이라면 굳이 1가지의 길을 고집할 게 아니라 다른 길로 돌아가면 될 것이 아닌가? 성공하는 인생의 문(門)을 여는 데는 오직 1가지의 정답만이 존재하는 게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목적이 문(門)을 여는 것이라면 열쇠로 열든지 아니면 망치로 문(門)을 부수던지 문(門)이 열리는 결과는 모두가 같을 것이 아닐까? 정면 돌파를 하든 다른 길로 돌아가든 어떤 방법을 쓰던지 간에 자신만의 정답을 찾아서 인생의 문(門)을 열면 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인생에 정답은 없고 다만 명답(明答)을 찾아 궁구해 가는 과정’이 인생이 아닐까? 예컨대 방송언론계에 종사하는 기자라면 사실을 밝혀내는 게 사명(使命)일 것이고, 대학교나 연구원에 종사하는 학자나 전문가들이라면 사실 속에 숨겨진 진실을 규명하여 밝혀냄이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使命)일 것이다.

서경(書經)의 내용에 ‘운명은 존재하나 변할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에도 ‘불운이나 행운이 이유나 조건 없이 오지 않고 인간이 그들을 불러 온다’고 한다. 그리고 화엄경 보현보살행원품(普賢菩薩行願品)에서도 ‘우리의 업(業)을 빼고는 아무 것도 내생(來生)으로 가져갈 수 없다’고 밝히고 있다.

첫째, 서경은 고대시대의 법령과 규정의 제도를 기록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문헌이다. 서경은 동양의 과거 2500년간 가장 중요한 책으로 여겨진 유학(儒學)의 사서(四書)와 오경(五經) 중의 하나이다. 

공자가 직접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서경은 요순을 비롯하여 고대중국의 왕조역사가 성립되는 과정을 기술한 가장 권위 있는 서적이다. 공자가 요임금과 순임금 때부터 주나라에 이르기까지의 정사(政事)에 관한 문서를 수집하여 편찬한 책으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경전이다.

이 경전에 의하면 우리의 운명은 수(數)의 계산에 의하여 정확하게 예언할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상수(象數)나 운명(殞命)은 존재하나 그것이 그대로 머물러 있으리라고 믿기는 대단히 어렵다. 왜냐하면 가감승제(加減乘除)에 의한 변수들이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더불어 서경은 운명은 존재하나 변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믿는 것이 어렵다는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유동체인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지 않고 자기 자신에 의하여 창조되고 결정된다고 할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자연의 이치이고 진실이라고 서경에서 밝히고 있음이다. 

이는 인간이 실천하는 공덕의 수행과 변수가 어떻게 상수(象數)를 능가하는가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일 것이다. 옛 성인들의 가르침은 진리(眞理)이기에 거의 변하지 않는다. 그때도 지금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그 분들의 말씀을 그래서 풀어지지 않는 경(經)이라 부르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둘째, 태상감응편(太上感應篇)은 중국 민중의 종교윤리 사상을 말한 민중도교의 성전인데 한마디로 도교(道敎)의 시조인 노자(老子) 태상노군(太上老君)의 말씀을 기록한 경전이다.

이 경전의 한 부분에는 <화복무문(禍福無門) 유인자초(惟人自招)>라고 적고 있다. 예컨대 ‘불운이나 행운이 아무런 이유나 조건 없이 오지 않는 것이고 인간들이 그러한 것들을 불러들인다.’고 설명하고 있다. 다른 말로 불운이나 행운은 인간이 과거에 한 행동들이 가져온 보복이나 보상이라는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그런 내용을 믿지 않고 우리들의 의견을 따라 비행과 악행을 저지른다면 자신의 죄만 증대시킬 뿐이다. 그런 행동을 통해서 비록 우리가 아주 작은 이익을 얻었을지라도 그것은 단지 우리 운명에 의하여 갖게 된 것을 얻었을 뿐인 것이다.

만일 사람이 덕(德)을 닦고 수행하는 방법을 모른다면 우리가 얻은 것을 보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자신이 가진 부(富)도 지속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수명(壽命)도 또한 지속할 수가 없을 것이다. 자신의 수명을 지속할 수 없다면 거대한 재산을 가져본들 또 특별한 그 어떤 권력과 명예를 가진다고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이러한 점이 바로 <화엄경 보현보살행원품>에 분명히 설해져 있음이니 말이다. 사람이 마지막 숨을 거둔 후에는 자신의 가족 친구 명예 위신 재산 그 어떠한 것 하나도 내생(來生)으로 가져갈 수가 없음이 사실이 아닌가 말이다.

사람이 일반적으로 임종할 때에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장면은 일생에서 가장 의미 있는 사건이라고 한다. 그래서일까? 죽음을 맞이하는 자에게 죽음의식인 임종할 때에 다음 중 어떤 하나가 업의 힘에 의해 6가지의 문들 중에서 어떤 하나로 나타나게 되어있다고 한다.

첫째는 상황에 따라서 임종할 사람이 바로 다음 생에서 직면하게 될 재생연결을 생산할 업(業, kamma)이다. 둘째는 이전에 업(業)을 지을 때에 인식했던 형상이나 그 업(業)을 지을 때에 사용한 기구인 업(業)의 표상(kamma-nimitta)이다. 셋째는 바로 다음 내생에서 얻거나 경험하게 될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a)이 나타나게 되어 있다.

이렇게 사람이 숨을 거두어 임종할 때에 업(業, kamma)과 업(業)의 표상(kamma-nimitta)과 그리고 태어날 곳의 표상(gati-nimita)이 나타난다고 전해진다.

<화엄경의 보현보살행원품>은 나눔과 베풂의 공덕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보현보살의 10대 원(願)을 닦아야 함을 구체적으로 밝혀주고 있는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불가(佛家)에서는 우리의 업(業)을 빼고는 아무 것도 내생으로 가져갈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은 우리 중생들이 주의해야할 매우 중요한 대목일 것이다. 자신이 지은 업(業)이 그림자처럼 자신을 따라옴을 알 때에 비로소 사람들이 부지런히 선행을 닦고 덕을 쌓아 나쁜 업(業)들을 내생으로 가져가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정진을 할 것이니 말이다.

인생은 찰나처럼 매우 짧고도 짧다. 우리가 금생에 더 많은 선행을 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이롭게 한다면 크나큰 공덕이 될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옛 성인과 유덕한 사람들의 가르침들을 읽고 이를 믿으며 받아들이고 실천할 수 있다면 우리는 무한한 공덕과 이익을 얻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믿고 따르고 말고는 모두 자유다. 행운과 불운이 모두 자신의 행동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인들의 가르침을 믿고 운명이 통제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으면서 자신의 운명을 밝고 빛나게 재창조할 수 있음을 아는 것이 절실한 것이다.

흔히들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많이 지어서…’라는 말을 하곤 하는데 이는 불가사의한 업(業)에 대한 말이다. 어쩌면 업(業)의 탓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숙명론적이고 운명론적으로도 들리는 말이 분명하다. 

이렇게 업(業)타령을 함은 보통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이제 업(業)타령만 할 것이 아니라 업(業)을 뛰어 넘고 자신의 운명을 변화시켜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조종하는 조종사가 됨이 어떨까?

사람이 타고난 천명(天命)도 있고 살아가는 진행과정인 운명(運命)도 분명히 있다. 우리는 그것에 따를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운명을 다양한 측면에서 길운(吉運)은 불러들이고 흉운(凶運)은 물리치며, 아울러 운발은 높이고 막힌 운은 열리게 하는 개운(開運)방법을 찾아 배우고 익혀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 변화시킬 수도 있음이니 이게 바로 운명철학(運命哲學)적인 과제라 할 것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노병한 풍수·사주칼럼리스트

-자연사상칼럼니스트

-한국미래예측연구소장

-노병한박사철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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