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데타는 군대를 동원해 무력으로 정권을 빼앗는 일이다. 체제 변혁을 목적으로 하는 혁명과는 다르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처럼 국민의 지지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프랑스어인 쿠데타(coup d’État)를 사용하는 이유는 1799년 나폴레옹에서 유래했기 때문이다. 박근혜 정부 당시 기무사가 계엄에 대비한 문건을 만들었다. 이것이 바로 쿠데타 음모가 있었던 것 아니냐는 논란은 아직 진행형이다.

고려 왕조는 쿠데타로 시작해서 쿠데타로 멸망했다. 왕건은 스무 살 되던 896년,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후고구려의 장수가 됐다. 왕건은 숱한 전과를 바탕으로 궁예의 총애를 받았다. 마흔 살도 되지 않은 젊은 나이에 백관의 우두머리인 ‘시중’ 지위에 오르며 출세 가도를 달렸다.

918년, 궁예가 독단과 전횡을 일삼으며 호족들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의심병도 많아졌다. 궁예가 그의 목숨을 위협하자 반란을 일으키고 고려를 건국했다. 신숭겸, 복지겸, 홍유, 배현경, 박술희 등의 장수들이 힘이 됐다.

고려 말 여러 가지 혼란스러운 상황은 이성계를 변방의 무명 장수에서 일약 고려 제일의 영웅으로 만들었다. 이성계는 친원파와 친명파 사이의 대립이 격화됐을 때 위화도 회군을 단행했다. 정도전을 비롯한 급진 개혁파는 이성계와 손을 잡고 혁명 세력을 이루었다.

■ 조선왕조의 되풀이되는 골육상쟁은 누구의 업보인가?

조선을 세운 이성계가 가장 우려한 것은 다시 고려 왕조의 부흥을 원하는 귀족이나 사병을 가진 공신들이었다. 이들은 언제든지 군사를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킬 수 있었다. 조선 초 정도전은 사병을 혁파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지만, 결국 이방원에게 당하고 만다. 태종 이방원이 등극하기까지 두 번의 왕자의 난과 계유정난 등 친위 쿠데타를 겪었다.

중종반정은 1506년 9월,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옹립된 사건을 말한다. 조선 개국 이래 최초로 신하가 임금을 갈아치운 반란이었다. 연산은 반정 직후 후궁 소생 왕자들에게 부여되는 군으로 강등 당했다. 강화도로 귀양가 2개월 후 11월에 사망했는데, 독살설이 우세하다. 사망 당시 그의 나이는 31세였다. 연산은 죽으면서 “중전 신씨가 보고 싶다”고 말했다.(1506년 11월 8일 중종실록)

인조반정은 1623년 3월 12일, 서인이 광해군을 쫓아내고 인조를 왕으로 세운 사건이다. 인조반정은 보수 세력의 정치 역학적 쿠데타이기도 하다. 광해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두 번의 쿠데타가 있었다. 5.16 군사정변은 1961년 5월 16일, 군수사령관 박정희 소장 주도로 육군사관학교 8기생 출신, 해병대, 6군단 포병대 등이 일으킨 군사정변이다. 박정희는 7월 3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취임했다. 1962년 3월 22일 윤보선 대통령 사퇴로 박정희가 권한대행을 맡았다. 1963년 12월 17일 제3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대통령에 취임했다.

■ '쿠데타' 논란 기무사 계엄 문건의 진실은?

강풀 원작의 영화 ‘26년’은 ‘그 사람’에 대한 액션 복수극이다. 1980년 5월 광주의 비극과 연관된 조직폭력배(진구 분), 국가대표 사격선수(한혜진 분), 대기업 총수, 사설 경호업체 실장이 26년 후 광주 학살의 주범인 ‘그 사람’ 단죄를 위한 작전을 펼친다. 현직 경찰 역으로 인기가수 2AM의 임슬옹이 출연했다.

12·12 군사 반란은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신군부 세력이 최규하 대통령의 결재 없이 계엄사령관인 정승화 육군 참모총장을 연행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 소장이 군부 권력을 장악하고 실세로 등장했다.

전두환은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한 후, 8월에 대장으로 예편해 1981년 제5공화국의 대통령이 됐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권좌에서 물러난 후 김영삼 정부에서 5·18 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됐다. 대법원은 12·12 사건은 군 형법상 반란임을 확인했다. 결국, 전두환과 노태우에게 실형이 선고됐으나, 1997년 12월 22일 김영삼 대통령의 사면을 받는다.

1979년 12.12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전두환과 신군부는 미국 측의 승인을 얻기 위해, 핵무기 개발을 포기했다. 그 무렵 1977년 미국에서 의문의 교통사고로 사망한 천재 물리학자 이휘소 박사를 둘러싸고 석연치 않은 억측이 난무했다. 심지어는 김진명 소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가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될 정도였다.

고려 말 위화도 회군을 통해 집권한 이성계는 최무선이 세운 화약무기 연구소인 화통도감을 해체한다. 화통도감의 화력이 부메랑처럼 자신에게 돌아오는 것을 사전에 차단한 것이다. 1453년 계유정난으로 집권한 수양대군도 마찬가지였다.

세조는 세종 때 설치해 3,000명에 달하던 ‘총통위’(=중화기부대)를 해체해 버렸다. 국가 안보보다는 정권 유지를 위한 치졸한 결정이었다. 이후 조선의 국방력은 급속도로 내리막길을 걸으면서 명종 때의 을미왜변과 임진왜란 등을 초래했다.

■ ‘왕의 여자’ 장녹수는 아이 딸린 돌싱녀

연산은 조선왕조에서 몇 안 되는 정통성을 갖춘 임금이었다. 정실 왕비로부터 맏아들로 태어나 세자 수업을 착실하게 받았다. 혼례를 치르고 난 다음 19세 성인이 되어 왕위를 계승했다. 이러한 정상적인 순서를 밟은 왕위 계승자는 5백 년 조선 역사에서 문종과 단종 밖에 없었다. 연산은 세자 시절 명나라 사신을 접대한 적이 있었다. 그가 예절을 잘 안다고 칭찬한 명 사신의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원래부터 심성이 포악했던 것은 아니었다.

연산이 폭군으로 불리게 된 것은 두 차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키면서 수많은 사람을 죽였기 때문이다. 그는 갑자사화 이후 폐위되기 직전 2년 동안 급격하게 정신적 방황과 일탈로 무너졌다.

한국 영화 사상 관객 동원 수에서 손가락 꼽는 <왕의 남자>, 그리고 <간신> 등은 연산군을 소재로 삼았다. 실록에서 외줄타기 광대 ‘장생(김우성 역)’이란 인물은 나오지 않지만, 공길(이준기 역)은 딱 한 번 나온다.

1505년 12월 29일, 연산군이 폐위되기 1년 전 일이다. 광대 공길(孔吉)이 늙은 선비 흉내를 내다가 <논어>의 한 구절을 말한다. “임금은 임금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비는 아비다워야 하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합니다. 임금이 임금답지 않고 신하가 신하답지 않으면 아무리 곡식이 있더라도 내가 먹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꼬집었다. 연산군은 그 말이 불손하다고 곤장을 쳐서 먼 곳으로 귀양 보냈다. 영화에서처럼 ‘공길’이 미소년이라는 내용은 전혀 없다.

대개 연산군 하면 패륜과 난음을 떠올린다. 연산의 총애를 받은 ‘왕의 여자’ 장녹수 또한 꽃미녀가 아니었다. 연산보다 서너 살 위 연상녀였다. 30대에도 16세의 앳된 소녀처럼 보일 만큼 동안이었다. 실록에는 “얼굴은 보통을 넘지 못했으나, 남모르는 교태와 아양은 견줄 수 없다”고 묘사했다. 노비 출신인 장녹수는 심지어 연산과 만나기 전 아들 하나까지 낳은 여자, 요즘 말로 ‘돌싱’(=돌아온 싱글 이혼녀) 이었다.

■ 연산군과 장녹수가 ‘최애’ 애완동물은 강아지

"왕은 항상 내정(內政)에 강아지 한 마리를 길렀는데, 목에 방울을 달았다. 강아지가 방울 소리에 놀라 뛰면 이것을 매양 재미로 여겼다“-<1506년(연산12) 5월 19일> 실록에 남아있는 기록이다. 조선 왕 중에서 개를 좋아했던 임금은 바로 연산군이다.

이에 앞서 연산이 애완견을 키운 기록을 찾아보자. “주둥이가 짧고 털이 길며, 발이 낮고, 검은색 당나라 개(唐狗)를 구해서 들이라”-<1500년(연산6) 3월1일> 당나라 시절 궁중 그림에는 오늘날 우리들이 흔히 볼수 있는 애완견의 조상 격인 강아지가 보인다. 이 개들은 송나라(宋) 때부터 본격적으로 개량해서 페키니즈, 시츄, 퍼그 등이 만들어 진다.

당나라 시절부터 귀족들은 개와 고양이, 앵무새, 두루미 등을 애완동물로 길렀다. 특히 수많은 후궁들과 궁녀 등은 애완동물로 적막함을 달했다. 양귀비가 기른 애완견 이름은 ‘강국자(康國子)’였다. 현종과 친왕이 바둑을 둘 때, 양귀비는 개를 안고 옆에서 구경했다. 양귀비는 현종이 바둑을 질까 걱정해서, 애완견을 시켜 바둑판을 흐트러 놓았다.


연산이 말한 ‘당나라 개’는 1468년(세조14) 4월 17일에도 명나라 황제에게 보낼 선물 목록에 스라소니, 매와 함께 포함됐다. 연산은 진공품이 아니라, 이 개를 번식하기 위해 종자를 받으려고 했다. 그 무렵 조선에서는 사냥개와 별도로 몸이 작고 다리가 짧은 발바리 견종의 애완견을 기른 것이다.
 
사냥을 좋아했던 만큼 연산군은 매와 사냥개를 수백 마리나 길렀다. "궁궐 안에 사냥개를 많이 길러서 때로는 조회를 할 때 함부로 드나드니. 보기에 좋지 않습니다."라고 영의정 한치형이 간언할 정도였다. -<1501년(연산7) 5월 6일> 그러나 연산군은 아랑곳 하지 않았다.

다음해 일본 사신들을 맞아 영접할 때도 사냥개들이 뛰어다녔다는 기록이 나온다.
의정부에서는 "오늘 아침 문무백관들이 반열에 늘어섰을 때에 사냥개가 이리저리 뛰어다녔으니, 일본 사신들 보기에 온당치가 못했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사냥개를 내놓지 못하도록 하소서"라고 아룄다. -<1502년(연산8) 2월 5일> 의정부 정승들이 나서 합동으로 지적한 것이다. 그때서야 연산은 "사냥개 담당 사육사를 처벌하라"고 지시했다.

연산의 주된 사냥터는 한양도성에서 20km 떨어진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 대자동 일대였다. 이곳에는 1년 365일 출입 금지까지 푯말(禁標)까지 세웠다. 일반 백성들이 그 안으로 들어오면 참형에 처했다.

■ 장녹수가 좋아했을 고양이

그런가 하면 연산은 궁궐에서 양(羊)을 기른 적도 있다. 오죽하면 이런 일도 있었다. 1497년(연산3) 5월 17일, 양 3마리가 왕의 근무 장소인 창덕궁 인정전에 들어왔다. 대신들은 기겁 했다. 비서실인 승정원에서 사육 책임자를 벌주라고 건의하자 연산은 “내가 양을 잘 알지 못해 보려고 한 것이다"라고 태연히 말했다. 양은 다시 놓아 주었다.

연산은 고양이도 좋아했다. “내관 임세무 등이 대내의 고양이로 사옹원에서 쥐를 잡다가 고양이를 놓쳤으니, 금부에서 형장 심문하도록 하라”<1504년(연산10) 3월 9일> 고양이를 놓친 내시를 매까지 때려가며 처벌했다는 이야기다. 사옹원은 대궐 안의 음식 준비를 책임지는 관아다. 그곳에 쥐가 돌아다니니, 내관들이 연산군이 기르던 고양이로 쥐를 잡다가 고양이를 잃어버린 모양이다. 결국 연산군은 화가 나서 매를 치라고 명령한 것이다.

발발이 견종 애완견과 고양이는 연산보다 장녹수가 애지중지했을 가능성이 높다. 연산은 애견, 애묘인이라기보다 동물을 학대한 쪽에 가깝다. 연산군은 곰과 표범, 호랑이, 여우 등을 산 채로 잡아오라고 명을 내렸다. 잡혀온 짐승들을 궁궐 후원에서 고기를 주면서 구경하거나, 마치 사냥하듯 직접 쏘아 죽이기도 했다.

연산군의 광기는 폐비 윤씨의 죽음, 그리고 어머니를 죽인 성종과 동조한 대신들에 대한 분노에서 시작됐다. 아버지 성종에 대한 적개심은 폭정의 기폭제가 됐다. 연산군이 세자였던 시절, 성종이 아끼던 사슴 한 마리가 달려들어 그의 옷과 손을 핥아댔다. 사슴이 자신의 옷을 더럽힌 것에 화가 난 연산군은 성종이 보는 앞에서 사슴을 걷어찼다.

이 광경을 지켜본 성종에게 크게 꾸지람을 받았다. 성종은 조선 왕 중에 가장 동물을 좋아한 ‘동물 덕후’였다. 이후 왕위에 오른 연산군은 가장 먼저 그 사슴을 활로 쏴 죽여 버렸다. 심지어 그 사슴고기를 먹기까지 했다. 실록에서는 이렇게 기록했다.

"성종이 승하하자 왕은 상중에도 서러워하는 빛이 없으며, 후원의 순록을 쏘아 죽였다. 또 그 고기를 먹으며, 놀이 즐기기를 평일과 같이 했다.“ 연산군과 영조는 “사슴 꼬리를 진상품으로 올려라”라고 하면서 보양식으로 챙겨 먹었다. 연산군은 개와 고양이, 양은 좋아했지만, 아버지 성종과 달리 원숭이는 좋아하지 않았다.

■ 연산군 개불쌍, 사도세자의 개 그림은 사랑에 굶주린 자신의 마음

영조에 의해 뒤 속에 갇혀 죽은 사도세자 역시 궁중에서 개를 키웠다. 사도세자는 예술가 기질이 강했다. 새나 짐승 등을 그린 그림을 영모화(翎毛畵)라 한다. 그중 사도세자가 그린 것으로 현전하는 유일한 게 바로 강아지 그림이다. 그런데 사도세자가 그린 그림은 어미 개가 반갑게 달려드는 두 마리 강아지를 무심하게 바라보는 모습이다.

과연 모자(母子) 관계인지 의심스럽다. 사도세자는 아버지로 인해 몹시 힘든 청소년기를 보냈다. 부자 관계가 아니라 군신 관계로만 대하며 늘 엄격했던 영조를 그린 것으로 해석한다. 사도세자는 그림 속에서나마 늘 꾸중만 하는 아버지(영조)의 사랑을 받고 싶은 심정을 표현했다.

조선 왕 중 부모의 비참한 죽음을 알거나 목격한 사람은 3명이다. 연산군, 경종, 정조다. 연산군의 어머니 폐비 윤 씨는 사약을 받고 일찍 세상을 떠났다. 경종의 어머니 장희빈은 인현왕후를 저주하다 사약을 받고 죽었다.

경종은 노론과 소론의 당쟁 속에 재위 4년 짧은 치세를 마친 비운의 왕이었다. 정조는 평생 화증(火症)에 시달려 인삼은 거의 입을 대지 못할 정도였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단 음식이 당긴다는 건 과학적으로 증명된 상식이다. 연산군은 사탕 등 유달리 달달한 맛에 집착했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 연산군 역을 맡았던 배우 정진영은 "연산군을 연기하면서 눈치 볼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외로운 사람이었던 것 같다"고 술회했다. 권력은 바람이고 권세는 구름이다. 조선 역사상 성군의 길을 가장 역주행한 폭군으로 기록된 연산군. 그를 해석하는 좌표는 바로 부모의 사랑이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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