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한의 運發코칭] 모든 사람들은 성공을 꿈꾸고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지만 안타깝게도 누구나 성공을 거머쥐지는 못한다. 과연 성공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특별한 능력(命)을 갖고 태어난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운(運)이 좋았던 것일까? 과연 그 진실은 뭘까? 그래서 숙명 천명 운명 소명을 구성하는 ‘명(命)과 운(運)’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첫째 운명관의 제1형식은 숙명론이다. 이는 운명의 힘을 필연적인 것으로 보고 인간의 존재 모두를 지배하고 있다고 하는 소박한 신앙으로 정립된 것으로 종교적 철학적인 형태를 띤다. 이는 신이나 우주지배자의 의지에 따른 결정으로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 우주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규정한다. 

따라서 숙명론에서는 개개 인간은 자신의 장래를 전혀 예견할 수 없다. 숙명론은 흔히 결정론과 혼동되어 사용된다. 그렇지만 결정론이란 모든 일은 각각의 원인에 따라 일정한 조건 아래서는 반드시 일정한 결과를 가져오도록 결정되어 있다고 하는 이론이다. 

따라서 때로는 예견이 가능하며 예외적 현상의 발생은 인정되지 않는다. 이와 같은 결정론이나 그에 대한 비결정론은 오히려 운명이 어느 정도 발전된 단계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숙명론의 가장 원초적인 형태는 미(未)개인이나 아니면 고대민족의 신화나 전설에서 나타난다. 예컨대 그리스의 신화에서 보이는 운명과 관련된 운명여신은 3명의 모이라이(moirai)인데 각각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➊ 인간의 탄생을 관장하여 생명의 실을 짜내는 클로토(Clotho)
➋ 인간의 생애를 마음대로 다루는 라케시스(Lachesis)
➌ 인간의 생명줄을 끊고 죽음으로 몰아가는 아트로포스(Atropos)

이와 같은 운명신과 관련된 신화는 게르만신화나 바빌로니아신화 등에서도 나타난다. 이같이 미개인이나 고대민족에서는 ‘운명의 힘’을 의인화하는 경향이 많았다. 이런 ‘소박한 신앙’은 원시공동체에서 찾아볼 수 있는 일반적인 현상이었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소박한 운명의 신을 신앙하는 폴리스가 해체로 접어들었을 때에 비로소 합리적 정신에 기초한 신화의 수정이 시작된다.

플라톤 이전에 운명을 고찰한 철학자로서는 헤라클레이토스가 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우주의 생성과 발전을 일정한 로고스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필연적 운명을 깨닫고 그것에 따르는 것이 이성적이며 최선이고 행복이라고 했다.

한편 스토아파도 우주는 로고스에 의해 지배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로고스는 운명인 동시에 모든 것을 합목적적으로 형성하는 이성적인 섭리라고 인식했다. 소우주로서 인간의 본질은 우주의 본질인 로고스와 동일하기에 이성에 따라 일어나는 일이 바로 로고스에 따라 일어나는 일이라 여겼다.

이렇게 모이라이(moirai) 이외의 다른 관점에서 ‘운명의 관념’을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바로 플라톤 이후의 일이다. 그래서일까? 이런 ‘소박한 신앙’이 공동체가 해체되고 개인의 독립성이 자각되고 강조되는 중세 이후에 비로소 철학 신학 등으로 승화하기에 이르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둘째 운명관의 제2형식은 결정론이다. 이런 운명에 대한 결정론은 ‘인간의 의지와 행위를 결정하는 힘’을 정신적인 것으로 보느냐 아니면 물질적인 것으로 보느냐에 따라 크게 2가지의 종류로 나누어진다. 

첫째, 인간의 의지와 행위를 결정하는 힘을 정신적인 것으로 보는 운명관의 관점은 그리스도교의 구제예정설이나 근세유럽의 관념론 등이다.
둘째, 인간의 의지와 행위를 결정하는 힘을 물질적인 것으로 보는 운명관의 관점은 고대의 데모크리토스로부터 근세자연철학에 이르는 유물론이나 마르크스주의로 대표되는 변증법적인 논리 등이다.

초기 그리스도교는 유대교의 교의를 그대로 계승하였다. 그래서 아담의 죄를 공유하는 인간의 원죄로 인해 영원성의 소멸로 인간의 운명이 규정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구세주 예수만이 이 상태를 최종적으로 구제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에서 구제예정설 논쟁으로 발전한 것은 사도 바울이 그 기원이다. 바울은  구약시대에 있어서 신의 섭리와 신약시대에 있어서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제를 연결시킴으로써 현세의 존재나 사건을 전지전능한 신에 의해 규정된다고 했다.

더 나아가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에 의한 원죄를 공유하는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도덕적으로 무력하여 구원은 신의 의지에 의한 일방적인 선택에 맡겨져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신의 은혜라는 측면을 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선택받지 않은 자에 대해서는 깊게 논하지를 않았다. 다시 말해 구원에 대한 예정만 언급되어 있고 멸망에 대한 예정의 언급은 없었다.

구원과 멸망이라는 이중예정설을 설파한 사람은 바로 16세기의 종교개혁자 칼뱅이다. 그는 구원만이 아니라 멸망도 신에 의해 사전에 예정되어 있어 어떠한 선행을 통해서도 이를 바꿀 수 없고 사람은 단지 신의 영광을 위해서만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이러한 이중예정설의 귀착점은 바로 인간의 구원에 대한 절망이다. 그러나 칼뱅은 개인은 스스로를 선택된 자라고 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역설했다. 그래서 자기 확신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각자의 직업에서 끊임없이 노동을 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중세 이래의 수도원적인 금욕은 바로 세속적인 금욕(직업노동과 검약)으로 대치되게 이른다.

한편 17세기의 스페인의 신비신학자 미겔 데 몰리노스는 인간이 구원받는 것은 교회의 일이나 개인의 윤리적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신으로 향한 명상과 자기포기에 의해 신의 섭리를 받아들인다고 하는 수동적인 불(不)활동을 철저히 지킬 것을 역설한다. 이 사상은 1687년에 이단으로 배격되었지만 오히려 루터파의 경건주의에 영향을 준다.

이러한 숙명론과 결정론은 불교의 인과응보나 이슬람교를 포함하여 일반적으로 인간에게 죄악을 저지를 가능성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비(非)결정론적인 요소가 들어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는 근세의 관념논리학, 스피노자의 합리적 결정론, 라이프니치의 예정조화설, 칸트 및 신칸트파의 목적론적 결정론, 과학적 결정론 등에 대해서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근세 유럽에서는 자연과학의 발전과 휴머니즘 사상의 보급으로 인해 특기할 만한 운명론은 없다. 그러나 19세기 후반에 나타난 니힐리즘은 새로운 운명관으로 주목된다. 19세기 후반 이전의 신학적 예정설은 신 혹은 절대자의 존재를 전제로 하였다. 이렇게 니체로 대표되는 근대의 니힐리즘은 그에 대한 안티테제였다. 니체는 운명을 적극적으로 긍정한 대표적인 사상가였다.

셋째 운명론의 사전적인 의미를 보자. 인간의 의도나 일을 포함하는 우주전체가 인간의 자유의지와 관계없이 움직이기 어려운 궁극적인 결정에 의해서 규제되고 있다고 생각할 때에 사람이 지각할 수 없는 즉 초월한 힘을 운명이라고 말한다.

운명은 모든 사물을 지배하는 불가피한 필연의 힘이다. 그래서 누구라도 따를 수밖에 없고 예측하기 힘든 절대적인 힘이다. 운명은 명확한 목적의지를 갖는 합리적인 힘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비합리적이자 초(超)논리적인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라고 봄이 바를 것이다.

그러나 초(超)논리적인 힘은 그 자체로서는 결코 운명이라 할 수 없다. 운명의식이 처음으로 인간에게 나타남은 불가항력적인 일이 눈앞에서 벌어졌을 때이다. 불가항적인 일에 대처하기 위한 합리적인 처리요구에 따라 도출되는 것이 운명의식으로 굳어진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런 운명은 인간적인 극한 심리현상으로 어느 시대의 사람들에게서나 찾아볼 수 있다. 그래서 운명이 신격화되어 신앙과 숭배의 대상이 되었고 추상화되어 신학과 철학의 주요한 의제가 되어왔음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런 초(超)논리적인 힘이나 운명법칙을 예측하고 예견하기 위해 동서양에서 신탁 점성술 점 역학 사주명리 상법(관상&풍수) 등의 다양한 주술적인 방법들이 구축되어왔다.
운명의 힘이 다양한 형태로 인간에게 다가와 나타날 수 있다. 그러한 것들에 대한 인간의 이해에는 공통된 틀이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운명관으로 정립되게 되는 동기를 이루는 것들이다. 

넷째 명(命)론을 구성하는 <숙명(宿命)•천명(天命)•운명(運命)•소명(召命)>이 있다. 우주 삼라만상을 형성하는 자연의 섭리는 아주 명쾌하다. 바로 명(命)이라는 것이다. 자유롭게 움직이지 못하는 식물은 뿌리(根) 싹(苗) 꽃(花) 열매(實)라는 근묘화실(根苗花實)의 성장과정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며 순환하는 생명체임이 분명하다.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동물도 역시 출생(生) 늙음(老) 질병(病) 죽음(死)이라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과정을 주기적으로 반복하며 진행해가는 생명체임이 확실하다. 이러한 생명체를 줄여서 우리는 명(命)이라고 말한다. 

명(命)이 새롭게 시작해 출발함은 생명체의 생성이고 출생이며 삶의 시작이다. 이러한 명(命)이 다함은 죽음이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명(命)은 생명체의 씨앗이고 종자라 할 수 있다.

명(命)에는 크게 숙명(宿命) 천명(天命) 운명(運命) 소명(召命)이 있다. 그래서 우주의 만물과 인간의 세상사에는 숙명 천명 운명 소명이라는 3가지가 언제나 함께 작용하고 있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숙명 천명 운명 소명은 따로 떨어져 따로 움직이며 작동을 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사슬로 함께 같이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전생의 업보(業報)가 현생의 삶의 질을 결정하는데 영향을 미치고, 또 현생의 업보가 내생의 운명을 결정짓는데 영향을 준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우주와 자연의 질서는 매우 엄격하기 때문에 명(命)을 가진 생명체에게 교만함을 용납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직 봄(天時)에 이르지 않았는데 씨앗을 뿌린다고 싹이 트일 이가 없음이 자연의 법칙이자 자연의 순리이다. 

우리가 주변에서 늘 보듯이 때를 못 맞추어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래서 자연의 순리인 섭리, 매사 때(天時)를 알고, 그 때를 기다릴 줄 아는 것이 바로 도(道)의 출발점이자 경계선이라 할 것이다.

명(命)은 천자(天子)의 명령처럼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존재’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일까? 옛 사람들은 인간사에서 부딪치는 부귀와 귀천, 길흉과 화복의 모두가 명(命)의 범주에 든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게 과연 명(命)이라고 단정해 정의할 수 있을까?

인간이 자연을 정복하고 자연이 물리적인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오늘날 현대인들은 아무도 이를 명(命)이라고 여기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인간이 얼마든지 도전하여 극복할 수 있는 대상으로 여겨 이를 운(運)이라고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사(生死)라는 문제가 걸린 ‘죽고 사는 문제’라면 어떨까? 의학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한 현대까지도 생사(生死)의 문제만은 아직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아직도 현대의술로도 못 고치는 불치의 질병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이미 죽은 생명을 되살릴 수 있는 방법도 나와 있지 않음이 현실이다. 동양명의로 이름이 높았던 편작(扁鵲)도 죽음의 앞에는 두 손을 들라고 했듯이 아마도 생과 사는 영원히 조물주의 몫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따라서 생사야 말로 진정한 명(命)을 표현하는 명제가 아닐까?

목숨을 뜻하는 용어에는 명(命) 생명(生命) 수명(壽命) 단명(短命) 연명(延命) 운명(殞命)이라는 말들이 있다. 여기서 운명(殞命)이란 죽음을 뜻하는 말이다. 그래서일까?

인간의 생사를 주재하고 주관함은 오직 하늘이라고 여겨 천명(天命)이라고 위안을 할 수도 있다. 또 인명(人命)은 재천(在天)이라 여겨 사람이 죽고 삶은 모두다 하늘의 뜻이라며 장수(長壽)와 요절(夭折)은 이미 태어나면서부터 정해져 있다는 운명론이 그럴 듯하게 들릴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죽음(殞命)을 보면 삶이 보인다. 인생의 밑그림은 역설적으로 어떻게 죽는가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전생(前生)을 인정하는 서양사회나 윤회(輪廻)를 받아들이는 동양사회의 ‘삶과 죽음’에 대한 입장에서 본다면, 죽음은 삶의 끝이지만 새로운 ‘영혼의 삶’의 시작일 것이니 말이다. 

다섯째 인과응보의 법칙을 알면 운명도 바꿔 입명(立命)할 수가 있다. 운명은 숙명이 아니며 인과응보의 법칙으로 변화될 수 있다. 이러한 이치를 상세히 밝혀준 책이 있다. 바로 중국 명대의 원료범(袁了凡)이 쓴 음척록(陰瘠碌)이다. 이 책에서 그는 운명론을 인정하나 사람의 마음이나 생각에 따라 주어진 운명도 변할 수 있다는 개운(開運)이론을 주장하고 있다.

원료범의 가정은 대대로 의술을 가업으로 삼는 집안에서 태어나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손에서 길러졌다. 가업을 이어 의학을 공부하던 소년 시절에 갑자기 한 노파가 와서 자신은 역학을 공부하는 사람인데 천명(天命)을 쫓아 소년에게 역학의 진수를 전달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노파는 이렇게 말했다. 어머님께서 이 아이를 의사로 만들려고 하시겠지만 이 아이는 그 길을 걷지 않을 겁니다. 성장하면서 과거시험을 봐서 관리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몇 살에 어떤 시험을 보고 몇 명중에 몇 등으로 합격할 것이라는 것뿐만 아니라 젊은 나이에 지방장관이 되어 크게 출세할 것이라는 것이며,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는 없을 것이라는 것과, 53살에 죽을 것이라는 것 등 소년의 운명을 하나하나 모두 예언했다.

그 후 원료범의 인생은 모두다 이 노파의 예언대로 되어갔다. 그리고 지방장관이 된 원료범이 어느 날 고명한 노승이 있는 선사를 찾아 좌선에 들어갔다. 무념무상의 훌륭한 좌선을 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노승이 물었다. 한 점 구름 없는 훌륭한 좌선이 구나? 대체 어디서 수행을 하였는가? 

원범은 수행경험 같은 것은 없었다고 말하며 소년시절에 만난 노파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나는 그 노파가 말한 대로 인생을 살아왔습니다. 53살이 되어 죽는 것도 나의 운명이겠지요. 그러니 지금 와서 달리 생각하거나 고민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이 말을 들은 노승은 원료범에게 호통을 쳤다. 젊어서 깨달음의 경지에 이른 사람인가 했더니 완전 바보였구나. 운명 하나만 따라 가는 것이 인생인가? 운명은 하늘이 내린 것이지만 결코 인위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부동의 것도 아닌데 말이야!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일을 하면 자네의 인생은 정해진 운명을 벗어나 더욱 훌륭한 방향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이라고 들려준다.

노승께서는 인과응보의 법칙을 말해준 것이다. 원료범은 그 말을 받아들여 이후 나쁜 마음가짐을 거두고 선행을 쌓으며 살았다. 그 결과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던 자식도 얻어 후사를 이었고 수명도 예언되었던 나이인 53세를 훨씬 넘긴 천수를 다하였다. 

이처럼 하늘이 정한 운명도 자신의 힘으로 바꿀 수 있음이다. 그러므로 좋은 생각과 행동을 쌓아감으로써 인과응보의 법칙이 살아나고 그에 따라 우리는 운명으로 정해진 것 이상의 좋은 인생을 살 수가 있음이다. 이러함을 입명(立命)이라 정의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런 섭리나 법칙을 현실에서 믿는 사람은 별로 드물다. 오히려 비과학적이라며 비웃는 사람이 더 많은 게 현실이다. 근대적 지성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운명을 미신으로 치부하고 인과응보의 법칙을 나쁜 짓을 하면 당연히 벌을 받는다고 어린아이들을 가르치는 도덕적인 방편으로 왜곡하고 있음이니 한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물론 현대과학의 수준으로 그 ‘보이지 않는 불가사의한 힘’의 존재를 증명할 길이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만약 좋은 행동이 언제나 좋은 결과로 즉각 나타난다면 사람들은 의심없이 그것을 완전히 받아들여 믿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원인이 즉각적으로 결과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음이 현실이다. 오늘 행한 좋은 일이 곧장 내일의 좋은 결과로 나타나는 경우도 드물다. 또한 ‘1+1’의 해답이 정확히 2인 것처럼, 을(乙)이라는 결과가 나온 것이 바로 갑(甲)이라는 원인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인과관계가 명료하게 나타나는 경우도 매우 적다.

그러함의 이유는 운명과 인과응보의 법칙은 서로 씨실과 날실을 이루어 우리의 인생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씨실과 날실의 2가지는 서로 간섭을 하는 관계이다. 

예컨대 운명(운세)적으로 매우 나쁜 시기에 약간의 선행을 했더라도 운명(운세)의 힘이 그 선행을 상쇄해 없애버린다면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운명(운세)이 아주 좋은 시기에 약간의 악행을 하더라도 악행을 상쇄해 없애버린다면 나쁜 결과가 되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운명(darma)이란 숙명이라는 하나의 원을 확인할 수 있도록 하나하나 풀어가기 위한 도구이다. 1년에는 4계절이 있고 24절기가 있다. 이처럼 운(運)이 계절이자 절기라고 표현을 해본다면 잘못일까?

운명은 이미 정해져 있지만 인간의 뜻과 자유의지가 반영되어 자신이 스스로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도 있음이다. 

운명이란 만들어가는 인연(因緣)과 감정을 나타내는 칠정(七情)에 의해서 쉼 없이 변화하면서 자유롭게 살려고 한다. 그러나 사람의 의지로 운명을 개척할 수도 쌓아올릴 수도 있음이 아닐까?

그러므로 인간에게 운명이라는 게 있지만 결코 바꿀 수 없는 게 아니다. 착한 것을 생각하고 착한 일을 하면 운명을 보다 좋게 바꿀 수 있다. 인생은 자신이 그리는 대로 된다. 그러기에 스스로가 마음에 무엇을 그리는가에 의해 운명과 인생이 달라진다고 할 것이다.

마음에 그리는 생각 꿈 희망이나 마음에 품는 철학 이념 이상에 의해 그 사람의 인생이 결정 된다. 그러나 적당히 생각하고 막연하게 그리는 게 아니라 강렬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생각하되 필사의 노력이 따라야 한다는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공부든 일이든 사업이든 정치든 조금 노력하다 잘 안 되면 거기서 주저앉아 포기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 끈질기게 그것도 이제 이 이상은 더할 수 없다는 경지까지 노력을 해야 한다. 그런 경지에 도달하면 반드시 신의 선물이나 계시라고 여겨질 만큼 멋지고 큰 행운을 맞이하여 필요한 힌트를 발견하거나 도와주는 후견인이 반드시 나타나게 되는 법이니 말이다. 이것이 바로 운명이다.

우주를 구성하는 하늘과 땅은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 이 움직임에는 보이지 않는 흐름이 있다. 하늘은 땅을 품고(天命) 땅도 하늘을 품고(地名) 있다. 천명(天命)은 인간으로 태어난 자기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使命)이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해서도 바꿀 수 없다는 천명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에 인간은 비로소 자신을 활용할 수 있게 된다. 내 천명은 무엇인가?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동안은 아무리 움직여보아도 모두가 헛일이다. 

한편 공자는 일찍이 <천명(天命)•덕명(德命)•녹명(祿命)>을 강조하면서 세상 모든 사람이 천명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제는 모든 사람이 그 우주적인 법칙에 종속됨으로써 이른바 하늘의 뜻, 즉 천명에 부합하기 위해 도덕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자가 생각한 궁극적 완성은 하늘이 내려준 초월적 덕을 우리 몸에 배양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하늘의 뜻에 반항하거나 순종하지 않을 수도 있다. 공자는 <부귀는 천명에 매어 있고, 생사는 운명에 매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일이 라는 말이다. 

그러면서 공자는 <천명(天命)•덕명(德命)•녹명(祿命)>의 3가지를 두려워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천(天)이란 우주만물의 생멸과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는 주체인 최고신이라 했다. 예컨대 공자는 ❶ 천명(天命)은 하늘이라는 최고신의 명령이고 ❷ 덕명(德命)은 하늘이라는 최고신이 준 도덕적인 사명이며 ❸ 녹명(祿命)은 사람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숙명(宿命)=녹명(祿命)이라고 했다. 

공자가 <50에 지천명(知天命)>이라고 했을 때의 천명이 바로 이 3가지를 통칭해서 한 말이었다. 우리가 흔히 성인이라고 부르는 존재들은 바로 이런 천명을 깨닫고 그것에 따라서 이 세상을 살다가 가는 존재라는 규정이었음이다.

노병한 풍수·사주칼럼리스트

-자연사상칼럼니스트

-한국미래예측연구소장

-노병한박사철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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