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아지를 경기도 66마리, 충청도 9마리, 경상도 42마리, 전라도 59마리, 황해도와 강원도 각 13마리, 평안도 11마리, 함길도 3마리로 배정하고 기르게 했다”
1431년(세종13) 7월 17일, 병조에서 명나라에 진상할 강아지를 총 203마리 키우고 있다며 세종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오늘날 군견이 국방부 관할인 것처럼 매는 응방에서, 말과 사냥개 등은 병조 산하 관청인 ‘사복시’에서 관리했다.

이에 앞서 그해 3월 6일, 왕의 경호실 내금위 무관 이곤이 명에 보낼 강아지를 훔친 죄로 얼굴에 ‘도둑’이라는 글씨를 새기는 형벌에 처해졌다. 명 황제에게 진상할 정도라면, 조선에서도 귀한 개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강아지들은 명 황실이나 제후, 고관대작만이 키웠을 것이다.

중국 황실견으로 알려진 대표적인 개는 시츄, 페키니즈, 차우차우다. 시츄는 당나라 시절 페키니즈와 티베트 왕실견 라사압소를 교배해 만든 견종이므로 당연히 아니다. 페키니즈는 진시황 시절부터 있었다고 전한다. 차우차우는 티베탄 마스티프와 러시아 사모예드 사이의 교배종이다. 오늘날 중국에서 가장 비싼 개로 취급받는 사자견 ‘짱아오’가 됐다.

조선 초기 명나라가 가장 자주 요구했던 동물은 매와 사냥개였다. 명 사신들은 올 때마다 사냥개를 달라고 졸랐다. 심지어 조선에서 사냥개를 얻어다가 장사까지 한 모양이다. 1408년 10월 27일(태종8) 실록에서는 “사신으로 왔던 황엄 등이 사냥개를 얻어 가 값을 몇 배나 받고 팔아 큰 이득을 챙겼다. 이런 까닭에, 올 적마다 매우 간절히 청했다”는 설명을 달았다. 그때도 황엄 일행은 세자 시절 정종과 태종에게 사냥개 10마리를 얻어 갔다.

1468년(세조14) 5월 12일, 사신 강욱은 한 번에 사냥개 26마리를 세조로부터 선물 받고 감격해 했다. 우리나라의 사냥개가 명나라에서 인기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양녕대군은 세자 시절 신하의 집에서 황금색 애완 고양이와 사냥개를 여러 번 빼앗기도 했다.

■ 명나라가 요구한 강아지 ‘구아’(狗兒) 견종은 무엇?

아무래도 성견보다는 강아지 때부터 길들이는 게 쉬운 법. 1430년 경 무렵부터는 명나라에 보내는 진상품이나 윤봉, 강옥 같은 사신에게 주는 선물에 강아지 ‘구아’(狗兒)가 등장한다. 1430년(세종12) 11월에는 일본에서 강아지 ‘구아’(狗兒)를 달라고 부탁했는데, 거절했을 정도였다.

문종 대에 이르러서야 일본은 강아지를 얻어 갈 수 있었다. 일왕실과 귀족에게 인기 높았던 매사냥용으로 키우기 위해서였다. 흔한 강아지라면 일본 사신들에게 주지 않을 리가 없다. 더욱이 강아지 수를 정하고 이를 국가에서 사육한 기록을 남겼다. 뭔가 고급스러운 품종의 견종인 듯하다.

그런데 명나라가 개나 강아지를 요구할 때는 대개 여러 종의 매와 ‘1+1’ 세트로 보낸 점이 주목된다. 1428년(세종10) 7월 28일과 8월 4일 연이어 명나라에 송골매 10연(連)과 도합 33마리의 사냥개를 보냈다. 이때는 총 20명의 전문 매사냥꾼 ‘응사’가 동행해 떠났다. 이듬해 1429년 7월 19일에는 아골(鴉鶻) 30연(連), 황응(黃鷹) 10연, 조응(皂鷹) 4연 등 여러 종의 매와 ‘큰 개’ 40마리를 보냈다.

매사냥뿐만 아니라 모든 사냥에는 사냥한 먹잇감을 물어오거나 몰기 위해 사냥개가 필수적으로 따른다. 매사냥 애호가였던 태종과 연산군 등은 수십 마리의 사냥개를 데리고 다녔다. 1452년(세종7) 2월 30일, 왕이 주관하는 사냥행사 때 왕자와 대신들이 데려오는 사냥개를 2마리로 제한하기도 했다. 중종 때까지는 지방 관찰사들에게 정기적으로 사냥개를 바치게 했다. 세조와 성종 등은 공신이나 퇴직하는 대신들에게 때로는 사냥개와 매를 선물했다.

다시 시간을 거슬러 1431년(세종13), 명나라에 보내기 위해 강아지를 나눠 기른 곳을 살펴보자. 함경도와 평안도 등 북쪽은 몇 마리 안 된다. 경기도가 66마리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는 전라도와 경상도 순이다. 경기 지역은 왕과 왕실의 사냥터가 밀접한 곳이다.

조선왕조실록에 개에 관한 기록은 구(狗), 견(犬) 등으로 표기되어 700여 건의 기사가 나온다. 색상별로는 누렁개, 흰 개, 검은 개가 나타난다. 삽살개인 방구(厖狗), 주둥이가 뾰족해 사냥을 잘하는 사냥개인 전견(田犬), 주둥이가 짧고 잘 짖어서 집을 지키는 폐견(吠犬) 등으로 나눴다. 그중 왕실 기록과 관련해 가장 많이 언급한 개는 단연코 사냥개다. 실록에는 전견 또는 응견(鷹犬)으로 100여 건의 기록이 보인다.

■ 진돗개의 조상은 동북아 사냥개 라이카

목축견과 사냥견은 별개의 능력이다. 사냥개를 동원한 멧돼지 사냥에서 보듯 냄새에 의한 수색과 추적, 그리고 사냥꾼이 올 때까지 짐승의 발을 묶어놓는 기술이 필요하다. 원래 진돗개는 목축견이나 경비견이 아니라 사냥용으로 쓰였다.

티베탄 마스티프는 덩치가 크고, 추위를 이기기 위해 털이 길다. ‘사자견’이라는 별칭을 얻은 것도 이 때문이다. 귀도 쫑긋하지 않고 접혀 있다. 빠른 주력과 예민한 청력이 필요한 수렵에는 적합하지 않은 체형이다. 주로 양이나 말을 지키는 목양견으로 쓰인 것도 이때문이다. 경비견이나 호신용 보디가드 용도로 키웠다. 티베탄 마스티프의 후손 ‘몽골리안 방카르’ 견종 또한 지금도 주로 목양견으로 쓰인다.

서양의 사냥개들은 대부분 엽총으로 쏘아 떨어진 짐승을 찾아내거나 사냥꾼에게 사냥감을 모는 역할을 한 몰이용 개에 그친다. 하지만, 진돗개는 엽총을 가지고 사냥하지 않아도 어지간한 사냥감을 직접 사냥할 수 있다. 노루 정도는 혼자서 잡고, 큰 멧돼지들도 대여섯 마리가 협공하면 잡을 수 있다.

요즘에도 멧돼지를 사냥할 때는 대부분 사냥개 다섯 마리가 한 조를 이뤄 활동한다. 달리기 실력과 예민한 후각을 겸비한 ‘리드 견’이 멧돼지의 위치를 알아내 짖으면, ‘공격 견’들이 뒤따라가서 멧돼지를 물어버린다.

어쩌면 ‘진돗개’가 명에서 요구한 강아지일지 모른다. 진돗개의 조상은 동북아가 원산인 사냥개 라이카 견종이다. 동북아에서 대표적 목양견은 티베탄 마스티프이지만, 수렵견은 라이카다. 라이카는 15000년 전 가축화된 늑대개의 피를 가장 먼저 이어받았다. 고대 국가 부여에서부터 줄곧 사냥개로 키웠다.

예나 지금이나 최정예 사냥개들은 쉽게 만들어지지 않는다. 부여에서는 이들을 보살피는 관직을 ‘구가’(狗加)라고 불렀다. 말 사육 담당자 ‘마가’(馬加)와 대등한 높은 벼슬을 받았다. 고구려에서도 귀하게 취급받았다. 고구려 고분 무용총 벽화에 호랑이를 사냥하는 검은 개가 그려져 있다. 이 개가 바로 ‘한로’(韓盧)라고 부른 라이카 견종이다. 무용총 수렵도에서 호랑이를 쫓아 말과 같이 힘차게 달린다.

신라 진평왕(579∼632)은 “매와 사냥개를 놓아 꿩과 토끼를 잡았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당시에 매사냥은 물론 사냥개도 존재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사냥개에 대한 언급은 견훤이 고려 태조 왕건에게 보낸 서신에서 보인다.

■ ‘방상시’(方相氏)의 문화 원형인 티베탄 마스티프와 라이카

라이카 견종은 2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고구려-발해-거란-금-원-청-조선을 거치면서, 사냥개와 번견으로 특화됐다.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산속 마을에서 집을 지키는 번견으로서 역할 또한 대단히 중요했다.

동북아 라이카는 호랑이나 표범 사냥용으로 많이 활용됐다. 중형 체구이지만, 몸놀림이 기민하다. 칭기즈칸의 몽골 원정 등을 거치면서 전래되어 스칸디나비아 쪽 웨스트와 시베리아 쪽 이스트로 나뉘었다. 지금도 몽골, 연해주 등에서 사냥개로 쓰인다. 만주와 시베리아 지역의 옛 고리드 개도 넓은 의미에서 라이카 견종의 하나다.

비교적 순수한 라이카 견종과 티베탄 마스티프는 모두 눈 위에 점이 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네눈박이’처럼 보인다. 대부분 진돗개 하면 백구나 황구만을 떠올리는데 호랑이 무늬 호구, 완전히 검은 흑구, 재구 등 의외로 많은 견종이 있다. 그중 ‘네눈박이 ‘블랙탄’이 오리지널이다. 라이카와 티베탄 마스티프의 장점을 모두 가졌다.

블랙탄 진돗개 또한 눈 위에 점이 선명하다. 진돗개 중에 가장 사냥 성향이 강한 종이다. 멧돼지와 맞설 정도로 용감해 한번 물면 놓지 않는 지독한 근성을 가졌다. 외국 사냥개와 달리 특별한 훈련을 거치지 않고도, 수렵견으로 뛰어난 자질을 발휘한다.

한때 진돗개를 군견으로 쓰려 할 때 블랙탄이 뽑혔을 만큼 싸움에 으뜸이며 날렵하다. 그런데도 1명의 주인만을 따르는 지나친 충성심 때문에 블랙탄은 군견에서 탈락하고 기존 셰퍼드로 모두 교체됐다. 주인이 아닌 타인이 먹이로 유혹해도, 쉽게 접근하거나 먹지 않는다. 군견병이 제대를 하거나 바뀌면 사료 먹기를 거부하고 쉽게 적응하지 못한 게 군견 탈락의 이유였다.

우리나라에서 대대로 라이카나 티베탄 마스티프 견종을 귀하게 대접했던 흔적은 ‘방상시’(方相氏)에 남아 있다. ‘방상시’는 부리부리한 4개의 눈, 방울이 달린 곰 가죽을 씌운 큰 탈 모습이다. 각종 의식에서 잡귀를 쫓는 벽사 역할뿐만 아니라 전통 장례에서 상여를 이끌 거나, 임금의 거둥에서 행렬을 호위하는 역할까지 수행했다. 신성함의 상징인 황금빛 눈이 네 개나 있어서, 온갖 잡귀를 빈틈없이 잡아낼 것이라는 믿음에서 기인한다.

실제 조선시대 유명 화가들의 개 그림을 살펴보면,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티베탄 마스티프에서 유래한 ‘몽골리안 방카르’ 견종의 삽살개와 라이카 견종이다. 흔한 잡종 개라면, 그림으로까지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 원나라 때 몽골 사냥개 한 번에 150마리 수입

진돗개의 조상이 라이카라는 사실은 고려 역사에서도 확인된다. 고려 시대 원(몽골) 간섭기 때는 많은 사냥개가 꾸준히 유입됐다. 한 번에 백여 마리를 몽골에서 들여오기도 했다. 그리고 때로는 개량되어 원나라에 다시 보내졌다. 고려와 원나라 사이에는 수많은 매와 개, 그리고 말이 오간 기록이 있다.

1277년(충렬왕3) 12월, 원나라에서 호랑이 잡는 사냥꾼(착호사) 18명을 파견했다. 이들은 말 30필과 개 150마리를 가지고 왔다. 이때 원에서 데려온 사냥개가 바로 라이카 견종이다. 개를 데리고 온 사람이 ‘착호사’라는 전문 사냥꾼들이기 때문.

조선시대에도 호랑이 사냥 전담 특수부대인 ‘착호 갑사’를 운영했다. 충목왕 4년(1348) 11월에는 원나라의 오왕(吳王·木南子)이 매와 더불어 사냥개를 보냈다. 공민왕 15년(1366) 12월에는 요양성의 고가노가 사냥개를 바쳤다.

제주도는 원 간섭기부터 조선시대까지 대규모 말 사육장이었다. 말과 함께 오랜 기간 많은 수의 사냥개가 제주도로 흘러들었다. 특히 제주도는 타 지역에 비해 비교적 품종 보존이 용이했다. 제주도에서 번식한 라이카는 제주도와 진도를 비롯한 남해안 일대에 널리 퍼졌다. 오늘날 진돗개의 유래가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제주견 역시 라이카에서 전래한 견종이다.

라이카를 조상으로 둔 진돗개는 호랑이나 표범, 늑대 등 포식자에 밀려 남해안으로 내려온 사슴과 오소리 사냥 등에 널리 쓰였다. 북한 지역에서는 풍산개가 라이카의 피를 물려받았다.

■ 조선시대 ‘달구’(㺚狗)의 정체는 라이카 사냥개

1368년 원나라 멸망 후 초원으로 물러나면서 몽골은 몇 개 부족 집단으로 다시 쪼개진다. 북원(北元)세력 중 서몽골이 와랄(瓦剌), 동쪽과 요동 지역에서 패권을 차지한 집단이 달단(韃靼), 또는 달달(達達)로 칭한 타타르(Tatar) 부족 연맹이다. 외형상으로는 러시아 혼혈에 가깝고, 체구도 컸다. 어떤 경우에는 거란, 말갈, 여진족도 포함됐다.

일부 달단인 등은 원나라 말기에 전란을 피해 고려로 들어와 수렵을 위주로 하면서 정착했다. 원래 유목 민족이었던 이들은 가축을 도살하거나 가죽제품을 만들면서 살았다. 화척(禾尺), 수척(水尺) 등으로 부르다가. 조선 초에 백정(白丁)으로 바꿔 불렀다. 임진왜란 때도 몽골 출신 명나라 병사는 달달병(達達兵), 또는 달자(達子)라고 했는데, 용맹함 때문에 일본군이 가장 두려워한 대상이었다.

결정적으로 조선시대 주력 사냥개가 라이카 견종이라는 것은 실록에서 확인된다. 세조와 성종, 연산군 등 사냥을 좋아했던 왕의 실록을 살펴보면 ‘향구’(鄕狗)라는 토종 사냥개와 ‘달구’로 표기한 정체불명의 사냥개가 등장한다. ‘향구’(鄕狗)와 ‘응구’(鷹狗)는 매가 사냥한 꿩이나 철새 등을 물어오는 소형 사냥개 종이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조선왕조실록>웹사이트에서는 달구(㺚狗)를 ‘물개’라고 오역했다. 1491년(성종22) 5월 25일 기사에 “매와 물개를 모두 여러 도(道)로 하여금 돌아가며 바치게 하라”는 부문과 1509년(중종4) 10월 28일 기사에 ‘이말손’이란 사람이 멧돼지와 꿩 사냥 등을 위해 기르는 달구를 ‘물개’라고 오역한 부분 등이다.

실록에서 주목되는 것은 ‘달구’가 곧 ‘달단’, 몽고를 포함한 동북 사냥개’라는 점이다. 사냥을 좋아했던 왕들 때문에 진돗개 조상이 라이카 견종에 나왔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달구’가 라이카 사냥개 견종이라는 점은 1417년(태종17) 7월 16일 기사에서 처음 보인다. 태종 이방원은 “진상품으로 몸체가 큰 ‘달달구자(達達狗子)’를 보내고자 하니, 각도 관찰사 등은 구해서 바치라”고 지시한다. 여기서 ‘달달구자’는 몽고의 사냥개 라이카를 말한다.

■ 라이카 사냥개 10마리로 어가를 호위한 연산군

‘달구’라는 견종이 가장 많이 보인 때는 세조에서 연산군 시절이다. 1458년(세조4) 9월 19일, 세조는 ‘달구’ 20마리를 강원도와 함경도에서 구해 명에 보냈다. 1468년(세조14)에는 명에 보낼 ‘달구’가 부족했나 보다. 5월 13일, 세조는 여러 관찰사에게 “만약 몸이 크면 비록 재질이 불량하더라도 바치라”고 지시한다. 이어 6월 8일과 9일 양일간 총 16마리의 ‘달구’를 사신 강옥 등에게 나눠 줬다. 그해 7월 4일, 세조는 39마리의 ‘달구’를 명에 보냈다.

성종이 등극한 후 10년 차가 된 1479년 3월 1일, 성종은 “사냥개를 구해야겠다. 강무(講武) 때는 반드시 사냥을 해야 하는데, 개가 꼭 필요하다.”면서 전국에 교서를 내린다. 다음 해 1480년(성종11) 4월 11일에도 충청도 관찰사·전라도 관찰사·경상도 관찰사·제주 목사들에게 ‘달구’를 바치라고 지시한다.

연산군 시절에는 발발이 종류의 애완견은 물론 사냥개를 수백 마리나 길렀다. 목줄도 안 채운 사냥개들이 대전에서 회의할 때 수시로 어슬렁거릴 정도였다. 연산은 사냥을 나갈 땐 가마 앞에 ‘달구’를 앞세우기도 했다. 1501년(연산7) 3월 15일, 연산은 ‘달구 10마리’를 어가 앞에서 군졸이 좌우에서 이끌도록 명했다. 1503년(연산9) 4월 22일에는 ‘달구’를 잃어버린 사람에게 벌까지 줬다.

그런데 일주일 후 4월 28일 조정 회의에서는 경비 절약에 대한 이야기가 오간다. 신하들은 말은 군사용으로 중요하지만, “매나 개를 기르는 것은 임금의 아름다운 덕이 아닙니다”라면서 연산을 압박한다. 또 “올해 같은 흉년에는 사료용 식량도 많이 드는 ‘달구’를 궁중에서 키우는 게 마땅하지 않다”며 연산의 지시를 철회할 것을 건의한다. 이날 실록에는 “왕이 대답하지 않았다”고 적었다.

1507년(중종2) 8월 6일, 중종은 “일 년에 한 번씩 가을에만 매와 향구·달구를 바치라”고 전교한다. 이후 ‘달구’는 중종 연간에 접어들면서 명나라 진상 품목에서도 빠지고, 임금의 사냥대회인 ‘강무’도 시들해지자 점차 기록에서 사라져간다.

■ 진돗개와 풍산개는 한핏줄 형제

얼마 전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선물한 흰 풍산개 한 쌍이 청와대에 들어왔다. 풍산개는 역삼각형 머리와 곧게 선 귀. 작지만 날카로운 눈빛. 뒤로 올라간 꼬리 등 진돗개와 닮은 점이 많다.

진돗개는 1938년 조선총독부가 천연기념물 제58호로 지정했다가 1967년 대한민국 정부가 다시 천연기념물 제53호로 지정했다. 풍산개도 1942년 조선총독부가 천연기념물 제128호로 지정했다가 1964년 북한 정부가 천연기념물 제368호로 지정한 역사가 있다.

전남 진도에서 토종개로 보존되고 있는 진돗개의 평균 체고(앞발에서 어깨까지 높이)는 45~53㎝, 풍산개는 평균 체고가 53~55㎝다. 외형적으로도 진돗개와 별반 차이가 없고, 영리하고 용맹스러운 점까지 닮아 쉽게 구분하기 힘들다.

북한 풍산개도 남한 진돗개처럼 주로 인기가 많은 백구 위주로 번식한다. 김일성·김정일 부자가 1976년 개마고원 풍산에 사육장을 명령할 때까지만 해도 풍산개는 백구뿐만 아니라 황구와 재구도 있었다. 네눈박이 ‘블랙탄’은 점점 사라지는 중이다. 개마고원에서는 지금도 양을 기르는데, 풍산개들이 양을 지키거나 모는 양치기 개 역할도 한다.

풍산개라는 이름은 1938년 일본 모리 교수에 의해 붙여졌다. 일제에 의해 다른 견종으로 분류됐지만, 결국은 한 조상인 라이카 견종 아래 같은 혈통을 가진 개들이다. 남북한이 같은 민족인 것처럼, 진돗개와 풍산개는 한핏줄을 나눈 형제견이다.

일본에서는 아키타 견종인 충견 ‘하치’가 유명하다. 아키타는 임진왜란 전후 한국의 진돗개가 대량으로 넘어가 남방계와 섞여지면서 탄생했다. 백제와 신라 때부터 몇 마리씩 얻어가다가 대량으로 전래한 것이다. 일본의 시바견과 많이 닮았지만, 아키타가 더 크다.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처럼, 우리도 ‘견공 공정’을 해야 하는가.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내외뉴스통신, NBNNEWS

기사 URL : http://www.nbn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01927

저작권자 © 내외뉴스통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