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외뉴스통신] = 1404년 2월 8일(음), 황해도 해주 인근. 봄을 앞두고 유난히 짙은 안개가 꼈던 날. 한창 노루 사냥을 하던 태종이 말이 거꾸러지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졌다. 민망했던 태종은 말에서 떨어진 것을 숨기고 싶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사관이 알지 못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다행히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체면이 서지 않은 게 더 신경 쓰였던 것. 그 날 저녁 한양에 돌아온 태종은 태상왕 이성계와 상왕 정종에게 노루와 사슴고기를 보냈다.

<조선왕조실록>은 왕의 사냥에 대해서 삼국시대나 고려 시대보다 매우 꼼꼼하게 적었다. 심지어 사관(史官)들이 사냥터까지 따라다니는 바람에, 태종은 언행에 무척 신경을 썼다. 이날도 강무 중에 태종이 낙마한 일과, “그 얘기를 하지 말라”고 명령했다는 사실까지 고스란히 사관이 듣고, 사초에 적어 실록으로 편찬된 것이다.

현대식으로 풀이하면 대통령이 비공식 ‘오프 더 레코드’로 말한 것까지 ‘특종으로 보도’가 된 셈. 그야말로 철혈 군주 태종의 대 굴욕 사건. <조선왕조실록>과 사관의 위대함을 언급할 때 자주 인용되는 기록 중 하나다.

이 때 실록을 기록하던 사관이 바로 민인생이다. 그는 거의 스토커 수준이었다. 태종이 등극한 초창기, 측근 몇몇만 데리고 종종 비공식 사냥을 나갔다. 민인생은 복면까지 하고 어김없이 뒤따라갔다. 대전 이외에 왕의 개인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을 때도 마찬가지. 병풍이나 휘장을 들쳐 내고 몰래 엿보다가 쫓겨나갔다.

태종 입장에서는 거의 찰거머리 그 자체였다. 참다 참다못한 태종이 버럭 화를 냈다. 민인생은 그것 자체도 적겠다고 나섰다. 민인생은 내전까지 기웃거렸다. 생각할수록 민인생이 괘씸했던 태종은 결국 보복성 인사로 사관직을 잘랐다. 민인생은 세종 때 되어서야 복직할 수 있었다. 서울시 경찰서장급 벼슬까지 했다.

그런데 그 이후에도 태종의 낙마 사고가 종종 있었다. 1405년(태종5) 2월 7일에도 경기도 광주에서 매사냥을 하다가 떨어졌으나, 다치지 않았다. 1420년(세종2) 2월 8일, 세종이 상왕인 태종을 모시고 해주에서 강무를 할 때다. 기병 1,000명, 보병 2,000명과 몰이꾼 역할을 하는 수천 군사들이 움직였다.

태종이 매를 팔에 올리고, 날리는 순간 말이 쓰러지는 바람에 말에서 떨어졌다. 이 날은 나이가 든 만큼 타박상 정도는 입었나 보다. 그날 몸이 불편해하던 태종은 다음날에는 노루와 사슴 사냥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해했다.

■ ‘강무’라고 쓰고 ‘임금님배 사냥대회’라고 읽는다

조선시대 사냥을 즐긴 왕은 태종·세조·성종 등이 대표적이다. ‘왕의 사냥’ 행사는 그냥 재미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왕이 궁중 밖에 사냥을 나가는 일을 가리켜 무예를 강습한다는 뜻으로 강무(講武)라고 불렀다. 원래 강무는 사냥 형식을 띤 왕의 지휘 훈련이자, 종합 진법 훈련의 성격을 띠었다. 왕을 비롯해 왕자나 문무 대신 등이 고루 참석했다.

기본적으로 적게는 3000명에서 1만명의 군사들이 참여한 가운데 1주일에서 15일 정도 진행했다. 요즘의 한·미 연합 군사훈련, 아니 ‘임금배 사냥대회’ 정도가 되겠다. 조선 초기인 태조 태부터 시작되어 태종, 세종, 세조 때까지 매우 활발하게 시행됐다. 성종 연간부터는 2~3일 단기간 일정으로 열리는 소규모 강무 행사인 ‘타위’(打圍) 위주로 바뀌었다.

강무 활동을 빙자한 사냥은 몰이꾼을 동원해 짐승을 몰아놓고 활을 쏘는 사렵(射獵), 매와 사냥개를 활용한 응렵(鷹獵), 사냥개를 통한 견렵(犬獵) 등으로 이뤄졌다. 주로 한양 근거리 황해도 구월산 주변, 강원도 철원, 경기도 여주 일대에서 진행했다. 이는 왕의 신변 보호와 거리상의 문제도 있고, 너무 오랜 기간 국정을 비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또 백성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주로 농한기에 실시했다. 가을 추수를 마치고 양력 10월~11월, 3~4월 사이에 열었다. 잡은 짐승 중 특별히 좋은 것은 종묘 등의 제사에 올리고, 나머지는 바비큐 파티를 열어 나눠 먹었다.

사실 강무는 군사훈련, 백성에 피해를 주는 호랑이 등 짐승 제거, 지방 수령 및 백성과의 대화 효과라는 표면상 목적보다 병폐가 더 많았다. 왕조 시대 임금님 행차에 조용할 리 없는 법. 왕을 수행한 수행원들은 물론이고, 사냥 가는 지역 수령은 임금이 자기 관내에 들어오니 당연히 초긴장 상태였다.

더욱이 그 지역 주민들은 왕의 사냥 준비를 도맡아 해야 했으니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게다가 많은 군사들이 동원되어 몰이꾼 역할을 했으므로 여기에도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 세종을 제외하고 사냥을 즐긴 왕일수록, 수렵에 반대하는 상소가 비례했다. 수많은 인원이 움직이다 보니 사고 위험도 높았다.

1431년(세종13) 2월 20일 포천 강무 때는 혹독한 날씨 속에 진눈깨비까지 내렸다. 이날 26명이 얼어 죽고, 우마 70마리가 죽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때로는 강무 중에 호랑이에게 물려 죽는 사고도 여러 번 발생했다.

■ 태종의 ‘최애 취미’ 매사냥

1418년 8월, 태종은 전격적으로 양위 선언을 한다. “18년 동안 ‘호랑이’ 등을 탔으니, 이미 족하다.”라는 멋진 말을 남기면서. 세종이 세자가 된 지 2달 만에 옥새를 물려준 다음에는 본격적으로 매사냥을 즐겼다. 따라서 <세종실록>의 매사냥 기록은 대부분 태종과 관련된 일이 많다.

양위 초에는 아들인 세종이 살이 너무 쪘으니, 바람도 쐴 겸 함께 사냥 나가자고 은근슬쩍 세종을 끌어들였다. 거의 태종 스스로 스케줄을 짜고 세종을 동반했다. 명분상 몸이 비만한 세종의 건강을 위해서라는 구실로 사냥을 권했다..

어떤 때는 따가운 신하들 시선을 의식했는지, 정종을 포함해 셋이 단란하게 매사냥에 나서기도 했다. 현대적으로 해석하면 맨날 공부만 파고, 고기만 좋아하는 ‘뚱뚱한 집돌이’에게 아빠가 큰아빠하고 같이 캠핑 가자고 강권한 것. 그러다가 아예 매사냥 포인트인 뚝섬 인근 풍광 좋은 곳에 별장인 낙천정을 마련하고, 사냥으로 소일했다. 지금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광진구 자양동 현대강변아파트 인근이다.

그렇다고 해서 태종이 국정에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세종에게 양위한 다음에도 군권을 쥐고 있던 태종은 이 무렵 이종무를 시켜 대마도 정벌을 감행했다. 1419년 5월 일본 원정 함대의 사열을 받았던 곳이 바로 중랑천과 한강이 합치는 동호대교 북단 두모포였다. 태종의 매사냥은 1422년(세종4) 죽기 한 달 전 4월 22일까지 계속됐다. 이후 병석에 누워 시름시름 앓다가 5월10일, 56세에 이르러 생을 마감했다.

태종의 별장 건너편 압구정동은 세조∼성종 때의 권력자 한명회가 세운 ‘압구정’이라는 정자에서 유래했다. 압구(狎鷗)라는 말처럼 오리와 갈매기가 강가에서 평화롭게 노닐어 중국 사신들도 구경하고 싶어 할 정도였다.

세종의 강무는 휴식과 휴가 차원에서 이뤄졌다. 열혈 남자 태종은 통금도 해제되 기 전, 동대문 문 여는 시간도 앞당기게 하고 새벽 댓바람에 말 달려 나갔다. 세종은 가마를 타고 사냥터로 나가 구경하는 수준이었다. 성종은 초기에는 기존의 왕들과 달리 수렵을 금지하는 법을 만드는 등 사냥의 병폐를 줄이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가 재위 후반기로 갈수록 매사냥만큼은 흉년이라도 꼭 행하려는 의지를 보였다. 저녁에는 궁궐 후원에서 해동청을 데리고 매사냥 연습을 할 정도로 열성이었다. 그러다가 매를 잃어버려 찾지 못하고, 방을 붙여 찾는 해프닝까지 벌였다. 성종은 경릉과 창릉에서 제사 지낼 때 호랑이가 말을 물어 죽이자, 주변에 호랑이가 있다는 것을 구실로 사냥을 벌이기도 했다.

연산군은 사냥이라기보다 병폐적인 ‘사냥 놀음’에 가까웠다. 밤에도 물론이고 정해진 기간, 장소가 아닌 곳에서도 빈번하게 사냥했다. 사냥 폐지를 주장하는 상소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버지 성종의 제삿날에도 사냥을 나갔고, 사냥에 반대하거나 준비를 제대로 못한 자들을 처벌했다.

■ 역사를 바꾼 이성계의 낙마 사고

1388년 위화도 회군은 고려의 몰락을 알리는 말이 됐다. 곧 이성계 세력은 실권을 잡았다. 온건파 정몽주는 급진 개혁파를 비판하면서, 점점 여론의 우위를 끌어냈다.
뜻밖에 온건파에게 절호의 찬스가 왔다.

1392년(공양왕4) 3월, 어느덧 58세 중년이 된 이성계가 해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진 것. 당대 최강의 말들이었던 ‘팔준마’를 번갈아 타던 그가 허리를 단단히 다쳤다. 이성계는 “내가 아직까지 낙마한 일은 없었는데, 정치하느라고 여러 해 말타기를 놓았기 때문에 이 지경이 되었구나”라고 한탄했다.

이성계의 낙마는 그가 품은 대업의 어려움을 나타내는듯 했다. 이성계가 낙마했다는 소식은 송도 장안에 퍼졌다. 총리급이었던 정몽주는 재빨리 조준, 정도전 등을 탄핵해 유배지로 보내버렸다. 절대 절명의 순간이었다. 반전의 계기는 25세 이방원이 마련했다. 1392년 4월26일, 선죽교에서 정몽주를 전격 살해한 것이다. 정몽주의 천하는 그렇게 허무하게 3일 만에 붕괴됐다. 그해 7월 이성계는 결국 왕위에 올랐다.

‘출마’는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선거에 입후보함’이라는 뜻. 본디 ‘말을 타고 싸움터에 나아간다’는 뜻인데, 이것이 ‘어떤 일에 나섬’으로 확대됐다. 그리하여 선거에 후보로 나서는 의미로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중도 하차’는 말 그대로 도착지까지 가지 못하고 중도에 차를 내린다는 뜻.

이는 곧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일이 진행되어 가는 중에 그만두게 됨’을 비유하여 표현한 것이다. 이에 반해 ‘낙마’는 단순히 ‘말에서 떨어짐’에서 ‘선거에 출마’했다가 떨어지거나, 비교적 어떤 ‘높은 자리에서 물러서게 됨’을 이르는 말로 변했다.

■ 출마(出馬)와 낙마(落馬), 하마비(下馬碑)와 하마평(下馬評)

하마비(下馬碑)는 누구든지 그 앞을 지날 때는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 예를 표하며 걸으라는 표시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교통 표지판. 1413년(태종13년)에 최초로 종묘와 대궐문 앞에 표목을 세웠는데, 나중엔 표석으로 바뀌었다. 이것이 나중에 ‘하마비’라고 새긴 비석을 세우게 된 계기가 됐다. 하지만 태종 때 왕실의 사냥매를 관리하던 응방인(鷹坊人, 혹은 응사·應師)들은 말에서 내리지 않고도, 지나갈 수 있는 특혜를 부여했다.

하마평(下馬評)은 어느 조직에 누가 임명될 것인지 세간에 떠돌아다니는 풍문을 말한다. 이 말은 바로 ‘하마비’에서 유래했다. 모시는 상전이 말이나 가마에서 내린 후 볼 일을 보러 가면, 가마꾼이나 마부들은 마냥 기다려야 했다. 그래서 주인을 기다리는 동안 그들끼리 잡담을 나누게 되었다.

요즘 기사 대기실처럼 별의별 이야기가 다 나왔다. 당연히 귀동냥으로 얻어들은 토막 정보를 꺼내 놓고, 장차 관직에 오를 사람들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인물평도 오고 갔을 터. 이 수군거림이 ‘하마평’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때로는 ‘하마평’이나 ‘말이 지나치는’ 바람에 설화를 입고, 중도에 낙마하기도 한다.

분명 ‘말을 타는’ 행위는 늘 ‘낙마 위험’이 도사린다. 낙마는 현대적 의미로 교통사고나 마찬가지. 아무리 내가 운전을 잘해도, 어떨 땐 남의 차가 들이받을 때도 있다. 출마했다고 자랑할 일도, 낙마했다고 아쉬워할 일도 아니다. 무분별한 출마보다는 중도 하차를 경계해야 한다. 낙마는 누구나 원치 않는 일이지만, 때로는 역사를 바꾸는 모멘텀이 된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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