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규의 사사구(史事口) 남발] 호랑이 때문에 성공한 인조 반정 (34)
[박승규의 사사구(史事口) 남발] 호랑이 때문에 성공한 인조 반정 (34)
  • 편집국
  • 승인 2018.11.30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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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가 경복궁 근정전 뜰에 들어왔다”<1405(태종5) 7월 25일>
“창덕궁 후원에 호랑이가 들어왔다”<1465년(세조11) 9월 14일>
“창덕궁 소나무 숲속에서 호랑이가 사람을 물었다”<1603년(선조36) 2월 13일>
“인왕산에서 호랑이가 나무꾼을 잡아먹고, 인경궁 후원으로 들어왔다” <1626년(인조4) 12월 17일>
“호랑이가 경복궁 후원에 들어왔다”<1752(영조28) 1월2일>

[내외뉴스통신] = ‘호랑(虎狼)’이란 원래 ‘범과 이리’라는 뜻. 잔인하고 포악한 사람을 빗대어 이르는 말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범 대신 호랑이, 이리 대신 늑대란 말이 보편화됐다. 조선 시대 가장 큰 민폐 덩어리는 호랑이였다. 한양도성에 수시로 호랑이가 출몰할 정도로 조선은 호랑이가 많은 나라였다. 위 기록은 일부에 불과하다.

조선 500년을 통틀어 궁궐이나 민가 주변에 호랑이나 표범이 나타난 게 이루 셀 수가 없을 정도. 인왕산 서쪽 자락의 무악재는 호랑이 출몰 단골 장소였다. 행인들은 여럿이 모여 꽹과리를 치며 군사들의 호위 아래 겨우 고개를 넘었다. 서울에서 호랑이가 출몰한 곳은 인왕산 골짜기만은 아니었다. 멀게는 수락산, 가깝게는 4대문 안에서도 어슬렁거렸다

요즘 무시로 도심까지 내려오는 멧돼지 뉴스나 지난 9월 대전 오월드 동물원에서 탈출한 퓨마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조선에서 최초의 호랑이 출몰 기록은 태조 1년부터 나온다. ‘호랑이가 성에 들어오니, 흥국리 사람이 활로 쏘아 죽였다’는 내용이다.

▲백호 (White Tiger)
▲백호 (White Tiger)

■ 조선시대 호랑이 잔혹사

조선 시대 호랑이에 의한 피해는 현재의 교통사고 발생률보다 높았다. 1571년(선조4) 10월, 눈썹과 이마가 흰 백호가 지금의 고양시 등지에 출몰해 사람과 가축 400여 마리를 죽였다. 지금 들어도 충격적인 사건이다. 임진왜란 때 경복궁이 불타서 선조는 주로 창덕궁에 머물렀는데, 호랑이가 자주 나타났다.

심지어 1607년(선조40) 7월 18일에는 창덕궁 안에서 호랑이가 새끼까지 낳았다. 선조는 창덕궁에 출몰한 호랑이를 꼭 잡도록 어명을 내렸다. 그러나 그 호랑이와 새끼를 잡았다는 기록은 없다.

특히 전 세계적으로 소빙하기에 걸쳤던 현종과 숙종, 영조 시대에는 호랑이 피해가 극심했다. 1701년(숙종27) 강원도에서만 화천 지방을 중심으로 6~7년 동안 300여 명이 죽었다. 1734년(영조10)에는 줄곧 호랑이가 횡행했다. 사람과 가축을 해쳐 8도에서 보고가 끊이지 않았다. 이해 여름부터 가을까지 죽은 자가 140명이었다.

이듬해에는 강원도에서는 40여 명이 죽었다. 1754년(영조30)에는 경기 지방에 호환이 심했나 보다. 4월 한 달 동안 무려 120명이 호랑이에게 먹혀 죽었다. 영조 때는 궁궐에 호랑이가 출몰한 횟수도 3번이나 됐다. 경복궁에 2번이나 들어왔고, 영조가 주로 거처했던 경덕궁(경희궁)에도 호랑이가 들어올 지경이었다. 심지어 호랑이가 나라의 제사에 쓸 소나 돼지 등 제물을 보관하는 ‘전생서’에 들어가 돼지를 물고 가는 ‘웃픈’ 일도 벌어졌다.

1777년(정조1) 9월 19일에는 호랑이가 궁궐 수비대 병졸을 물어간 초유의 사건까지 발생했다. 정조는 도성 주변에서 호랑이나 표범이 은신할만한 숲을 제거하는 일부터 시작한다. 일부 신하들이 왕릉 주변의 나무는 베지 말라고 말렸지만, 정조는 ‘백성들의 안전’을 내세워 벌목을 강행했다.

1796년(정조20) 11월, 성균관 뒷산에서 호환이 발생했다. 군영에서는 호랑이 사냥에 나서려 했으나, 정조는 이를 불허했다. ‘엄동설한의 사냥은 그 폐단이 맹수보다 심할 것’이라는 이유였다. 한양 도성 내 호랑이나 범의 출몰에 대한 마지막 기록은 고종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

1868년(고종5) 9월에는 북악산 등에서 호랑이 3마리, 홍은동 포방터 부근에서 2마리를 잡았다. 1883년(고종20) 1월 2일 고종은 인왕산 밑에서 표범을 잡은 장수와 군사들에게 상을 주었다. 이후 궁궐에 호랑이가 들어온 것은 순종 때 창경원(창경궁)이 동물원이 되고 나서다.

▲ 조선 후기 이인문의 호랑이 수렵도
▲ 조선 후기 이인문의 호랑이 수렵도

■ 호랑이와의 전쟁

삼국시대 때부터 호랑이에 의한 피해는 조선 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적지 않았다. 수시로 궁궐이 털렸고, 궁궐을 지키는 병사를 물어갔다. 843년 신라 문성왕 때는 한꺼번에 호랑이 5마리가 신궁에 나타났다.

고려 시대도 호랑이나 표범의 ‘깽판’은 마찬가지. 다만 <고려사>에서 범의 출몰을 기록한 사례는 대부분 개경의 도성이나 궁궐에 출현한 것에 그쳤다. 1390년 9월 공양왕은 한양으로 잠시 수도를 옮겼다. 그러나 호랑이 피해 등이 너무 커 1391년 2월, 다시 개성으로 돌아와야 했다. 공양왕이 북악산, 남산은 물론 성황당에 제사를 지내도 소용없었다. 기록을 꼽아 봐도, 개경보다 한양에서 호랑이가 더 득시글거렸다.

실제로 조선 중기까지 4대문 밖은 울창한 숲이었다. 지금의 나주시나 상주시 인구 10만 명과 비슷한 작은 도시였다. 수많은 산과 한강으로 흘러드는 중랑천 등 하천들은 초식 동물들의 안식처였고 표범과 호랑이 같은 포식자들을 불러 모았다.

조선시대 왕들은 내내 ‘호랑이와의 전쟁’을 선포했다. 오죽하면 호랑이를 잡으면 벼슬을 내릴 정도였다. 호랑이 사냥 전담 특수부대는 고려 때부터 존재했다. 1277년(충렬왕3) 12월, 고려는 원나라에서 호랑이 잡는 전문 사냥꾼 ‘착호사’ 18명을 요청했다. 이들은 사냥개 150마리까지 데리고 왔다.

조선 초 군마를 사육하던 의정부 녹양 목장은 계속된 호랑이의 공격에 세조 때 폐쇄할 지경에 이르렀다. 제주도 목장은 원래 몽골이 일본을 점령하기 위해 조성했던 게 시초다. 그 후로 운송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계속 말 목장으로 쓴 이유는 제주도에는 호랑이가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 16세기 구식 화승총을 들고 있는 조선의 호랑이 포수들(1886년)
▲ 16세기 구식 화승총을 들고 있는 조선의 호랑이 포수들(1886년)

■ 조선의 호랑이 잡는 특공대 착호갑사

나라에서는 툭하면 호랑이 소탕령을 내렸다. 심지어 호랑이 표범 등 맹수 사냥을 전담하는 군사조직을 운영했다. 1416년(태종16) 임시 조직으로 ‘착호갑사’를 선발해 특별히 훈련했다. 15세기 초까지 200∼400명이 호랑이와 표범 사냥을 전담했다. 성종 때 경국대전은 ‘착호갑사’ 부대를 440명으로 정했다.

착호갑사가 되려면 100m 밖에서 화살을 명중시켜야 했다. 또 두 손에 각각 30kg씩을 들고 한 번에 50m 이상을 가야 했다. 일반 병사가 쓰는 각궁보다 살상력이 크고 무거운 목궁이나 쇠뇌를 써야 했기 때문. 호랑이 2마리 이상을 창과 활로 잡은 자는 특채로 선발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렇게 잡은 사람이 있다는 게 더 신기할 정도다.

화살 한대에 호랑이 숨통이 쉽게 끊어질 리 없는 법. 보통 호랑이를 추적해 먼저 큰 화살을 쏴서 상처를 입힌 다음 긴 창으로 심장을 찔렀다. 호랑이를 잡고 난 뒤 포상 또한 첫 번째나 두 번째 화살을 맞히거나, 창을 박은 사람이 각각 달랐다.

호랑이를 잡은 실적이 있는 갑사는 호랑이 가죽으로 만든 겉옷(虎裘), 호피를 씌운 창과 방패를 갖고 다녔다. 현대로 치면 ‘밍크 코트’가 아니라 ‘호랑이 코트’를 입고 다닌 것. 더러는 착호군이 호랑이 습격을 받아 죽기도 했다.

그럼에도 중종 19년 착호군 대장 김양필은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무려 호랑이 19마리를 잡는 성과를 거두었다. 2018년 여름에 개봉한 영화 <물괴>에서도 착호갑사가 나온다. 한양에 괴수가 나타나자, 착호갑사 100명을 차출해 인왕산을 수색하는 장면이다.

왕이 주재한 사냥 행사 강무는 대규모 호랑이 사냥을 겸하기도 했다. 착호갑사는 강무에서 임금이 탄 가마를 호위하는 핵심 전력으로 활용했다. 국가 위기 땐 최정예 부대원으로 앞세웠다. 중종 때 접어들면서 강무에 참여한 지방군에게도 범과 표범의 사냥법과 사냥 도구를 만들어 설치하는 법을 가르쳤다.

항상 목숨을 담보로 하는 착호군의 활동은 때로는 파견된 지역의 백성들에게 민폐를 일으키기도 했다. 착호군은 그 수가 적었던 만큼 특권의식도 상당했다. 그들은 당번이 아닌 때에는 도성 거리를 활보하며 자신이 착호군이라는 것을 으스대거나 행패를 부리기 일쑤였다.17세기에 이르면 면(面) 마다 호랑이 사냥을 주도하는 착호장을 두고, 리(里) 마다 겨울이면 호랑이 발자국을 쫓는 심종장을 뒀다.

▲ 박정희가 5·16 군사 쿠데타에 성공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1962년 신년 하례식에서 인사를 받고 있다. 박정희 의장 부부가 절대 권위와 힘의 상징, 산신으로 추앙받던 백두산 호랑이 가죽위에 서있는 게 주목된다. 이후 대통령에 취임해서도 호피 위에서 사진 찍기를 즐겨 했다. (출처; 국가기록원)
▲ 박정희가 5·16 군사 쿠데타에 성공하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던 1962년 신년 하례식에서 인사를 받고 있다. 박정희 의장 부부가 절대 권위와 힘의 상징, 산신으로 추앙받던 백두산 호랑이 가죽위에 서있는 게 주목된다. 이후 대통령에 취임해서도 호피 위에서 사진 찍기를 즐겨 했다. (출처; 국가기록원)

■ 인조반정, 호랑이를 폐하고 늑대를 세우다.

17세기 후반부터 화승총을 든 명포수들이 일발필중으로 이름을 날렸다. 범과 표범에 맞선 사냥꾼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무기는 강력해졌다. 조선 건국 이후 17세기 초까지 적어도 매년 1000마리 이상 호랑이와 표범이 잡혔다. 절대 권위와 힘의 상징, 산신으로 추앙받던 호랑이 가죽은 값비싼 사치품이었다.

호랑이나 표범 가죽 인기는 요즘의 명품 백은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고관대작이나 무관들은 거실이나 의자에 호랑이 가죽을 입히는 게 유행이었다. 일반 백성들은 결혼할 때, 신부의 가마에 액막이용 호피를 씌우는 것만 해도 큰 소원이었다. 큰 호랑이 가죽 한 장은 보통 서울의 초가집 한 채와 맞먹었다.

호랑이가 귀한 명나라와 청나라에도 진공품이나 외교적 의례물로 사용했다. 여기에 드는 호피와 표피는 매년 150∼200장 가량이었다. 1711년 이후에는 20∼30장 가량으로 줄었고, 일본에 보내는 통신사도 평균 10여장 내외의 호피와 표피를 가져갔다.

1623년 인조반정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호랑이 사냥’이 큰 역할을 했다. 쿠데타 중심인물 이귀는 1622년 가을, 마침 군사력을 보유한 황해도 평산 부사로 임명됐다. 그 후 평산에서 개성에 이르는 길목의 호랑이 퇴치를 위한 명분으로 군사를 이끌었다. 이귀와 착호군은 1623년 광해군을 몰아내는데 선두에 나섰다. 착호갑사들은 호랑이 대신 광해군을 잡은 것. 인조반정의 숨은 공신은 호랑이 일지도 모른다.

낮엔 왕이 지존이었지만, 한반도의 밤은 호랑이와 표범이 지배했다. 시베리아 호랑이의 한 마리 당 행동범위가 평균 면적 400㎢. 지리산 국립공원은 430㎢. 일주일에 사슴·멧돼지 같은 큰 짐승 한 마리를 먹어야 살 수 있다.

지금 동북아 호랑이는 500마리 정도가 남았다. 남한에서 동물원이 아닌 곳은 경북 봉화의 국립 백두대간 수목원 호랑이 숲에서 사육되고 있다. 마지막 ‘조선 호랑이’를 따지기에는 아직 이르다. 호랑이는 국경이 없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내외뉴스통신, NBN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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