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수호지>에서 ‘무송’은 맨주먹으로 호랑이 골통을 부숴버린다. 그러나 현실 세계에서도 그런 일이 가능할까? 결론부터 말하면, 조선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은 건국 창업주 이성계가 맨손으로 호랑이를 K.O 시켰다는 일화부터 시작한다.

소싯적 멧돼지 사냥에 나선 이성계가 호랑이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갑자기 호랑이가 이성계 탄 말의 엉덩이에 올라 움켜 채려 했다. 이성계는 오른손을 휘둘러 호랑이에게 핵주먹을 날렸다.

호랑이는 기절했다. 이성계의 강력한 오른손 어퍼컷 한 방에 ‘떡실신’한 것. 호랑이가 고개를 처박고 거꾸러져 일어나지 못하자, 이성계는 천천히 말을 돌려 쏘아 죽였다. 대체로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워낙 이성계가 출중한 ‘바람의 파이터’라서 반신반의. 고려 말 이성계는 사냥한 호랑이를 우왕에게 바치기도 하고, 개성 도성에 들어온 호랑이를 잡아 죽이기도 했다.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을 합쳐 태조 이성계가 직접 잡은 호랑이는 3마리다. 1375년 10월, 고려 말엽 이성계가 사냥한 호랑이를 바치자, 우왕은 “흉악한 짐승은 마땅히 잡아야 되지만, 위태한 일이니 다음부터는 조심하시오”라고 당부했다. 이성계의 형은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

이성계는 조선 초대 국왕이기에 앞서 그야말로 한국사 최강의 ‘보우 마스터’로 꼽을 수 있다. 활 쏘고 말달리는 일에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유목 민족인 몽골, 여진족 무사들도 이성계에게는 혀를 내둘렀다.

일찍이 이성계는 100보 밖, 배나무에 매달린 배를 화살로 떨어뜨려, 친구를 대접했다. 또 어떤 날 여종이었던 김씨가 우연히 까마귀 5마리를 보고는 이성계에게 활로 쏘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단 한 번 활을 쏘아 5마리를 동시에 맞추었다. 그러자 김씨는 절대로 이러한 일을 함부로 자랑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이성계는 이성계이지, ‘반지의 제왕’ 레골라스가 아니기 때문일까.

■ 조선 최고의 ‘보우 마스터’ 신궁(神弓) 이성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주연 영화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는 전설적 모험가 휴 글래스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다. 미 서부 개척시대 사냥꾼 디카프리오가 회색 곰과 싸우는 장면은 전율적이기까지 하다. 덩치가 큰 곰이나 호랑이는 심장 등을 정확하게 맞지 않으면, 웬만해선 총 한두 방에 죽지 않는다. 화살은 말할 것도 없다. 가죽이 워낙 두꺼워 잘 박히지 않고, 급소를 맞추기도 어려워 화살 몇 대를 맞고도 끄떡없을 정도다.

<태조실록>은 이성계를 한 번에 4마리의 곰을 잡거나, 표범의 공격으로부터 무사하게 벗어나는 인물로 묘사했다. 정사에 실린 그의 활 실력에 관한 일화들 몇 개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1372년(공민왕21) 37세 때는 큰 곰 4마리를 모두 화살 한 발씩으로 죽였다. 빙판길이나 비탈길에서 말을 달려 짐승을 쏘아 맞힐 때도 한 마리도 놓치지 않았다. 20마리의 담비와 노루 7마리를 잡는데 역시 빗나간 화살이 하나도 없었다고 적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그의 활 실력은 충격과 공포를 자랑한다. 동녕부의 추장 고안위가 오녀산성에 웅거하면서 항전을 할 때다. 이성계는 편전(애기살)을 이용해 성의 군사들 얼굴에 70발을 쏴 70명 모두 맞췄다. 70연속 헤드샷! 이를 보고 고안위는 기겁해 도망갔다.

성안의 군사들도 사기가 떨어져 곧 항복했다. 또 이 소문을 듣고, 주위 여러 성들이 연이어 항복했다. 그 수가 무려 1만여 호나 됐다. 본격적인 ‘주몽’의 재림 신화는 계속 이어진다.

오녀산성을 점령한 후, 요동성 전투에서는 처명이라는 적장을 사로잡기 위해서 나섰다. 한 발은 투구에, 한 발은 허벅지에 맞춘 후 “마지막 한 발은 네놈 머리통을 날려버리겠다!”라고 하자, 처명은 말에서 내려 고개를 숙였다고 한다. 항복한 처명은 이후 이성계 수하에서 활약했다. 황산대첩 때 왜구 장수 아기발도의 투구를 활로 맞춰 벗겼다는 일화는 매우 유명하다. 그 뒤를 이어 이지란이 얼굴에 화살을 맞춰서 쓰러뜨렸다.

의형제인 이지란을 만났을 때 사냥한 사슴을 가지고 다투게 됐다. 그러다가 서로에게 활을 쏘는 대결을 했는데, 이지란의 화살을 모두 피하는 신기를 보였다. 여진인 이지란은 이성계의 활 솜씨에 감탄하며 의형제가 되기를 자처했다. 여진족과 싸울 때도 여진족들의 화살을 말위에서 모두 피해냈다고 한다.

그는 백발백중 뛰어난 활솜씨는 물론 활의 힘도 배나 강했다. 화살 하나로 2∼3마리 사슴이나 노루를 죽이는 것은 예사였다. 이러한 사냥 실력이 고려라는 과녁을 정통으로 꿰고 역성혁명을 성공시킨 동인이 되었을 것이다.

이성계가 수렵을 좋아하자 정도전은 기병을 중심으로 사냥을 병행한 군사훈련 교재 ‘사시수수도’(四時蒐狩圖)을 바치기도 했다. 이성계는 8마리의 명마 ‘팔준마(八駿馬)’를 타고 다니면서 무쌍을 날렸다.

■ 세조 연간 비운의 무장 이징옥과 남이 장군에 얽힌 호랑이

우리 역사 속에는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은 장수 설화가 많다.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 화백회의 도중 난입한 호랑이를 맨손으로 집어던질 정도로 용력이 뛰어난 신라의 김알천, 임진왜란 당시 김덕령 장군 등이 유명하다. 그래도 한국 역사상 최강의 ‘맨손 파이터’는 세종 연간의 장수 ‘이징옥’이 아닐까.

이징옥이 열네 살 적, 그의 어머니가 살아있는 멧돼지를 보고 싶다고 하자, 멧돼지를 발로 몰아 집으로 왔다. 호랑이는 취미로 잡아 죽였다. 그런데, 이징옥은 활을 쏠 때마다 눈을 부릅뜨고 호통을 쳤다. 그러면 호랑이는 눈을 감고 머리를 떨어뜨렸다. 먼저 호랑이의 기를 죽이고 한 발로. 거꾸러뜨렸다는 것이다.

이징옥이 김종서의 뒤를 이어 함경도 절제사 시절 수양의 반정이 일어났다. 수양은 쿠데타에 성공하고 그를 죽이려고 북방에서 한양으로 불러냈다. 그러나 세종의 밀명(널 부를 때는 중대한 일이 있을 때뿐)을 간직한 이징옥은 이를 의심하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낸다. 그리고 군사를 이끌고 반정을 제압하러 갔다. 그는 잠자던 도중 숨어있던 자객 2명에게 급습을 당해 죽었다. 아마 그가 살아있었더라면, 여진 토벌은 계속되어 국경선도 달라졌을 것이다.

세조 연간 남이 장군 역시 최고의 무인으로 조선 땅을 호령했다. 유달리 설화가 많은 남이 장군은 호랑이와 관련해서도 여러 이야기를 남겼다. 1459년(세조5) 무렵 호랑이가 많이 출몰했다. 한양 도성에 연이어 호랑이가 들어와 사람과 가축을 많이 해쳤다. 별명이 ‘큰 호랑이’였던 세조 자신도 직접 호랑이 사냥에 나섰다. 실록에는 세조가 직접 호랑이 사냥에 나선 것이 여러 차례 나온다.

■ 죽어서 조선의 신이 된 남이

세조는 조정 중신들에게 “누가 호랑이를 잡는데 가장 적합하냐?”라고 물었다. 모두들 “선전관 남이가 15세 때에 큰 도적을 잡았고, 말을 잘 타고 용력이 뛰어나다”라고 천거했다. 선전관은 요즘으로 따지면 청와대 무관 정도. 남이는 16세 되던 세조 3년 무과에 수석 합격한 후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곧 1,000여 명에 달하는 군사들이 동원됐다. 이들은 호랑이가 나타난 일대를 포위하고 수색을 하는 한편, 사슴을 풀어 유인하기도 했다.

드디어 산마루까지 쫓긴 호랑이가 수색조에 발견됐다. 남이는 말을 타고 달려 나가 화살을 쏘았다. 호랑이 뒷다리에 맞았는데 끄떡도 하지 않았다. 다시 백우전이라는 크고 강력한 화살을 재어 옆구리에 맞혔다. 호랑이는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고, 발톱을 치켜세워 남이를 향해 덤벼들었다.

남이는 말고삐를 돌리면서 세 번째 화살을 쏘았다. 화살은 호랑이 입으로 들어가 꼬리부분까지 관통해 버렸다. 호랑이가 두 눈을 부릅뜨고 울부짖는 소리가 온 산을 진동시켰다. 몰이꾼들은 모두 겁에 질려 무서워했다. 마침내 남이가 큰 창을 들고 다가가, 최후 발악을 하는 호랑이를 찔러 죽였다.

호랑이 사냥 이후, 남이는 세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다. 여진족 정벌 때에도 선봉에서 적을 무찔러 이름을 날렸다. 특히 이시애의 반란을 제압하고 1등 공신이 되면서 군 사령관에 임명됐다. 27세의 나이에 지금의 국방장관에 올랐다.

1468년 병조판서가 된 지 12일 만에 세조가 승하하면서 예종이 즉위하자 정쟁에 휘말려 죽었다. 남이가 호랑이를 잡은 전설이 내려오는 사근동은 지금 한양대학교가 자리 잡은 언덕배기다. 고개에는 남이 장군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 있는데 이 건물 이름을 ‘백호당’이라고 부른다.

이곳 말고도 남이 장군의 외롭고 억울한 혼은 이 나라 구석구석 산신당에 내려앉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찾는 춘천의 유명 관광지, 남이섬. 이곳에는 섬 이름의 유래가 된 남이 장군의 무덤이 있다. 그런데 이곳은 가짜다. 결기 넘쳤던 그의 진짜 묘는 화성시 제부도 가는 길에 있는데, 문중이 관리한다.

■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은 사람들

<조선왕조실록>에는 맨손으로 호랑이를 죽인 이야기가 종종 등장한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속담처럼, 아마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는 게 전혀 불가능하지는 않은가 보다. 1490년(성종21) 11월에 경주 사람 김소남이 호랑이에게 물려갔으나, 그의 아들 김윤손이 맨손으로 때려잡아 죽지 않았다. 아들의 효행 때문에 평양으로 강제 이주 당할 처지에 놓였던 김소남은 면제되었다.

1703년(숙종 29년) 3월, 합천에 사는 수군 문순천의 형이 호랑이에게 물려갔다. 문순천은 죽음을 무릅쓰고 추격해 호랑이를 쳐 죽여 형을 살리고, 군역(軍役)을 면제받았다. 1711년(숙종37) 1월에는 삼척의 노비 후일이 호랑이에게 잡혀 먹혔다. 이때 후일의 처 ‘응옥’이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고 시신을 다시 빼앗았다. 조정에서는 열녀문을 세워주려다가, 그 여자가 재혼한 것을 알고 계획을 철회했다. 이런 여자랑 사는 남자도 맞고 살았을지도? 역시 아줌마들 함부로 무시하면 안 된다.

실록에서 호랑이 이야기가 가장 많이 나오는 시기는 영조 때로 105건이나 된다. 실제 호랑이 피해도 극심했던 만큼, 특이한 사례도 더러 나온다. 1732년(영조8) 윤 5월, 남원에 사는 백성 우창이 호랑이에게 물렸다. 그의 아들이 호랑이의 두 눈을 찔러 죽여 우창이 살아날 수 있었다. 영조는 이를 가상하게 여겨 부역을 면제하는 특권을 명했다.

1735년(영조11) 1월에는 성주 사람 하감발의 딸이 어미와 함께 자는데, 호랑이가 그 어미를 물어 죽였다. 딸 수양대가 어미를 끌어안고 고함을 지르니, 마을 사람들이 호랑이를 쫓아버려 다행히 어미의 시체를 잃지 않았다. 또 경주에 사는 군관 박남구는 호랑이가 그 어미를 물어뜯자, 호랑이와 서로 격투해 어미가 죽음을 모면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은 장금이

정조 임금 때 남자 ‘장금이’도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았다. 1789년(정조13) 윤 5월 22일 <일성록>에 ‘윤장금(尹長金)’의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어느 날 밤 원주에 사는 장금이네 집에 대호(큰 호랑이)가 침입해 장금의 아버지를 죽여 물고 갔다. 장금이가 따라가 호랑이를 힘껏 쳤다. 호랑이는 장금이의 허리와 옆구리를 물었다. 이때 옆에 있던 장금의 어머니가 호랑이 귀를 입으로 물어뜯었다. 그러자 호랑이가 어머니를 또 무니, 장금이가 큰 소리를 치면서 맨손으로 호랑이를 쳐서 죽였다. 장금이는 호랑이 간을 쪼개고 피를 마셔 아비의 원수를 갚고, 어미를 업고 돌아왔다.

또한 같은 해 8월 6일, 안변에 사는 유학자 이종현의 며느리 ‘현씨’는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아 남편의 목숨을 구했다. 조정에서는 이 여장부를 표창하고, 마을 입구에 ‘정려문’을 세워줬다.

한편 1791년(정조15) 그 무렵 동지 사은사 김이소를 따라 북경에 갔던 백수 선비 김정중(金正中)은 짬을 내어 북경의 동물원을 구경했다. 김정중은 실제 호랑이를 보더니, 맨손으로 범을 때려잡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기록했다.-<기유록(奇遊錄) 1792년 1월 15일>

그는 또 “북경에는 섣달그믐 저녁부터 정월 대보름 밤까지 폭죽(爆竹)하는 관행이 있어 딱총(紙銃)으로 귀신을 쫓는데, 포(砲) 소리보다 더 큰 웅장한 소리가 아침이 다하고 밤이 새도록 끊이지 않았다”고 제야의 폭죽놀이 풍습을 전했다.

‘포호빙하’(暴虎馮河). 맨손으로 범에게 덤비고, 걸어서 황하를 건넌다는 말이다. 평소 자신의 힘을 믿고 자만하면 오히려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다. 항상 신중하고 겸손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선현의 가르침이다. 인간의 삶에서는 힘보다 지혜가 더욱 중요하다.

진정한 용기는 불의에 굴복하지 않고 정의를 실천하는 것이다. 부유함을 무기로 삼고, 권력을 휘두르면 ‘포호빙하’와 다를 것이 없다. 진정한 힘은 주먹이나 창칼에 있는 것이 아니다. 단단히 다져진 내공에서 나오는 힘은 어떤 무기보다 강하다.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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