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양은 문학과 활쏘기와 말타기가 고금에 뛰어났으며, 역학·수학·음악·의술에 이르기까지 모두 재주가 넘쳤다” <세조실록> 총서는 이렇게 시작한다. 수양은 세조의 왕자 시절 이름이다.

세조실록은 수양대군을 찬양하려고 만든 거 같다. 역대 실록 중에서 유난히 왕에 대한 예찬론 일색이다. 세조는 일찍이 어릴 적 피리에도 재능이 있었나보다. 그가 피리를 불자 모든 친척들이 감탄하고, 학이 날아와 뜰 가운데에서 춤을 췄을 정도였다.

다재다능하고 ‘만능 엔터테이너’(?)였던 수양대군은 일찍부터 신동 아니 ‘신궁’(神弓)이 될 떡잎을 보였다. “수양은 항상 활과 화살을 몸에 지니고 다녔다. 또 매 날리는 것을 좋아해, 한 마리의 매만 얻어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역시 수양에게 책은 아닌 것 같다. 손에서 놓지 않은 것은 책이 아니라 ‘활과 매’라고 먼저 썼으니...

수양이 사냥에 능했다는 것은 영화 <관상>에서도 비교적 사실감있게 표현했다. 천재 관상가(송강호 분)을 만나는 수양(이정재 분)의 등장 장면부터 역대 급이다. 수양은 사냥한 멧돼지를 메고 나타난다. 수양의 얼굴에는 이른바 칼자국 상처 ‘칼빵’까지 먹였다. 한양 바닥에 소문난 관상쟁이 ‘내경’은 김종서(백윤식 분)로부터 사헌부를 도와 인재를 등용하라는 명을 받아 궁으로 들어간다.

그러다가 수양대군이 역모를 꾀하고 있음을 알게 된 그는 위태로운 조선의 운명을 바꾸려 한다. 영화 <관상>에서 다룬 관상가의 존재는 영화적 ‘팩션’이다. ‘팩션’은 사실을 뜻하는 ‘팩트(fact)’와 허구를 뜻하는 ‘픽션(fiction)’이 결합한 말.

훗날 세조가 된 수양대군은 할아버지 태종과 닮은 듯 다르다. 두 사람 다 권력의 화신이자, 냉혹한 ‘킬러’라는 점은 같다. 그러나 태종이 조선의 기틀을 잡기 위해서라는 명분과 결과를 도출해 낸 반면, 세조는 몇몇 패거리들끼리 ‘나눠 먹기’에 충실했다는 평가를 남겼다.

■ 수양대군, 16세에 할아버지 태종 뺨치다

‘세종배 강무 대회’라고 쓰고 ‘세종배 수렵 대회’라고 읽는다. 매번 대회에서 발군의 솜씨를 보인 사람은 ‘답정너’. 바로 수양대군이다. 수양의 사냥대회 입상 기록은 1429년(세종11)부터 보인다. 그때 수양은 만 12살이었다. 강원도 철원 평강에서 열린 강무대회에서 수양이 쏜 화살 7발이 모두 사슴 목을 관통했다. 이름하여 ‘견적필살(見敵必殺)’ 흔히 군대나 예비군 사격장에 많이 쓰여있는 글귀다.

1432년(세종14) 6월에는 수양이 여러 왕실 친척들과 더불어 경복궁에서 ‘가족대항 활쏘기 시합’을 가졌다. 수양이 쏜 화살은 경회루 연못을 넘어 과녁에 백발백중했다. 옆에 있던 무장 양춘무가 감탄하면서 “국내 제일 명사수입니다”라고 치켜세웠다. 이미 만 15세에 명사수 정도가 조선 최고의 스나이퍼로 대성할 솜씨였다.

이해 9월 세종이 경기도 남양주(풍양)에서 강무를 열었다. 이날 수양은 날쌘 말을 타고 경사진 언덕을 달려 내려오다가 그만 말이 두어 길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말도 다치고, 안장은 모두 부숴 졌다. 그러나 수양이 누군가. 잽싸게 몸을 날려 말에서 빠져나와 언덕 위에 무사히 올라섰다.

모든 사람들이 놀라고 탄복했다. 나이 16세에 이르러 수양은 할아버지 태종 이방원의 뺨을 쳤다. 아무리 말에서 떨어져도 물파스조차 필요 없는 ‘금강불괴’가 된 것. 1435년(세종17) 2월 강무 때는 수양이 화살 16발로 16마리의 사슴을 죽였다. 역시 ‘원샷 원킬’. 실록은 ‘화살 깃의 피가 바람에 뿌려 옷이 붉게 물들었다’고 적었다. 느와르 영화의 한 장면이다.

늙은 무관인 이원기·김감 등이 이를 보고 “다시 태조를 뵙는 것 같습니다”라고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때까지 조선 최고의 보우 마스터는 단연코 태조 이성계였다. 이날 세종과 문종 또한 수양의 사냥 솜씨를 칭찬하면서 ‘엄지 척’을 한다. 나이 19세에 수양은 태조 이성계가 환생한 증손자가 됐다. 이성계에 버금가는 조선 최고수 보우 마스터 반열에 오른 것이다. 문약했던 문종은 왕세자 시절 몇 번 몰이꾼이 몰아준 노루를 쏘아 잡는 수준이었다.

1436년(세종18) 어느 날 수양은 “천하의 책을 다 읽지 않고서는 나는 다시 활을 잡지 않겠노라”고 선언한다. 세종은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조선에서 유일하게 과거에도 합격하고 문무를 겸비했던 할아버지 태종의 ‘스펙’까지 따라 잡겠다는 것 아닌가. 세종은 수양에게 여러 문학 책과 자치통감 등을 전해 줬다. 또 갑자기 후원을 메워 농사도 짓는다고 하자, 농업 책까지 내려 줬다.

실록에는 1436년부터 3년간 수양의 사냥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1436년 수양의 절필 선언, 아니 ‘절렵’ 선언 이후 그동안 정말 활을 잡지 않은 것일까?

■ 전설의 더블 ‘일타 육피’, 이성계와 로빈후드가 울고 가다

1439년(세종21) 윤2월, 수양이 23세 때 일이다. 세종이 강원도 철원·평강 지역에서 강무를 열었다. 이때 9마리의 사슴이 나타났는데, 수양이 그 중 6마리를 쏘아 죽였다. 또 5마리의 사슴이 함께 내려오자, 그중 4마리를 쏘아 죽였다. 세종과 문종의 칭찬이 쏟아졌다. 그런데 이뿐만이 아니다. 이날 수양은 편전 화살 하나로 한꺼번에 사슴 6마리를 죽였다. 그것도 두 번이나. 또 화살 한 방에 5마리를 죽인 것이 도합 네 번 이었다.

따블, 따따블. 일타육티 아니, 일발육록. 전설의 시작이다. 수양의 화살 솜씨는 증조할아버지 태조 이성계를 가볍게 넘어선 것이다. 이쯤 되면 올림픽 양궁 4연패쯤 되는 각이다. 천하의 이성계도 젊은 시절에 화살 하나로 까마귀 5마리를 떨어뜨리고, 노루 두 마리 잡은 게 최대치였다.

게다가 달아나던 사슴이 수양이 탄 말 위를 뛰어넘었다. 수양은 이를 쳐다보다가 활을 쏘아 관통시켰다. 이와 같은 일이 두 차례나 거듭 됐다. 마치 영화<매트릭스> 장면에다가 안젤리나 졸리 주연 영화<원티드>의 ‘누워 쏴’와 흡사한 명장면을 시전 한 것. 정조 때 발간한 조선 최고의 <무예도보통지> 마상재(馬上才)를 미리 재현했다. 요즘 인터넷 용어로 ‘존멋’...

아마 수양은 3년간 사냥을 끊고, ‘절렵’한게 아니었다. 남몰래 ‘화살 신공’을 닦은 것 같다. 이튿날 사냥대회를 주선하던 자는 “어제 수양대군이 활로 쏜 것이 대충 68마리나 됩니다. 그리고 미처 헤아리지 못한 것이 또 몇 마리인지 알 수 없습니다”라고 보고했다.

그날 수양은 세종 이하 모든 강무 참석자들에게 ‘뭔가 보여 주려고’ 단단히 준비한 것 같다. 일종의 떡밥용 말과 연출까지 완벽한 하루였다. “세조(수양)가 용맹을 보이려고, 일부러 둔한 말을 타고는 노루를 쫓았는데, 그 말이 수십 번 넘어졌다. 그러나 세조는 그때마다 말에서 빠져나와 우뚝 서곤 했다”-<세조실록 총서>

교통사고가 난 줄 알았는데, 멀쩡히 일어난 것이다. 그것도 수십 번이나. 뼈가 부러지기는커녕 손끝 하나 안 다쳤다. 수양은 낙법의 일인자이자, 반사 신경이 대단했나 보다. 몰이꾼 장수 성달생은 매번 수양대군이 넘어지는 말에서 뛰어내려 서니 이를 매우 신기하게 생각했다. 물론 일부러 잘 넘어지는 둔한 말을 골라 탄 수양의 헐리우드 액션 솜씨를 몰랐던 것 같다. 이날 수양이 다치거나 죽었다면, 17년 후 자신의 손자 성삼문이 세조에 참살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 세종, 사냥대회에서 왕자들을 제외할 것을 고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 있는 법. <세조실록>에는 없지만 1442년 3월 15일 <세종실록>에는 수양이 낙마한 기록이 남아있다. 사슴을 쫓던 수양의 말을 다른 사슴이 와서 받았다. 이 때문에 천하의 수양대군이 그만 말에서 떨어졌다. 그런데 수양이 탔던 말은 놀라면, 홱 도는 버릇이 있는 말이었다. 세종은 말 조련을 잘못한 사육사에게 벌을 주라고 어명을 내렸다.

이 때 강무에는 아홉 살 막내 영흥대군까지 강무에 참여했다. 막내를 끔찍이 사랑한 세종은 아들을 위해 지친 짐승은 따로 울타리로 몰았다. 막내 영흥대군은 그곳에서 편하게 ‘사냥놀이’를 즐겼다. 그때 울타리 다른 곳에서 흰 사슴 한 마리가 뭇 사슴 속에 섞여 있었다. 종친과 군사들은 모두 바라만 보고 잡으려 하는 자가 없었다.

말을 타고 나선 수양은 “비록 100명이 달려들어도 반드시 내 손에 죽을 것이니, 너희들은 구경만 하고 있거라”라며 활을 쏘아 죽였다. 그날 행차에 몽골계 출신 귀화인 ‘동나송개(童羅松介)’가 있었다. 그는 신의 경지에 도달한 수양의 활 솜씨를 보고서 꿇어앉아 말했다. “왕자님은 큰 호랑이(大虎)이다. 만약, 우리 땅에 계셨더라면, 최고 영웅 ‘바투르(ba'atur)’가 됐을 것”이라며 한껏 치켜세웠다. 이성계를 뛰어넘어 거의 칭기즈칸과 동급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날 세종은 이게 아니다 싶었던 것 같다. 그날 저녁, 여러 장수들과 더불어 강무 진행 방법을 의논한다. 수양과 왕자 몇몇이 짐승을 다잡아 버리니, 이는 군사들을 강무하는 취지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한 게다.

세종은 “짐승을 싹쓸이하는 왕자들은 뒷전에 있게끔 하고, 병사만으로 하여금 짐승을 잡게 하려고 하는데 어떠냐?”고 넌지시 묻는다. 병사들의 사기 진작을 위해 사냥대회에서 수양 등 왕자들을 제외하는 방법을 고려한 것. 신하들은 “사나운 짐승과 빠른 사슴이 있는데, 별 걱정을 다 하십니다”라면서 그대로 진행할 것을 청한다.

수양이 사냥을 좋아하다 보니 주변에도 유독 무인과 한량 등이 모여들었다. 세종의 3남 안평대군과는 대조적이었다. 수양과 달리 안평은 학문과 예술에 밝아서 고매한 학식을 지닌 여러 문인들과 교류했다.

수양의 군호는 원래 진양대군이었다. 세종은 재위 27년째인 1445년, 수양대군(首陽大君)이라는 호칭을 새로 내려줬다.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 먹고 죽은 백이숙제처럼, 너는 현실정치에 관심을 끊고 초탈하게 살아가라”는 당부였다. 세종은 둘째 왕자의 군호를 수양으로 바꾸면서 그런 일이 없도록 기원했으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수양은 1453년(단종1) 10월 10일 마침내 쿠데타를 감행했다. 이른바 ‘계유정난’을 일으키며 김종서를 제거한다. 그의 나이 37세. 곧이어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2년 후 임금이 됐다. 김종서는 영화 <관상>에서처럼 철퇴에 맞아 죽었다고 전해진다. 혹여 세종은 야심 가득했던 수양의 권력욕을 알아보고, 훗날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날 것을 예상한 것일까.


<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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