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일본의 부호 야마모토 다다사부로(山本唯三郞)는 ‘조선 호랑이 사냥대회’를 열었다. 당시 조선은 일제의 쌀 수탈로 쌀값이 폭등했다. 농민과 노동자들로부터 ‘못 살겠다’는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3·1 운동 직전의 피폐한 상황이었다.

11월 10일 도쿄에서 출발한 원정대 이름은 호랑이를 정벌한다는 뜻의 정호군(征虎軍). 8개 조로 이뤄진 25명의 ‘정호군’과 150명의 몰이꾼은 전국 각지로 흩어져 호랑이를 사냥했다. 일본은 조선의 호랑이 사냥에 열광했다.

영화<대호>도 여기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일제강점기 호랑이 사냥을 그렸다. ‘큰 호랑이’라는 영화 제목만큼이나 단순한 항일 그 이상의 가치가 담겨 있는 영화다. 일제강점기에 호랑이가 사라진 것은 맞지만, 이미 조선 시대에도 대대적으로 호랑이를 잡았다. 한반도에서 호랑이가 사라진 이유는 조선의 포호 정책과 일제의 무자비한 호랑이 사냥 결과물이다.

일본에는 호랑이와 표범이 살지 않았다. ‘일본 늑대’라고 하지만 사실상 야생화 된 들개가 최상위 포식자였다. 반면 한반도는 ‘담배 피우던 시절부터 호랑이의 나라’였다. 단군 신화를 필두로 울산 반구대 암각화에도 호랑이와 표범이 여럿 등장한다.

1990년대 초반까지 비디오를 켜면, 어김없이 ‘호환·마마보다 무서운...’이라는 문구가 떴다. 옛날에는 호랑이에게 입는 호환(虎患)과 천연두(마마·媽媽)가 가장 큰 공포의 대상이었다. 호환이 심했던 충남 논산시 연산면 등 시골 마을에서는 범의 침입에 대비해 아예 마을 전체를 큰 나무를 쪼개어 목책과 울타리를 만들어 놓기도 했다. ‘개구멍’이란 말이 유래도 그렇다. 원래 진돗개가 피할 수 있도록 부엌 문턱에 만든 진도 특유의 색다른 가옥 구조였다.

■ 1년의 절반을 호환에 문상 다닌 조선 사람

오죽했으면, 중국 사람들의 속담에는 이런 것도 있다. “조선 사람들은 1년의 반은 호랑이한테 물려죽은 사람 문상 다니고, 나머지 절반은 호랑이 사냥을 다닌다” 혹은 “조선에서는 1년의 반은 사람이 호랑이 사냥을 다니고, 나머지 반은 호랑이가 사람을 사냥하러 다닌다”는 것.

대부분 산으로 이뤄진 우리나라와 달리 평야가 발달한 중국에서도 호랑이를 보기가 어려웠다. 지금은 중국과 러시아 영토가 됐지만, 호랑이의 주서식지인 동북아는 고구려와 발해의 땅이었다.

호랑이의 주공격 수단이자, 힘의 원천은 앞발이다. 목표물을 공격할 때 위력은 700~800Kg에 달한다. 서양의 최고 맹수인 사자가 400Kg에 불과한 것을 보면 그 위력을 알만하다. 달리기 실력 또한 시속 70km 이상을 넘는다.

늘 골칫거리였던 호랑이는 역설적으로 산신령의 상징으로 대변되었다. 연암 박지원의 소설 <호질>처럼 호랑이에 관한 독특한 이야기나 속담, 맹호도 같은 그림, 호랑이의 위력을 빌린 공예품 등을 발달시켰다.

호남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전남 구례 운조루 솟을대문에는 호랑이 뼈가 걸려 있다. 이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운조루를 지은 유이주(柳爾胄, 1726~1797)는 맨손으로 호랑이를 잡을 정도로 힘이 넘치는 무신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집 솟을대문에 그가 잡은 호랑이 뼈를 줄줄이 걸어 놓았다. 그런데 호랑이 뼈가 워낙 귀하다 보니 누군가 하나둘 집어 가고, 이제는 다른 짐승의 뼈를 대신 걸어 두었다고 전한다.

예를 들어 ‘사인검’(四寅劍)은 호랑이의 위력을 빌려 삿된 귀신을 물리친다는 뜻을 담았다. 호랑이를 상징하는 인년(寅年), 인월(寅月), 인일(寅日), 인시(寅時) 등 12간지 인(寅)자가 네 번 겹치는 시간에 쇳물을 부어 만든 보검이다.

12년마다 제작할 수 있었으니, 무척 귀하고 신령스러움을 더했다. 임금은 전쟁 등 큰일에 나서는 장수에게 사인검을 하사해 신임을 주었다. 근래에 대통령이 장성 진급자에게 주는 예도인 삼정검은 사인검을 본뜬 것이다.

조선 태종이나 세종 임금은 가물 땐 수시로 호랑이 머리를 잘라 한강에 넣었다. 호랑이 머리를 기우제의 제물로 쓴 풍습은 조선시대 내내 이어졌다. 한두 번도 아니고, 기록에 보이는 것만 해도 20번이나 된다. 물을 관장하는 신은 ‘용’이다. ‘용호상박’이라는 말이 상징하듯, 두 동물이 싸울 때는 비가 온다는 믿음에서 비롯됐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 몸보신하려 ‘조선 호랑이’ 먹어

임진왜란 때 일본군들은 난생처음 보는 호랑이에 엄청난 인상을 받았다. 조선 호랑이에게 상당한 경외심을 느꼈을 정도. 당시 일본 무장들 사이에선 호랑이 고기가 기력을 보충해준다는 설이 나돌았다. 이미 1425년(세종7) 일본에서 온 사신 ‘중태’가 호랑이 고기와 쓸개, 뼈를 얻어 간 적이 있었다.

이 말을 믿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으로 출병 가는 장수 ‘깃카와 히로이에’(吉川広家)와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에게 호랑이를 사냥해오라고 지시했다. 나이가 들면서 기력이 현저하게 쇠퇴한 도요토미로서는 호랑이 고기가 더욱 탐이 났을 터.

공명심이 강했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역시 호랑이 사냥에 혈안이 됐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무장들이 호랑이를 사냥한 이야기는 여럿 전해진다. 그중에서도 가토 기요마사의 호랑이 사냥이 가장 유명하다. 가토는 1592년부터 호랑이와 가죽 다섯 장을 도요토미에게 바쳤다. 다른 상인에게도 호피 한 장을 보냈다.

시마즈 요시히로는 포획한 호랑이 두 마리를 소금에 절여 일본에 있는 도요토미에게 보냈다. 호랑이 고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요토미가 임진왜란을 일으킨 다음 해 1593년 9월 첩 요도 도노로부터 아들을 얻었다. 그가 56세의 나이로 얻은 아들의 이름은 히데요리였다.

도요토미는 이뿐만 아니라 규슈(九州)의 다이묘에게도 학과 백조를 진상하라고 명령했다. 이 또한 호랑이와 마찬가지로 기력 회복에 도움을 준다는 설이 있었기 때문. 그러나 몸보신용으로 조선의 호랑이까지 잡아먹은 도요토미는 그리 오래 살진 못했다. 작은 몸집에 ‘원숭이’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던 그는 호랑이 간과 쓸개까지 먹었지만, 임진왜란이 가장 치열했던 1598년 8월 61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임란 종료 후 격화된 일본 내전에서 도요토미의 늦둥이 히데요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퇴하고, 1615년 23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그리하여 도요토미 가문은 완전히 멸문하게 된다. 조선에서 호랑이뿐만 아니라 수많은 조선인을 죽였던 가토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섰다.

지금도 임진왜란중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약에 쓸 호랑이 고기나 내장을 소금에 절여서 보내도록 무장들에게 지시한 서장이나, 호랑이 고기가 도착할 때마다 도요토미가 무장들에게 내린 감사장이 여럿 남아있다.

■ 박정희 대통령이 깔고 앉았던 호랑이 가죽의 행방은?
수많은 영웅호걸담 중에는 공통점이 있다. 사자나 호랑이 등 맹수의 왕을 죽이고 최고 지존이 되었음을 과시하는 이야기다. 도쿠가와 막부 말기, 사무라이들이 호랑이를 죽이는 그림이 유행했다. 특히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왜란 전쟁 영웅으로 우뚝 섰다. 인기 우키요에 화가인 우타가와 구니요시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기요마사의 창이 호랑이 머리를 내리찍는 그림을 그렸다. 일본인들도 활기찬 분위기를 선호해 맹수의 제왕을 제압한 사무라이 그림을 선호했다.

약자를 누르면 강자가 되지만, 강자를 꺾으면 왕좌에 오른다. 정난을 통해 왕위에 오른 세조는 평생 ‘호랑이를 잡기 위해 태어난 사람’으로 보인다. 감히 고개를 들어 쳐다볼 수 없는 절대 권력의 상징인 호랑이를 제압함으로써 최고 지존이 되고 싶었다.

권력을 잡자마자 호랑이 가죽을 깔고 앉은 박정희 대통령도 같은 마음이었을게다. 그는 독재 기간 동안 호랑이 가죽위에 앉거나 선 여러 사진을 남겼다. 심지어는 절대 권위와 힘의 상징, 산신으로 추앙받던 백두산 호랑이 가죽위에서 가족사진을 찍기까지 했다.

박정희 대통령 기록 사진에는 표범 가죽도 나온다. 1962년 신년하례회 기념사진에서 부하들은 표피 위에서 사진을 찍었다. 호랑이보다 한 단계 급이 낮은 표범 가죽은 죽어서도 부하들 몫이었다.

권불십년이요, 화무십일홍. 달도 차면 저무는 법. “가혹한 정치는 범보다 사납다(苛政猛於虎)”는 선현들의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금과옥조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고 했다. 그랬건만, 박정희 대통령 사후 청와대에 있던 호랑이와 표범 가죽은 행방불명이 됐다. 행방을 아는 사람은 둘 중 하나다. 전두환 신군부가 가져갔거나 박근혜 전 대통령.<문화평론가 박승규 skpark6401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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