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메로스의 <일리아스>는 마지막 부분이 백미다. 아들 헥토르를 잃은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가 수레를 타고 혈혈단신 아킬레우스를 찾아간다. 늙은 왕과 적진의 장수 아킬레우스의 조우는 조마조마하다. 성질 급한 아킬레우스가 프리아모스 왕을 단칼에 찔러 죽이면 어쩌지?

아킬레우스의 막사에 몰래 찾아들어온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의 두 손에 입을 맞춘다. 프리아모스는 “나와 동년배인 그대의 아버지를 생각하라”고 말하면서 ‘내 자식을 죽인 사람의 얼굴에 손을 내밀고 있는’ 자신을 봐서라도 헥토르의 시신을 돌려달라고 간청한다.

이 말이 아킬레우스의 마음을 움직인다. 두 사람은 서로의 처지를 생각하며 흐느껴 우는데 그 울음소리가 아킬레우스의 막사 안에 가득 찬다. 아킬레우스는 고향의 아버지와, 헥토르에게 죽임 당한 벗 파트로클로스를 생각하며,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의 발치에 죽어 있는 아들 헥토르를 생각하며 통곡한다. 

함께 소리 내어 운 후 아킬레우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가져가도록 허락한다. 그리고 프리아모스에게 함께 저녁을 먹자고 한다. 저녁을 먹은 후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를 보고 감탄한다.

“다르다노스의 후예인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를 보고 감탄한다. 그가 어찌나 크고 아름다운지 보기에 신과 같았다. 한편 아킬레우스도 다르다노스의 후예인 프리아모스의 고상한 용모와 언변을 보고 듣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호메로스 <일리아스>, 숲 출판, 천병희역

두 사람은 극적으로 화해하고, 프리아모스는 헥토르의 시신을 받아서 돌아온다.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모스, 적이었던 두 사람은 존경하는 친구가 된다. 고대 그리스 사회에서 적은 친구가 될 수 있는 존재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 사회에서 적이란 존재하지 않은 것이 아닐까? 적이라 해도 존경할만한 면이 있을 때 그들은 적을 경애했다. 반면 경멸스러운 인간과는 설령 그가 지체 높은 귀족이라도 관계를 단절한다.

인간에게는 친구가 필요하다. 우리는 인맥을 과시하기 위해, 자신의 영향력을 키우기 위해  친구를 선별한다. 상대방에게 ‘덕 보려는’ 무의식적 동기로 친구를 사귀는 경우가 많다. 별 볼일 없는 인간에게는 접근하지 않으며 이용가치에 따라 사람을 사귀고 관계를 유지하는 세태이기도 하다.

해서 인맥관리를 잘하라는 담론은 우리 사회의 상식이 되다시피 했다. 인적 네트워크에 따라 내가 덕을 보는 시스템으로 사회가 굴러가기 때문일 것이다. 친구가 적거나 혼자서도 잘 노는 유형을 ‘부족한 인간’으로 바라보는 시선도 있다. 친구의 수가 인생의 성공여부를 가늠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이런 담론에 익숙하다보니 친구가 적은 사람은 “내게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걱정한다. 그러나 인간의 가치가 친구의 수로 판단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물론 친구가 중요하다. 그러나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니체는 사랑보다 우정을 상위의 가치로 보는 듯하다. 우정을 나누려면 그 영혼이 ‘구차하며 인색’하지 않아야 한다. 니체는 ‘사랑’은 우정관계에 있는 자들, 그러니까 친구사이에 있는 사람들만 가능하다고 보는 것 같다. 

니체는 벗에게 ‘너는 위버멘쉬를 향한 화살이 되고 동경’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벗은 그러니까 인간의 상승적 삶을 위한 동경이며, 그 삶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 같은 존재여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를 끌어내리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를 ‘하늘의 높이까지’ 끌어올리는 존재가 친구다.

해서 벗이 되려면 벗을 위해서 전쟁을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전쟁을 벌이기 위해서는 벗에게 적이 될 줄도 알아야 한다고. 벗을 위해 전쟁을 각오해야 하고, 벗에게 적이 될 각오를 해야 한다면 ‘벗 되는 것’  쉬운 일이 아니다. 왜 그래야 하지? 벗이 되기 위해 적이 될 각오로 그와 전쟁을 벌인 다는 것이 와 닿지 않는다. 내가 그를 ‘폭력적으로’ 변화시켜야만 할까? 내가 그와 전쟁을 벌여야 할까? 내가 그와 적이 되어야 할까? 벗이 되는 방법이 참 폭력적이구나, 생각했다. 있는 그대로 그의 모습을 인정해주면서 친구가 되면 안 되나?

그러나 니체에게 친구란 ‘나와 나의 대화가 심연으로 가라앉지 않도록 막아주는 코르크’같은 존재다. 나의 부패를 막아주는 존재, 그것은 역으로 친구의 부패를 막아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친구란 상호간에 ‘코르크’ 역할을 하는 존재라고 해야 할까?

내가 나의 부패를 막기가 쉽지 않다. 이때 친구가 필요하다. 친구는 내가 상하지 않게 막아주는, 나를 상승시키는 존재다. 나 역시 그에게 그런 존재일 것이다. 그러므로 친구는 상호간에 자기 내면에 최상의 타자성을 지닌 존재가 되도록 하는 자다. 부패하거나, 눈을 뜬 장님처럼 보지 못하는 존재가 되지 않도록 내 안에서, 친구의 안에서, 전쟁을 벌이는 적이 될 줄 알아야 하는 자다. 그와 적이 되고, 그와 전쟁을 벌이면서 내가 뜯어고치고 싶은 것은, 그의 내면의 부패이면서 동시에 나의 내면의 부패일 것이다. 그래서 벗은 나에게 전쟁을 벌이는 적이 되며, 나 또한 그와 일전을 벌이는 적이 된다. 즉 벗을 통해  자기를 극복하는 자가 되려는 것이다.

친구를  바꾸려는 것은 동시에 나를 바꾸는 실천이며 그것은 함께 상승하려는 의지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감히 타자에게 우정을 청하려는 것은 대등하고 떳떳한 관계에서의 사랑을 하려는 것이며, 그 사랑의 행위에는 전쟁 같은 격렬한 동경이 필요하다. 그것은 내가 나의 벗에게 ‘위버멘쉬를 향한 화살’이 되려는 의지이며 실천일 것이다. 그래서 벗은 때로 적이 될 수 있다. 적은 역으로 벗이 될 수 있다. 단 이때 적은 서로에 대한 존경과 경의를 표하는 관계다.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모스는 서로에게서 존경과 아름다움과 신의 형상을  본다.

경멸할만한 적은 니체에게서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니체의 주인도덕에서의 주인은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에게서 좋음을 발견하고 적에게도 경의를 표하는 인간이다. 노예도덕의 노예는 자기의 약함을 무기로, 강한 자를 강하다는 이유로 단죄하고, 자신의 약함을 도덕으로 합리화하는 인간군상을 지칭한다.

그래서 내가 벗을 사귀는 행위, 우정을 청하는 행위는 나를 변화시키며, 나를 극복하는 것이며 동시에 벗을 변화시키는 행위이다. 이 행위에는 전쟁과 고통과 서로에게 적이 되는 격렬한 변화를 각오해야 하는 과정을 수반한다.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니체에 따르면 인간에게는 너무나 많은 ‘심연’이 존재한다. 이 심연으로 가라앉지 않기 위해 인간은 ‘벗과 그 벗의 높은 경지’를 동경하는 것이라는 설명이다. ‘자신의 벗의 내면에서 최상의 적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최상의 타자성’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곰곰 생각해보면 우리는 익숙한 ‘자아의 환영’속에 갇혀 살고 있는지 모른다. 나는 나의 자아의 환영을 타인, 즉 친구에게서 찾는다. 친구에게 형성된 나의 이미지, 조작된 나, 나이기를 원했던  나의 가면, 즉 나의 익숙한 동일성만을 친구에게 기대하는지도 모른다. 그 기대에 맞춰서 친구는 나에게 나의 환영을 되비추어준다. 그것은  타자성이 아닌 익숙한 나다. 그 나를 연기하며 살고 있는 나는 그 연기하는 나를 보여주는 존재로서 친구를 필요로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니체는 정확히 이 지점을 깨부수고 익숙한 나의 가면을 벗어난 지점에서, 친구에게서 나의 적을 만나라고 주문하는 것이 아닐까? 친구 역시 나에게 기대하는 것이 그것일 것이다. 니체는 친구란 서로를 변화시키는 관계, 서로에게 ‘폭력적인’ 타자성이 되는 관계, 이것을 ‘체화’하기, 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와 함께 벗을 사귐에 있어서 주의해야 할 점은 ‘연민의 정’이다. 연민의 정이 항상 문제다. 니체는 연민의 정을 인간들이 자기를 기만하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음을 경계한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연민의 정이 뿜어내는 독기’를 경계하는 니체는 우정에서도 특히 ‘연민의 정’을 감추라고 주문한다. 

니체는 말한다.

“너는 네 벗에게 맑은 대기이자 고독이며 빵이자 영약인가?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사슬조차 풀지 못한다. 그런데도 벗에게는 구세주가 되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중에서

‘자기의 사슬도 풀지 못하는’ 자가 ‘연민의 정’을 앞세워 친구에게 구세주가 되려는 태도는 꼴불견이 아닌가?  내가 ‘노예인 한 나는 벗이 될 수 없으며, 내가 폭군인 한 벗을 사귈 수 없다.’ 나는 남을 변형시키는 폭군이기 보다는 오히려 나를 변화시키는 과정으로서 친구가 필요한지 모르겠다. 해서 우정을 나누려면 ‘영혼이 구차하지 않고 인색하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다. 벗에게 얼마를 내주든, 똑같이 적에게도 내주는 인간, 벗이든 적이든 막론하고 태양 같은 내어줌, 그 행위 속에서 우정이 싹튼다. 그 우정은 사랑보다 상위의 가치가 된다. 이 내어줌의 행위에는 격렬한 전쟁과 자기 극복과 타자의 변화까지도 촉발해 낼 나의 의지까지 포함한다.

벗과 적은 공속한다.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모스는 적이면서 벗이 되었으며 또한 적이다. 벗은 적이다. 적은 벗이다. 

 

천경 작가, 주부재취업처방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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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경의 니체 읽기>는 매월 첫째주, 셋째주 화요일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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